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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규 Oct 15. 2024

달팽이도 외로울까

‘현재 접속 중인 아이디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해주세요.’


순간 내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한 소리가 귓전에서 울리는 듯하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확인 버튼을 누르니 ‘게임을 종료하시겠습니까?’라는 메시지 창이 나온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몇 번이나 확인하면서 재차 접속을 시도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소울이가 로그아웃하지 않은 채 떠나서 계속 로그인 상태인 것일까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친다. 그러나 그건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설사 소울이가 로그인한 채 사라졌다 해도 기기의 전원이 꺼지면 게임에서 로그아웃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혹시 소울이가 지금 피시방이라도 가서 로그인한 걸까?


“달달아, 내가 이제 정신이 이상해지나 보다. 말도 되지 않은 생각을 하다니…….”


내가 달달이라고 부른 것은 소울이의 책상 위 선반에 놓인 사육통 속의 주인이다. 지난가을 부엌의 싱크대를 기어다니던 달달이를 발견한 건 소울이다. 소울이의 고함소리에 놀라 달려가 보니 작은 명주달팽이 한 마리가 꼬물꼬물 싱크대 위쪽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괴생명체라도 발견한 듯 신기한 표정으로 명주달팽이를 관찰하고 있는 소울이를 진정시키며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이게 들어올 틈이 없는데 어떻게 여기에 있을까?”


싱크대 위로 창이 있지만 창문 새시의 물구멍까지 방충망 스티커로 촘촘히 막아 놓은 상태였다. 더구나 아파트 19층까지 기어 올라와 그것도 하필 우리집에 그 녀석이 찾아들어 왔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그럼 우리 집에 어떻게 들어왔어?”


“아마 마트에서 구입한 야채 속에 묻어서 들어온 거겠지”


나는 전날 여러 식료품과 함께 샐러드를 하기 위해 배달시켰던 야채 묶음을 떠올렸다.

 

“아빠, 이거 우리가 기르자. 음, 이름은 달달이가 어때?”


소울이는 나무젓가락으로 명주달팽이를 조심스레 집어서 종이컵에 담았다. 그 속에서 꼬물꼬물 기어다니는 녀석을 보니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곧 영하의 날씨가 닥쳐올 바깥으로 내칠 수도 없었다.

 

잡동사니를 보관해두는 펜트리룸을 뒤져보니 화분 분갈이를 하고 남은 배양토가 눈에 띄었다. 소울이와 나는 못 쓰는 식품보관용 밀폐용기 하나를 찾아내 뚜껑에 송곳으로 공기구멍을 낸 다음 배양토를 깔아 달달이의 임시 거처를 만들어주었다.


그날 저녁 집 근처의 생활용품점에서 어항 속에 넣는 나무 밑둥 모양과 버섯 모양의 장식품까지 사서 달달이 집 속에 넣어주니 꽤 근사한 사육장이 되었다. 그 후 인터넷 검색을 통해 달팽이 전문용품 업체에서 달팽이용 사육통과 코코피트 바닥재, 영양사료, 먹이접시를 구입해 달달이의 정식 집을 완성시켰다.


달달이를 기르자고 한 건 소울이지만, 정작 달달이를 보살펴주는 건 내 몫이 되었다. 먹이를 주고 배설물을 치우고 바닥재를 갈아주고 사육통과 장식품을 청소해주며 나는 대화를 나눌 만큼 달달이와 친해지게 되었다.

 

물론 대화란 게 나의 일방적인 ‘기브(give)’였고 달달이에게서 돌아오는 ‘테이크(take)’라곤 투명한 사육통 밖에서도 느낄 수 있는 침묵과 무관심뿐이다. 달달이가 나의 기브에 대해 유일하게 응답을 해주는 건 먹이였다. 먹이를 주면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가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곤 달려든다. 먹이를 주면 곧바로 달려들어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흐뭇해 할 수밖에 없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달달이가 내게 베풀어주는 기막힌 재주(?)가 하나 있기는 하다. 상추를 먹이로 주면 녹색 똥을, 수박을 주면 빨간색, 하얀색의 달팽이 전용 사료를 주면 하얀색 똥을 싸는 것이 바로 그것. 만약 달달이가 검은색 똥을 싸면 먹이를 달라는 신호다. 바닥재인 코코피트가 검은색이기 때문이다. 식사가 부족하면 달달이는 바닥재를 먹는 것 같다.


달팽이는 색소를 분해하고 흡수할 수 있는 쓸개를 갖고 있지 않아 먹이의 색소를 그대로 배설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달달이의 색색가지 똥을 매일 치워주어야 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할 때마다 이 녀석의 현란한 재주에 감탄을 보내곤 한다.

 

또 하나 내가 이 녀석에게 정이 가는 건 일종의 동질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투명한 사육통 안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야 하는 달달이의 모습은 예전에 연구원 시절 실험실에서 일하던 내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업무시간 내내 실험실에서 꼼짝하지 않고 연구에만 매달려야 하는 연구원의 일상.

 

어디로든 멀리 벗어날 꿈조차 꾸지 못한 채 느릿느릿 사육통 안을 맴도는 달달이의 모습에서 연민을 느낀다면 아마 그 시절의 애틋함 때문이리라. 사실 오피스텔과 집을 쳇바퀴 돌 듯 오가며 하루 종일 원고를 생산해야 하는 지금의 내 상황도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혹시 달달이도 사육통 안에서 외로울까. 아니면 외로움이란 감정이 아예 없는 걸까. 어쩌면 쓸개가 없는 것처럼 외로움을 만들어내는 기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달달이는 지금도 나의 말 같지 않은 질문에 아랑곳없이 혼자 사육통 뚜껑에 거꾸로 매달려 더듬이만 발랑대고 있다. 아예 외로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외로운 개체를 바라보는 일만큼이나 쓸쓸한 것도 없는 듯하다.


소울이가 직접 로그인할 리가 만무하니 단풍이야기에 그런 메시지가 뜬 이유는 두 가지밖에 없다. 그 사이트의 일시적인 오류이거나 아니면 다른 이가 소울이의 아이디를 해킹해서 접속하고 있는 상황이다.


나는 그 두 가지 상황을 모두 확인하기 위해 안방에서 내 비밀번호 수첩을 가져와 펼친다. 만약 나의 아이디로 로그인해도 현재 접속 중이라는 메시지가 뜬다면 단풍이야기의 일시적인 오류이다. 그렇지 않고 로그인된다면 소울이의 아이디가 정말 지금 접속 중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비밀번호 수첩이란 인터넷 뱅킹 이용시 필요한 공동인증서 비밀번호를 비롯해 업무상 필요해서 가입해둔 각종 사이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 등 메타버스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암호들이 담긴 수첩이다.


거기서 찾아낸 단풍이야기의 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니 이번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뜬다.


‘보호모드가 적용된 아이디입니다. 보호모드 상태에서는 이용이 불가합니다. 본인 인증 후 비밀번호를 변경하시면 보호모드를 해제하실 수 있습니다.’


그 밑으로 본인 인증을 할 수 있는 수단이 적힌 3개의 아이콘이 보인다. 오랫동안 접속하지 않아서 다시 본인임을 인증해야 하는 것 같다. 나는 그 중에서 휴대폰 인증을 선택하고 새로운 비밀번호를 만드는 번거로운 절차와 새 패치를 다운로드 한 후 드디어 단풍이야기의 익숙한 배경음악을 듣는 데 성공한다. 두 가지 가능성 중 일단 이 사이트의 오류는 아닌 것이 확인된 셈이다.


내 캐릭터가 사는 서버를 선택하니 3년 전까지 공들여 키웠던 전사 ‘B라코차’가 예전 모습 그대로 나를 반겨준다. 수첩에 적혀 있는 2차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B라코차는 ‘기억의 늪 모라스’라는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아마 내가 단풍이야기의 갖가지 퀘스트를 수행하며 몬스터들을 마지막으로 사냥했던 마을이리라.


온라인 게임인 단풍이야기의 특징은 하기 쉽다는 점이다. 또 하나 내가 이 게임을 좋아한 이유는 공정성 때문이다. 모든 온라인 게임이 그렇겠지만 단풍이야기는 열심히 몬스터를 잡고 주어지는 퀘스트를 성실히 이행하면 게임에 필요한 메소와 아이템을 얻고 레벨을 높일 수 있다.


그 같은 공정성은 바로 확률에서 나온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에 따른 합당한 보상이 정확히 주어지지 않는 현실 세계와 달리 이 게임의 세상은 모든 것이 확률로 계산되어 무일푼으로 시작한 캐릭터들도 열심히만 하면 정확한 보상을 얻게 된다.


물론 이곳에서도 실제 현금을 사용해 좋은 아이템을 구입하면 다른 이들보다 레벨을 더 빨리 올릴 수 있으며, 불법 프로그램과 매크로 사냥이라고 불리는 해킹이 판치기도 한다. 또 게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공정성을 운영진 스스로가 위배하는 사건이 가끔씩 터지기도 한다. 현실 세계와 달리 정의로운 세상인 듯하면서도 현실 세계의 부조리가 판치는 세상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내가 이곳에서 캐릭터의 레벨 올리기를 중단하고 게임을 그만둔 이유는 소울이가 다른 온라인 게임으로 갈아타서였다.

  

나는 모니터 화면 오른쪽 밑의 게임 아이콘 메뉴 중에서 ‘친구 관리’ 항목을 찾아낸다. 소울이와 나의 게임 캐릭터들은 서로 친구로 설정되어 있기에 이 메뉴로 들어가면 소울이의 게임 캐릭터가 정말로 지금 로그인 상태인지 확인할 수 있다.


전체 친구 찾기로 표시된 항목에서 ‘보라매날다’와 ‘두물도사’의 두 캐릭터가 나타난다. 보라매날다는 소울이의 궁수 캐릭터이고, 두물도사는 마법사 캐릭터다. 그중 보라매날다는 선명한 색으로 나타나고, 두물도사는 희미한 색으로 보인다. 소울이의 보라매날다가 현재 로그인되어 있다는 의미다.


현재 온라인에 접속된 친구 찾기 항목을 클릭하니, 아니나 다를까 진짜 소울이의 보라매날다가 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보라매날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낸다.

 

‘안녕하세요, 보라매날다님. 오랜만이네요.’


모니터 좌측 밑의 메시지 창에 분명히 내가 보낸 글자들이 확인되지만 소울이는, 아니 보라매날다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바로 그때 게임 속 내 캐릭터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온다. 머리에 커다란 검은색 리본을 착용하고 노란색 리트리버 펫을 데리고 나타난 그 캐릭터는 여자 아이다. 펫이란 이 게임에서 캐릭터를 도와주는 애완동물로서, 먹이를 주면 항상 따라다니며 몬스터를 물리쳤을 때 나오는 메소와 아이템을 대신 주워주고 캐릭터의 체력을 충전시켜주기도 한다.

 

나는 다시 메시지를 보낸다.

 

‘보라매날다님, 지금 어디에 있어요?’


캐릭터가 위치해 있는 장소를 알면 찾아가 지금 거기서 보라매날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 그러나 여전히 소울이의 캐릭터는 묵묵부답이다.


나는 포털사이트의 창을 열어 ‘단풍이야기에서 친구의 현재 위치 알아내는 방법’을 검색한다. 방법이 있다. 온라인 친구 창에 있는 친구는 같은 채널에 있을 경우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단풍이야기 속의 가상세계는 우리가 단순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다. 단풍이야기는 일반 게임에서 서버라고 부르는 개념인 ‘월드’가 한때 40여 개에 이르렀지만, 지금은 14개만 오픈되어 있다.

 

다른 월드에 들어가면 마치 다른 세상에 사는 것처럼 똑같은 게임을 해도 친구 캐릭터끼리 마주칠 일도 만날 일도 없다. 소울이와 나는 당연히 같은 월드에서 캐릭터를 만들었다.

 

그런데 같은 월드라고 해도 다시 30~40개의 채널로 나뉜다. 하지만 월드에 한 번 로그인 하면 채널 변경은 손쉽게 할 수 있어서 마음대로 옮겨 다닐 수 있다. 소울이와 나의 캐릭터들이 사는 ‘이노시스’라는 월드는 그리 붐비지 않는 서버인지 30개의 채널이 있다.


나는 채널 1에서부터 다음 채널로 하나씩 이동하면서 온라인 친구 찾기 창에 표시된 보라매날다의 정보를 눈여겨본다. 그렇게 옮겨 다니던 중 채널 21에서 드디어 보라매날다의 현재 위치가 표시된다. ‘빛이 마지막으로 닿는 곳’이라는 장소다.


나는 화면 좌측 위의 미니 지도 창을 열어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검색한다. 현재 내가 있는 곳과 그리 멀지 않다. 나는 그곳으로 찾아가기 위해 길을 자동으로 알려주는 내비게이션 기능을 켠다.


하지만 ‘목적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만 계속 뜬다. 분명히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데 찾을 수 없다고 하니 영문을 알 수 없다. 지금 내가 약간 흥분한 상태여서 기능을 착각한 것일까?

 

몇 번을 시도하다가 나는 작전을 바꾸기로 한다. 다른 장소로 순식간에 이동시켜주는 캐시 아이템이 떠오른 것. 나는 캐시샵으로 가서 순간이동 아이템을 구매한 다음 다시 ‘빛이 마지막으로 닿는 곳’을 클릭한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표시된다. ‘그곳은 240레벨 이상만 이동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내비게이션 기능이 작동되지 않은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지금 내 캐릭터인 B라코차는 237레벨. 하위 레벨에서는 한 레벨 올리기가 쉽지만, 210레벨 이상 되면 한 레벨 상승시키기가 매우 힘들다. 내가 이 게임을 그만둔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음이 이제야 어렴풋이 기억난다.

 

‘보라매날다’의 정체를 직접 확인하려면 ‘B라코차’의 레벨을 올리는 수밖에 없다. 나는 주인을 잃은 채 사육통 뚜껑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달달이를 들고 안방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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