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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밑 Oct 27. 2024

알고보니 변한 건 날씨와 내 마음이다

복잡한 마음 이겨내기

  방이 어수선했다. 몇 개월째 똑같은 모습인데 어수선했다. 가을에도, 겨울에도, 봄에도 어수선하지 않더니 여름이 되자 어수선해졌다. 그 자리 그대로 매일 보는 물건이 괜히 거슬리는 날. 꼭 그런 날이었다. 변한 건 날씨뿐이다.


  그날 나는 한 책의 “너는 너무 너그러워.”라는 문장을 세 번이나 “너는 너무 징그러워.”로 읽었다. 읽고 넘어가고 읽고 넘어가고를 세 번 반복하고, 뒤 문장을 읽으며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세 번 겪은 후에야 '징그러워'가 아니라 '너그러워'라는 걸 알았다. 머릿속에서 니은의 자리가 지읒으로 교체된 걸 보면 마음이 딱 니은과 지읒의 거리만큼 어긋나버렸을지도. 알고 보니 변한 건 날씨와 내 마음이다.


  니은과 지읒의 거리는 얼마일까. 쿼티 자판의 배열로 보자면 넷째 손가락 손톱만큼의 거리이고, 한글 자음 순서로 치자면 여섯 개의 다른 자음을 지나야 하는 정도의 거리감이다. 넷째 손가락 손톱과 여섯 개의 자음 사이에는 아마 수만 개 혹은 그보다 많은 단어가 존재할 것이다. 니은에서 지읒까지 이르는 거리는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고, 나는 딱 그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니은에서 지읒까지 어긋난 정신이 방구석에 미치는 영향: 책상이 꼴 보기 싫고 전자레인지를 올려놓은 선반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고 전자레인지 위치 또한 별로다. 책이 수용 면적 이상으로 많아 보조 책상을 침범했다. 침대 위치가 답답하다. 침대를 없앨 순 없나. 징그러워. 방이 징그러웠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그때는 너그럽고 지금은 징그럽다….



  익숙해서 익숙한 줄도 몰랐던 일상적인 일에 묘한 괴리감을 느낄 때가 있다. 마치 이게 아닌 것만 같은. 앞으로 그런 때를 니은이 지읒이 되는 순간이라고 부르겠다. 갑자기 이렇게 느끼게 된 이유가 불분명한 건 그렇다 치고, 갑자기에 대한 진실조차 불분명한 순간들일 테다. 지금 느낀 이 느낌이 맞는 건지 예전의 그 느낌이 맞는 건지. 그럼 그때는 틀렸던 건지, 나 자신에게 너그러운 판단을 했을 뿐인 건지. 하여간 진실은 늘 왜곡된다.


  방 구조나 바꿔야지. 나와 방 둘 중에 어떤 게 먼저 어수선해졌는지 알 길이 없어서 방부터 들쑤셔 보았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은, 한정된 수납공간에 수납해야 할 물건이 불어나 버렸다는 것. 그것들은 수납되지 못한 채로 근처 어디쯤에서 쌓여갔다. 마음은 마음대로 못 해도 방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줄 알았건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제야 뭐가 먼저였는지 알 것도 같다. 갑작스러운 어수선함의 이유도 짐작이 간다. 여전히 진실은 잘 모르겠지만. 불어난 생각에도 자리가 필요한 모양이다. 어디 하나 정돈되지 못한 채로 넘쳐 버린 생각이 딱 니은에서 지읒까지만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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