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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밑 Oct 27. 2024

삶에도 충전기가 있다면

올인원 대신

  요즘은 충전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세상이다. 글을 쓰다가도 노트북이 꺼지고, 논문을 보던 태블릿에 빨간 불이 켜지고, 필기하던 애플 펜슬은 배터리가 5%라는 알림과 함께 인식이 안 된다. 그러면 진행 중이던 어떤 것도 계속할 수가 없다. 핸드폰이 꺼지자 확인해야 할 것들과 기억해야 할 것들이 모조리 잊힌다. 연락해야 할 사람에게 연락할 방도도 없다. 애플 워치는 시간조차 나오지 않아서 더 이상 워치도 아니게 된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배터리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다. 충전기를 항상 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불편하고 당황스럽고 대처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한 날은 학교에 갔더니 원래 오던 사람들이 보이질 않았다. 당일 아침에 갑자기 줌 강의로 바뀌었단다. 메일을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학교에 와 버린 것이다. 당연히 충전기는 들고 오지 않은 상태로. 강의 필기는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정도였지만 영상 회의는 버거웠다. 노트북 배터리가 빠르게 닳기 시작했다. 점점 발표 생각에 마음이 불안해졌다. 보고하기로 약속된 발표여서 당연히 외우지 않았건만 발표 자료가 노트북에 있었다. 배터리가 10%에 진입하자 말 그대로 ‘똥줄이 탔다’. 불안하고 성가셔서 보고 하는데도 절고 난리가 났다.



  이 모든 사달은 충전기 때문이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충전기만 있으면 간단히 해결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는 일의 구석구석은 오히려 반대다. 원인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원인과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수습이 안 되는 상황. 그런 상황이 부지기수다. 우선순위를 매겨 해결해보라고 하지만 말이야 쉽지. 우선순위를 매기면 그게 다 우선이 되나? 우선순위를 우선에 두려면 또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우선에 삼아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그럴 때면 사무치게 충전기가 그립다. 매 순간 디지털 기기의 충전기와 아웃렛(outlet)을 헤매고 다니는 내 모습은 괜히 이상하게 느껴지는데, 충전기에 이렇게까지 얽매여서 살아야 하나 싶은데, 막상 충전기 하나로 해결되는 시스템이 내 안에도 탑재되어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마음에도 사건에도 감정에도 기억에도 세상에도 삶에도. 전압이 맞는다면, 맞는 선을 쓴다면, 호환이 된다면, 그런 몇 가지 공통된 조건만 부합되면 아무런 문제 없이 튼튼하게 몫을 다할 수 있으면 좋겠다.


  삶에도 충전기가 있다면. 어떤 것이든 충전할 수 있는 올인원 충전기라면 더 좋겠다. 어디에 있던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도 충전할 수 있는 보조배터리라면 더 좋겠다.


  삶의 충전기는 저마다 다르고, 우리는 평생토록 그걸 찾아 나서는 것 같다. 비용을 내거나 감정을 들이거나 시간을 쓰면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때마다 고민하며 결코 터득할 수 없는 것을 터득하려고 애쓰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도 올인원 충전기나 보조 배터리 따위는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아, 지금까지 모든 생각이 애초에 성립하지 않을 듯 싶다. 삶은 '충전식'이 아니기 때문에 충전기를 찾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삶은 그게 어떻든 간에 물레방아처럼 계속 돌아가고야 만다. 나는 어떻게든 움직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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