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받고 싶어서
“저의 작업은 남을 위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어떤 브랜드 홍보용 글에서 봤다. 그런데 정말 가능한 걸까?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
과연 오로지 나만을 위해 무얼 한다는 명제는 참이 될 수 있는 명제일까?
인간의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발달 연구에서는 영아가 생후 2년 가까이 되어야 ‘나’라는 개념이 생긴다고 한다. 1년이 지나기 전까지 아기는 나를 나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런즉, 엄마가 타자라는 사실을 몰라 엄마와 나를 구별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후 엄마를 비롯한 다른 가족 구성원들과 교류하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자기라는 개념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나를 경험하기 이전에 사회를 먼저 경험하고, 나를 경험하기 위해 사회를 경험하는 셈이다.
나라는 존재가 타인의 존재와 이렇듯 긴밀히 닿아 있는 거라면, 우리가 자아를 실현한다고 하는 일들 그리고 남이 아니라 내 만족을 위해 한다는 공공연한 것들은 어쩌면 지독히도 남을 인식하고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진정 자신만을 위한 거라면 아무도 모르게 혼자 하면 된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얼 하는지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문득 남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한다는 외침이 필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외치는 이들은 본성을 거스를 만한 각오로 그 행위에 임하기 때문이다. 새기고 되새김으로써 나를 향한 외부의 판단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노력한다. 따라서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각오를 외쳐야만 한다. 말은 꺼내질수록 그리고 반복될수록 의미로 충만해진다. 충만한 의미는 충만한 힘이 된다. 이들은, 아마 나는, 실은 딱히 내 일에 영향을 주진 않을지라도 남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내심 알고 있다. 알면서도 나로서길 바라는 것이다. 마치 엄마 품에서 나라는 개체를 인식하는 아기처럼 쉴새없이 인식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니 아랑곳하지 않고 나만 신경 쓰겠다고 해놓고 남들의 의견이나 판단을 자꾸 기대하게 된대도 괜찮다. 그건 위선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 만족을 위해 한다면서 이에 대한 비판에 ‘만족’의 수준이 달라지거나 혹은 칭찬에 목말라 있다면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또 다른 우리의 존재들, 그들의 말을, 그들의 움직임을, 그들 자체를 완전히 무시하며 살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니까 괜찮다. 당신이 알고 있다면, 그래서 외치고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