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름따라 Oct 23. 2024

 나를 파고드는 관심을
세상으로 돌리다


유난히 집중이 안 될 때면 노트북을 챙겨 커피숍에 가곤 한다. 운이 좋은 날은 한두 시간 집중하고 나면 하루종일 집에서 책상과 냉장고, 냉장고와 개수대를 오간 것보다 나은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그날도 그런 기대를 품고 커피숍에 갔는데 아차. 이어폰을 두고 왔다. 아무리 가방 안을 뒤져도 노트북 가방을 열어봐도 이어폰은 없었다. 이어폰을 포기하고 노트북을 열었는데 그때부터 옆자리 아주머니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안 들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집중해 듣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대화는 대화라고 하기엔 좀 묘한 구성이었다. 어제 우리 남편이랑 나가서 산책했는데 말이야,라고 이야기를 트고 나면 그다음 아주머니는 그에 대한 반응이나 공감, 해법 없이 바로 자신의 얘기로 넘어갔다. 요즘 너무 더워서 에어컨을 24시간 켰더니 이번 달 전기세가 장난 아닐 거라고 뜬금없이 가계 이야기를 꺼내더니 노후 연금 이야기로 매듭짓는다. 계속 끊겨 이어지는 이런 일방통행 대화를 듣고 나니 정신이 산만해져서 가방을 정리해 나와버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적어도 학창 시절 우리는 앞에 앉은 친구의 이야기를 듣기 평가하듯이 집중해 듣곤 했다. 이젠 타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걸까? 아님 내 문제만으로도 버거워서 타인의 마음속 짐은 얹고 싶지 않은 걸까? 이 두 문제가 서로 엉켜 일어나는 건지 모르겠다.

나도 나에게만 매몰하는 습관이 있다. 내 문제, 내 결핍,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 내 미래 또 내 과거를 돌고 돌고 돌아보면 어지러울 지경이다. 집 밖으로 나가서 친구를 만나도 집 안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환기조차 안 되는 집안 공기처럼 참 갑갑했다. 기분도 수시로 좋았다가 나빴다가 오르락거리곤 했다.

에밀 시오랑은 지나치게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신을 터무니없이 사랑하거나 미워하게 된다고 했다. 나 또한 양쪽을 넘나들며 괴로웠던 것 같다. 난 왜 이럴까? 하며 자책의 날들을 보내다가 지칠 즈음이면 내가 그럴 수밖에 없는 변명거리를 마련해 나를 두둔하며 마음껏 나태해지기도 했다. 나의 마음을 읽어줄 정도로 내 안을 바라보는 데에 그치지 못하고 나를 향한 탐색의 길을 내딛다가 보면 점점 매몰되어 주위를 둘러볼 여력이 줄어든다.

 <행복의 정복>에서 버트런트 러셀은 삶을 즐기게 된 비결로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줄인 것을 꼽았다. 그리고 외부의 대상들, 즉 세상 돌아가는 것, 여러 분야의 지식 그리고 내가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고. 또한 외부에 대한 관심은 어떤 활동을 할 마음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관심이 살아있는 한, 사람은 결코 권태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론적으로 알지만 나를 파고드는 성향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한번 쏠린 관심의 방향은 가속이 붙곤 한다. 의도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돌리지 않으면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사진을 찍으면서 묘하게 내 관심은 밖으로 향하고 있다. 렌즈가 향하는 방향이 내 관심이 쏠리는 곳이다. 렌즈에 한강을 담을 때면 내 마음도 한강으로 가득 차 출렁이고 렌즈에 벚꽃을 담을 때면 내 체취에 벚꽃 향이 묻어난다. 굳이 생각을 전환하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카메라 렌즈를 밖으로 향하기만 해도 충분하다. 

나만을 뚫어져라 봤을 때 느꼈던 인생에 대한 허무감이 시선을 밖으로 돌리니 그제야 덜어졌다. 나는 앙상한 가지의 나무로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게 아니라 내 옆에도 그 뒤에도 또 다른 나무가 있었고 그 주변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하늘엔 올라타고 싶을 정도로 몽실몽실한 구름이 있었고 아낌없이 주기만 하는 해는 꾸준히 햇살을 뿌려주고 있었다. 벅찬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한 줄기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어준다. 

이전 19화 역할의 옷을 벗고 나로 돌아가는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