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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원 Oct 05. 2024

3장 | 비로소 시작되는 관계

차이를 안고 함께

어느 날 슬기와 아주 오랜만에 술 한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문득 그녀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제 나는 너를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생각하려고 해. 가족 같은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 그래야 우리의 관계가 건강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의 ‘특별한 사람’ 목록에서 나를 제외하겠다는 이야기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었다. “그럼 네 친구 ᄋᄋ이랑 나랑 같다는 거야?” 어쩐지 날이 서 있는 말투였다.


“응, 그렇지.”


어라? 내가 예상한 답변이 아니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나를 이렇게 생각해 왔던 걸까? 그래서 다시 물었다.


“그럼 나랑 친구를 왜 해?”


“그야 지나온 세월이 있으니까•••“


나는 정말 곤란하고 혼란스러웠다. 나와 친구가 하기 싫은데 지나온 세월 때문에 억지로 친구를 하는 건지, 아니면 지금 나에게 선을 긋겠다는 경고인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억지로 친구가 되더라도, 십여 년이 넘게 짝꿍처럼 붙어 다닌 이 친구를 놓고 싶지 않았다.


분명 그녀는 우리의 관계를 위한 더 좋은 방안을 찾아온 것일 텐데, 나는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철저한 ‘나’ 위주의 생각이었다. ‘나’는 여전히 가족 같고, ‘나’에게는 여전히 특별하니까.


어찌어찌 이 이야기를 끝마치기는 했지만, 나는 섭섭하고 서러운 마음이 들어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분명 이 대화를 할 당시에는 ‘그냥 친구면 친구인 거지, 뭐 얼마나 건강한 관계가 필요한데.’라는 삐뚤어진 마음이 들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조금씩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손에 꼽힐 만큼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판단력과 올바른 지혜를 지닌 그녀가 그저 감정에 치우친 말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번쩍! 하고 그녀의 말이 한꺼번에 이해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많이 지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없이 흔들리는 나의 모습을 지켜본 그녀는 아마도 감정적으로 매우 지쳐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그녀는 내가 무너지면 함께 울어주고, 일어나면 묵묵히 응원해 주는 그런 친구였다. 그런 그녀에게 가해진 감정적 부담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닐 터였다.


또한 ‘건강한 관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나를 수없이 끌어올리고 나는 수없이 미안해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게 스스로를 포기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이런 관계가 오래도록 유지되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었고 자만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과 타인의 경계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무리 가족 같은 사이이고, 특별한 친구라 해도, 결국 나에게 그녀는 타인이었고, 그녀에게 나는 타인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며 관계를 이어왔기에, 비밀을 털어놓고 함께 눈물을 흘리며 위로해 주는 일들은 서로에게 힘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문제가 악화되고 오래될수록, 자신의 감정과 나의 감정을 혼자서 짊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말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던 ‘건강한 관계’로 새롭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우리 부모님을 엄마, 아빠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실없는 소리를 하며 웃고,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 처음 이 대화를 했을 때의 내 모습이 민망할 정도로 우리의 관계는 달라진 것이 거의 없지만, 이제는 더 이상 서로 때문에 괴롭거나 힘들어하지 않는다.


서로가 타인임을 인지하는 것은 관계에 있어 정말 중요한 일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지켜야 할 경계가 있다. 그녀와 나처럼 서로를 너무 가깝게 생각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아닌, 서로가 너무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상대와 가치관이 차이 난다거나, 습관이 달라 부딪히는 경우에도 서로가 타인임을 인지하는 순간 새로운 이해가 생긴다. 상대는 나의 복제인간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마음에 적당한 거리가 생기면 여유는 자연스레 따라온다. 여유가 생기면 오히려 상대의 마음을 더 잘 살펴줄 수 있다. 함께하는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거나, 작은 일에도 서로를 배려할 수 있다. 만일 어떠한 관계로 인해 불편함을 겪고 있다면,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이해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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