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이 글에 등장하는 사람들-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은 알파벳으로 대체합니다. 기억을 되살려 쓴 글이라 사실과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처음에 그 애를 만났던 시기는 2022년 초 봄과 겨울 사이의 경계였다. 겨울 쪽에 더 치우쳐져 있었는지, 봄 쪽에 더 치우쳐져 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거나 만난 장소는 영어학원이었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나 중학교는 입학하지 않은 어정쩡한 존재였고, 엄마는 중학교 대비 목적으로 날 동네 영어학원에 등록했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영어 성적이 굉장히 저조했었다. 그는 졸업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는지 나는 영어 학원 입학 테스트에서 초등학교 2학년 수준이라는 아주 처참한 결과를 얻었고, 초등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어야 하는 아주 치욕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론 그렇게 들어간 클래스에서 그 애를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수업에 들어간 날,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있었다. 영어 학원에 등록했으면 뭐 어쩔 건가. 난 공부 안 할 건데. 그렇다고 핸드폰을 하겠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당시에도 난 글을 쓰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필기용인 척 공책을 꺼내두고 몰래 글이나 쓸 요량이었다. 선생님이 수업에 들어오시고 한참을 수업하시는 와중에도 난 글쓰기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갑자기 글이 막혔다. 아무래도 이건 내가 그 애를 보기 위해 마련된 신의 장난이었던 게 분명하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때의 나는 정말 짜증이 났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공감하겠지만 글 쓰다가 막히는 경험은 정말 답답하고 불쾌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명한 나는 짜증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다른 딴짓거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별안간 아주 좋은 생각이 났다! 같이 수업 듣는 아이들-학원에서는 '클래스'라고 불렀다.-과 교실을 관찰해 보자! 그렇게 나는 같은 클래스의 아이들을 관찰하게 되었다. 난 글 쓰는 것도 좋아하지만 관찰도 좋아했다. 관찰이란 글 쓰는 자의 숙명이니까. 관찰로 인해 얻는 정보는 글 소재를 퍼올릴 수 있는 우물물이나 다름없으니까! 이미 나에게 수업 따윈 뒷전이었다. 난 맨 뒷자리에 앉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바로 교실 안 둘러보기가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앞에 놓인 여러 검정 뒤통수들을 바라보았다.
난 그곳을 초등반으로 알고 있었고, 당연히 그곳에는 나를 제외하곤 초등학생들밖에 없을 줄 알았다. 그래서 다른 뒤통수들에 차례차례 눈을 맞추다가 그 애의 뒤통수에 잠깐 시선을 멈췄을 때도 별 감상이 없었다. 그 애는 필기를 하는지 손이 쉼 없이 움직였고, 연신 칠판과 책을 번갈아 보느라 고개가 굉장히 분주했기 때문에 난 그냥 범생이 초딩이네, 하는 생각만을 남긴 채 고개를 돌렸다. 실제론 나와 동갑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 애가 정말 초등학생인 줄 알았다. 만약 초등학생이 아니라면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 여기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그 애는 굉장히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봐도 초등학생으로 보였다. 많아봐야 4학년 정도? 그 애가 나랑 동갑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약 몇십 분이 더 지난 시각이었다.
내 옆자리에는 수업 내내 대놓고 퍼질러 자는 남자애 한 명이 앉아있었다. 그 애는 엎드려 자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반 안을 탐색하면서도 그 애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앉아있는 데다 엎드려 자고 있어서 난 그 애의 나이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어렴풋이 그 애가 나보다 키가 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애는 한쪽 팔로 이마를 받치고 한쪽 팔은 책상 밖을 삐져나가도록 뻗고 있었는데 그 팔이 나보다 훨씬 길어 보였기 때문이다.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애는 다음 수업 날에도, 그다음 수업 날에도, 매일같이 모든 수업 시간에 잤다. 처음 며칠 동안은 왜 선생님이 이렇게 대놓고 자는 애를 깨우지 않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렇지만 학원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된 후의 나는 선생님도 얘를 포기한 걸 지도 몰라, 정도의 생각만 남기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튼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때 그 애는 쉬는 시간을 몇 분 남겨두고 부스스 일어났다(그 애의 별명은 알람시계였다. 한참 자다가도 쉬는 시간이 몇 분 남지 않았을 때는 반드시 일어나기에... 아직도 그 애는 그 애와 나의 공통된 친구들 사이에서 불가사의로 취급받는다.).
나는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기지개를 켰다. 한 건 딴짓밖에 없는데도 왠지 모를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쉬는 시간은 15분이었고 나는 그동안 아까 쓰던 글을 다시 이어보려고 했다. 그렇게 노트를 펼치려던 그때, 옆자리의 그 애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
"...나?"
"응! 너."
나는 그제야 그 애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 애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그때는 정말 환하고 밝은 웃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애와 절친한 친구-일명 찐친-가 된 지금은 그 미소(미소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다)를 보면 짜증만 난다. 어쨌든 그 애의 인사에 나는 조금 얼떨떨한 상태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몇 살이야?"
"이제 14살이야. 넌?"
"나도 14살임! 이름 뭐야?"
"L. 너는 이름이 뭐야?"
"아, 난 B."
어찌어찌 통성명을 하고 대화가 이어졌다. 주로 B가 주제를 던지고 그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B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친화력이 좋았다. 나랑 B는 금세 친해졌고, B에게 느끼는 어색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한참 수다를 떠는데, B가 말했다.
"야, 너 우리 클래스에 우리 말고도 동갑 한 명 더 있는 거 알아?"
"아 그래? 오늘 안 왔어?"
아까 교실을 관찰하면서 나랑 동갑으로 보이는 아이는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B에게 되물었더니, B가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돌연 배까지 잡고 깔깔 웃기에 조금 당황했다. 왜 그러냐고 묻자, B가 진정하려는 듯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뭐가 그리 웃긴지 눈물까지 훔쳤다.
"아, 미안. 너무 웃겨서. 걔 원래 키가 좀 작고 해서 사람들이 자주 원래 나이보다 어리게 보거든. 너가 봐도 그렇구나 싶어서 좀 웃겨서."
B가 하는 말에는 웃음이 잔뜩 배어있었다. B는 내게 말했다.
"엄청 착한 애야. 한번 얘기해 볼래?"
"그래!"
나는 별생각 없이 승낙했다. 내가 승낙하자 B는 앞을 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헤이, Y! 일로 와봐!"
B의 외침에 아까 내가 많아봐야 5학년 정도로 보인다고 생각했던 남자애가 뒤를 돌아 B를 보며 말했다. 뒤를 돈 그 애의 표정은 차갑지 않은 무표정이었다.
"왜?"
순간 내 머리에 물음표가 수백 개 띄워졌다. 아니, 쟤 초딩 아니었어? 왜 쟤가 대답하지? 쟤 설마 우리랑 동갑이었던 거야?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내가 혼란스럽거나 말거나, B는 Y라고 불린 아이에게 말했다.
"일단 와봐. 우리랑 동갑인 애 새로 왔어!"
Y는 B 옆에 있는 나를 보고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Y가 내 앞에 서서 나를 살짝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 안녕. 넌 이름이 뭐야?"
Y는 굉장히 어색하게 물었다. 우린 처음 보는 사이니까 어색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난 아까의 혼란스러움과 별개로 이 학원에서 얼마 접할 수 없을 것 같은 동갑내기들과 친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밝게 말했다.
"난 L이야. 넌 Y?"
"어... 응."
잠깐 정적이 흘렀다. 나는 주로 대화를 이끌어나가기보다는 이끌리는 쪽이었기 때문에 다음 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Y도 나처럼 대화에 이끌리는 쪽인 것 같았고, 몇 마디만 나눠봐도 알 수 있었다. 아, 얘는 낯을 가리는구나.
정적이 계속되자 나와 Y는 점점 어색함에 잠식되는 듯했고, B는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선생님이 수업 시작을 알리며 들어오셔서 우리의 얼렁뚱땅 첫 만남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내가 Y와 처음 통성명을 한 뒤의 감상은 이랬다. 얘 엄청 낯가리는 애구나. 그래도 착한 애 같아. 친해져야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때는 우리가 지금 같은 관계가 될 줄은 전혀 몰랐으니까.
Y는 내 예상대로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다. 그렇지만 공부를 열심히, 많이 해도 흡수를 잘 못해서 초등반에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Y는 나랑 통성명을 했을 때부터 나를 좋아했다고 한다. 영어 학원에서 쉬는 시간마다 B와 놀 때마다 Y가 찾아왔던 게 다 나를 좋아해서 친해지고 싶었기 때문에 그랬던 거라고. 가끔은 매일 내 옆자리에 앉는 B를 질투하기도 했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우리 셋은 쉬는 시간만 되면 같이 놀았다. 끝말잇기나 밸런스 게임을 할 때도 있었고, 자신이 겪었던 웃긴 이야기를 하거나 시시콜콜한 잡담을 하곤 했다. 그렇게 약 한 달을 보내자 나는 Y, B와 많이 친해졌고 스스럼없이 편한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학원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때, 엄마가 돌연 영어 학원을 끊어버렸다. 발전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학원에 다니는 건 시간낭비, 돈낭비인 것 같다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업 시간에는 딴짓을 했고 쉬는 시간에는 복습도 없이 친구들이랑 놀았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수업 시간만이라도 열심히 들을걸, 하는 후회를 해도 이미 늦었다.
그렇게 Y, B와 함께하는 시간은 대폭 줄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더 이상 친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나는 예전에 직접 친구들과 함께 소설 창작 팀을 만들었는데, 진즉에 둘을 그 팀에 소속시켜 두었다. 그러면서 우리의 접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팀에 또 두 사람의 친구들이 들어오고, 팀에 있던 사람들이 친해지면서 우리 셋은 공통된 지인이 많아져 관계가 더욱 끈끈해졌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팀의 멤버는 이제 거의 고정되었고 팀 사람들끼리 꽤 많이 친해졌다. 나랑 Y는 단 둘이 개인 합작을 열거나 서로 고민이나 비밀도 툭 터놓고 이야기할 정도로 베스트 프렌드가 되어 있었다. 나는 이 관계에 만족했고, 영원히 우린 이런 관계의 친구일 줄 알았다. Y가 나한테 고백하기 전까지.
Y가 나한테 고백한 날은 조금 추워진 2022년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원래부터 나를 좋아했던 Y는 예전부터 나에게 고백하기 위해 팀에 있는 친구들에게 나에 대한 많은 고민을 털어놨었다. 그러다가 한 오빠가 Y에게 고백 멘트를 추천해 줬고, Y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그 멘트를 그대로 쳤다.
"L. 조금 뜬금없겠지만 들어봐. 네가, 내 눈의, 눈물이라면, 난 절대, 울, 지 않을 거야. 널 잃을, 까봐, 두렵거든."
그 말을 듣고 조금 당황했다. 얘 갑자기 왜 이러지? 쓰여있는 글을 읽는 듯이 더듬는 말투를 듣고 나는 깨달았다. 아, 얘 지금 장난치고 있구나! 그럼 나도 장난으로 받아쳐야지. 난 웃으며 말했다.
"하하, 너 지금 나한테 작업 걸어?"
그러자 Y가 이렇게 말했다.
"너한테 작업 거냐고? 아니, 인생을 걸었어."
"예?"
난 다시 당황했다. 얘 진짜 왜 이러는 거지?
"오늘 너무 뜨겁지 않아?"
"아니, 추운데..."
"너라는 태양 때문에 나 지금 너무 더워."
난 그 순간 얘가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면서도, 온몸의 끝이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꼈다. 한 번만 더 저런 멘트를 치면 좀 쉬라고 하고 바로 끊어버려야겠다고 결심했다. 한동안 내가 말이 없자 Y가 나를 부르더니 망설이는 듯이 말을 더듬었다. 나는 나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냐고, 지금이라도 빌면 살려주겠다고 말을 하려던 찰나, 갑자기 Y가 외쳤다. 나를 좋아한다고. 나는 당황스럽다 못해 이젠 혼란스러웠다. 진짜 오늘 얘 어디 아픈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Y는 내게 시간차 공격을 때렸다. 자기랑 사귀어달라고. 잠깐 사고 회로가 멈추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들의 향연이었기 때문이다. 당황과 혼란을 넘어 얼떨떨했다. 내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니 Y가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저기, L...?"
"어... 미안. 잠깐 생각할 시간을 줘."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는 당황과 혼란과 얼떨떨함 사이에서 허우적거렸다.
Y가, Y가 나를 좋아한다. 진짜? 찐? 리얼? 레알? Y의 말을 한참 곱씹다가 겨우 인정했다. 그래, Y는 나를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지금까지 그런 기류는 없었지만, 어쨌든 Y는 이런 거 가지고 장난칠 애가 아니니까 아마 진짜일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Y에겐 미안하지만 정말 나는 Y에게 아무 감정이 없었다. 우린 그저 메가 베스트 프렌드라고만 생각했고, 그러니 Y를 이성으로 바라봤을 리가 만무했다. 근데 거절하면 우리 관계 완전 틀어지는 거 아니야? 그건 싫은데.
솔직히 엄청 쓰레기 같은 생각이었지만, 나는 Y의 마음보다 Y와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Y를 좋아하는 척 연기한다면, Y도 행복해하지 않을까? 나는 지금처럼 Y와 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데.
Y를 가지고 노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기적이었던 나는 Y보다 Y와의 관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내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난 Y의 고백을 승낙했다. 우리의 시작은 이렇게 찝찝하고 어정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