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글쓴이의 학교에서 개인 전시에 발표될 글입니다.※
나는 늘 생각한다. 나는 Y를 사랑하지만, 진짜 사랑이 아니라고. 내가 Y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란 착각일 뿐이라고. 주변 사람들은 다들 내가 Y에 대해 쓴 글을 보면 내가 Y를 사랑한다는 것이 느껴진다고 말하지만, 그는 내가 그저 사랑한단 착각을 곱씹고 곱씹어 나온 결과물이라 그런 것이다. 나도 이게 착각이라는 걸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어느 두 사람이 사귀는 것이나 연애하는 것은 일종의 구두계약이라고 생각한다. 기한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을 뿐, 계약 기간 동안에는 서로만을 사랑하고 서로를 우선으로 두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니까. 계약서도 없고 법적인 절차도 따르지 않지만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기에 나는 이를 구두계약이라 표현했다. 우리의 이 구두계약은 처음부터 지켜지지 않았다고 난 생각한다.
첫째로 나는 항상 Y와 사귈 때마다 Y를 사랑하지 않았다. 첫 번째는 Y와의 관계가 깨지는 것이 두려워서 고백을 받아들였고, 두 번째는 삶의 의지를 찾은 Y를 돕기 위해 고백을 받아들였고-이는 다른 글에서 자세히 설명될 예정이다-, 세 번째는 Y가 다시 무너지는 것이 두려워 고백을 받아들였다-이 역시 다른 글에 자세히 설명될 예정이다-. 나는 Y가 나에게 고백을 할 때마다 Y를 그저 친구로만 보았다. 조금 많이 친한, 메가 베스트 프렌드 정도로. 그런 Y와의 관계가 무너질까 봐, 그런 Y의 삶을 격려하기 위해, 그런 Y의 인생을 지키기 위해 Y와 사귀었던 것이었다. 나는 Y를 위한 거랍시고 Y를 속였다. 언제나 Y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그 소중함은 연인이나 이성으로써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친구로써였다. 고로 나는 처음부터 구두계약의 첫 번째 조건인 서로를 사랑하는 것을 지키지 못했다.
둘째로 나는 항상 Y가 우선이 아니었다. 난 언제나 내가 우선이었다. 뜬금없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 엄마는 내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엄마는 Y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예전에 나와 Y가 친구였을 때부터 Y를 싫어했다. 엄마는 나와 Y가 지금도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엄마는 지금의 나와 Y는 더 이상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세한 이유를 말할 수 없지만 내가 Y와 사귀고 있다는 걸 엄마에게 말한다면 엄마는 나를 정신 병원에 보내버릴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엄마가 나를 정신 병원에 보내지 않길 바라며 순전히 '나를 위해' Y와의 관계를 말하지 않았다. 내가 정말 Y를 사랑하고 있다면 아무리 두려워도 엄마에게 말했어야 하는 거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전시를 기획하는 이유는 엄마에게 드디어 이렇게 간접적으로나마 털어놓을 용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시를 통해 엄마에게 알리는 것이다.- 내 스케줄이나 삶은 대부분 엄마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 그래서 몇 주 전 바이올린 학원에 가기 직전에 Y가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도 당당하게 '남자친구가 높은 곳에서 떨어졌대. 찾아가야겠어.'라 말할 수도 없었고, 학원을 빼고 찾아갈 수도 없었다. 내가 정말로 Y를 사랑한다면 아무리 엄마에게 알리는 것이 두려워도 찾아갔어야 했다. 학원 스케줄을 빼진 못하더라도 학원이 끝나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고 찾아갔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은 내가 정말로 Y를 사랑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이렇게 나는 구두계약의 두 번째 조건인 서로를 우선으로 둘 것을 지키지 못했다.
나는 처음에는 Y를 사랑한다는 착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Y를 위해 Y를 사랑하는 척했고, 어쩌면 지금 Y를 사랑한다는 착각도 그 사랑하는 척의 연장선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Y를 사랑한다.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행동은 전혀 하지 않고 있는 주제에, Y를 사랑한다는 착각에 Y를 사랑한다고 느낀다.
Y는 늘 말했다. 내가 Y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란 착각일 뿐이라도, 어쨌거나 그 형태가 사랑이라면 상관없다고. 뭐가 되었든지 간에 그것이 사랑이라면 자신은 행복하다고.
미안해, Y.
내가 Y를 사랑한다는 달콤한 착각 속에 계속 빠져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오늘도 난 나 자신을 합리화한다. Y의 말대로 어쨌거나 형태가 사랑이라면 그것도 사랑의 일종일 거라고. 찝찝하긴 해도 그렇게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