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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Oct 11. 2024

취미는 채소입니다.

라이즈와 채소의 공통점

'취미는 채소입니다.'

취미가 채소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이 문장을 읽으면 보통 텃밭 채소를 가꾸는 것, 채소로 요리하기, 혹은 더 나아가 채식주의자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존재하지 않기에 저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글로 쓸 주제를 정하거나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찾을 때 하는 질문이 있다.

'내가 하루 종일 떠들 수 있는 주제가 무엇인가?'

내가 요즘 사람들을 만나 신나게 떠드는 주제, 여유 시간기꺼이 투자하는 것, 많은 돈을 주고도 전혀 아깝지 않은 건 모두 채소이다. 채소를 키우는 것도, 채소 요리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식주의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냥 채소를 많이 생각하고 먹고 자주 만날 뿐이다.


제철 채소를 사서 맛있게 먹는다. 그 시기가 지나면 또 다른 제철 채소를 찾는다. 채소를 요리하고 먹는 것에 시간을 많이 다.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채소를 사러 가는 것을 좋아한다. 채소를 한참 들여다본다. 채소를 만지고 손질하며 에너지를 얻는다. 채소 포스팅에 좋아요를 누른다. 시간은 채소와 함께한 날들로 기억된다. 이게 내 취미생활이다.


한 해 나의 일상에서 절반을 뚝 떼어내 반은 라이즈에, 반은 채소에 갖다 바쳤다.


라이즈는 작년에 데뷔한 보이그룹이다. 데뷔곡인 'get a guitar'부터 'love119', '붐붐베이스'까지 멋진 퍼포먼스와 비주얼로 가요계를 평정한 핫한 아이돌이다. 올해 초 우연히 라이즈에 빠진 이후로 나는 만나는 친구마다 라이즈 얘기를 해댔다. 라이즈의 멤버들이 얼마나 잘생겼는지, 춤을 어찌나 잘 추는지, 무대에서 표정을 어떻게 잘 쓰는지(주로 한 멤버에 국한되어 있지만), 노래가 얼마나 좋은지 신나게 떠들었다. 나의 영업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는데 여자라면 백이면 백 '네 말이 백 번 천 번 맞다. 눈이 정화된다. 이런 영상을 보여줘서 고맙다. 잘생긴 사람을 보니 행복하다.'라는 반응을 보여 빠순이의 마음을 벅차오르게 했다. 


학창 시절부터 여러 아이돌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렇게 음악방송 시간을 기다려 본방을 사수하고, 최애 멤버의 직캠 영상을 반복해서 돌려보고, 한 달이 넘게 걸리는 굿즈를 예약 구매하고, 아이돌이 광고하는 화장품을 단지 엽서를 받고자 주문하고, 아이돌이 착용한 액세서리도 따라 사는 등 본격적인 덕질은 처음이었다.


나는 돈을 벌고 나이가 많은 성인인지라 몸 쓰는 거 말고 돈으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덕질을 하며 아이돌을 좋아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남편과도 라이즈 영상을 보고 기어이 동생처럼 귀여운 멤버 한 명을 마음속에 두도록 만들었으니 나의 진지함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그런데 올해 사랑해 마지않는 라이즈만큼 내가 자꾸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게 있었으니 바로 채소이다. 내 아이돌이 건강하길 바라고 팬의 마음으로 조건 없이 사랑하는 만큼 나 자신에게도 같은 마음이다. 내가 좋은 것을 먹고 건강하길 바라고, 나에게 신선한 채소에서 느껴지는 생명력과 건강한 땅의 기운을 주어 응원하고 싶었다. 라이즈의 노력이 빛을 발하길 바라는 마음처럼 나 역시 스스로에게 좋은 것을 먹이는 노력이 나 자신을 성장시키길 힘껏 염원했다.


내가 사랑하는 두 대상에 차이가 있다면 부모님 앞에서 채소 생활은 당당하지만 라이즈 덕질은 좀 부끄럽다는 것 정도?(라이즈 굿즈를 예약구매 하는 시점에 이사가 겹쳐 우리 집이 아닌 배송지를 적어야 했을 때 가까운 시댁의 주소를 차마 적지는 못했다.)


채소가 이 정도로 내 삶에 들어온 거라면 기꺼이 취미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취미라는 것은 어느 순간 내 마음을 온통 앗아가 버린다. 이전에 "취미가 뭐예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곰곰이 생각하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넷플릭스 보는 거요."라고 하릴없이 말하곤 했다. 이제 누가 취미가 뭐냐고 묻는다면 '채소'라고 말하고, 알쏭달쏭해진 상대방을 위해 나의 채소 생활을 신나게 읊어줄 것 같다. 그리고 남는 시간 동안 넷플릭스를 보던 나보다 지금의 나는 조금 더 단단하고 건강해진 것 같다.


좋은건 크게(라이즈의 원빈)
채소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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