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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의 여행가방

내 가방에 내가 없다 6화

by 김수다

아이의 세 돌이 지나고, 나는 전업맘에서 워킹맘이 되었다.

내가 선택한 휴직이었지만 원장님, 교수님으로 살고 있는 남편과 동기들을 볼 때면 나는 그저 애 키우는 아줌마라는 현실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자꾸만 무너지는 내가 안쓰러웠다.

세 살까지는 내 손으로 직접 아이를 키우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이 있었기에 그 3년을 채우자마자 미뤄두었던 전공의 수련을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산부인과 레지던트 1년 차가 되었다.



많아진 나이를 체력으로 실감하고, 공부도 때가 있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 주말근무와 밤샘당직근무가 이어지면서 엄마, 아내, 딸, 며느리, 나의 모든 역할에 제동이 걸렸다. 날이 갈수록 괜히 일을 시작한 건 아닐까 하는 후회와 죄책감도 커졌다.

퇴근길 라디오, 별거 아닌 유행가에도 서럽게 우는 날도 많아졌다.

제시간에 퇴근하는 날이 거의 없어 집에 가면 자고 있는 아이 귀에 가만히 해주고 싶었던 말들을 전했다.

“엄마가 늦게 와서 미안해. 우리 아가는 자는 모습도 예쁘네. 내일은 꼭 일찍 올게. 사랑해.”



그렇게 4개월을 정신없이 보낸 후 받게 된 첫 휴가, 밤샘당직근무 후 퇴근하면 우리 가족은 부산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지금도 생생한 그 당직날, 분만 후 출혈이 심해 전원온 환자를 돌보다가 예상보다 2시간이나 늦게 퇴근했다. 그마저도 급히 나오느라 발등에 피를 범벅하고 말이다.

휴가 때문에 빼곡한 당직과 방전된 체력 탓에 미리 여행준비를 하지 못했고 집에 오자마자 발 닦을 틈도 없이 급하게 짐을 챙겼다. 출발 시간이 늦어진다며 짜증을 내는 남편과 나를 안쓰러워하면서도 딸에게 짜증 내는 사위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친정엄마의 눈치를 보면서.

갈아입을 옷과 양말, 신발도 한 켤레 더. 옷마다 어울릴 만한 헤어핀까지. 뜯지 않은 새 기저귀 한 팩과 간식, 책 몇 권.

이제 겨우 아이 물건만 챙겼을 뿐인데 26인치 캐리어가 가득 찼다.

출발 시간이 늦어질수록 남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의 동선을 따라다니는 남편의 서늘한 눈초리에 내 속옷과 수영복 한 벌만 빠르게 가방에 넣고 캐리어를 닫았다. 예쁜 원피스 한 벌 챙겨가고 싶었는데 그럴 기운도, 마음의 여유도, 가방 속 공간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차에 타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다. 장거리 운전에 잠만 잔다며 남편은 투덜거렸고, 오랜만에 만났는데 놀아주지도 않는다며 아이는 칭얼거렸다.

그렇게 도착한 부산,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아이를 불렀다.

”기저귀부터 갈고 놀자!“ “엄마, 나 부릉 탈 때만 기저귀. 팬티 입을래. “



아이의 모든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 휴대폰 용량이 넘쳐 버벅거리도록 사진을 찍었었다.

아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좋은 엄마가 되겠다며 육아서적을 탐독하고 맘카페를 정독했다. 워킹맘이 되어도 변치 않을 거라는 이 노력과 정성은 어디 갔을까.

고작 4개월 동안 일하느라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아이의 ‘기저귀 떼기’를 놓쳐버렸다니.


여행 가방 속 기저귀를 빼고 나니 한켠이 텅 비어버렸다.

마치 아이 곁의 비어있는 엄마자리처럼.

그리고 그 자리는 일하는 엄마의 자괴감과 죄책감이 채워졌다.


<함께 하는 작가들>

지혜여니 https://brunch.co.kr/@youni1006

따름 https://brunch.co.kr/@blueprint22

다정한 태쁘 https://brunch.co.kr/@taei2411

김수다 https://brunch.co.kr/@talksomething

바람꽃 https://brunch.co.kr/@baramflower-jin

아델린 https://brunch.co.kr/@adeline

한빛나 https://brunch.co.kr/@growdream

새봄 https://brunch.co.kr/@spring-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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