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소설 <이상한 중력>
한 차례 이상 현상이 지나가고 재니스 리는 약속 장소에 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약속 장소라고 하기엔 가벼운 어감이 있다. 중대한 목적지 정도가 잘 어울리겠다.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어두운색 립스틱을 바르고, 얇지만 팔랑대지 않는 스카프를 목에 둘러 고정시켰다.
“문제가 없길 바라며.”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빼먹지 않는 자신만의 작은 의식(현관문 앞에 놓인 도자기로 만들어진 거북이 머리를 쓰다듬는 일)을 치르고 집을 나섰다.
위원회 본부는 하얗고 공명이 잘 울리는 곳이었다. 마주 보이는 곳에 멀찍이 앉아 있는 세 명의 위원장 뒤로 ‘9번째 원인 규명 및 대책 회의’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8까지는 어떻게 버텼던 건지 9가 쓰인 하얀 천 뒤로 여러 번 고친 자국이 비쳤다.
약 10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 작은 도시에 이상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건 6개월 전이었고, 대책 위원회가 생긴 건 3개월 전이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누구도 이 이상 현상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어떤 낌새도 없이 구조물이 무너져버리는 현상의 원인은 아직까지도 찾아내지 못했다.
재니스는 ‘5번째 원인 규명 및 대책 회의’ 때부터 신청했는데, 네 번을 더 신청하고 나서야 이 자리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녀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무시하고 자신과 다른 한 사람만이 알고 있을 이상 현상의 원인에 대해 내뱉었다.
본부 내부가 공명 하나 없이 조용해졌고, 재니스가 다시 앞을 바라봤을 땐 마찬가지로 모두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니스는 자신을 보는 그들의 모습이 서로를 반사시켜 착시를 일으킨 거울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적막을 깬 건 양옆으로 쭉 늘어앉은 회원 중 좌측에 앉은 남자였다. 그는 몸집이 크고 청록색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눈살을 찌푸리고 앞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유령인지 뭐시긴지가 건물 외벽을 밀어서 8층짜리 건물이 순식간에 박살 났다, 그런 거죠?”
“네,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재니스가 대답했다.
“맨손으로 건물을 밀어 부술 수 있다니 그 유령들은 다들 삼손이라도 되는가 봅니다.”
남자의 비아냥에 장내가 한바탕 웃음으로 술렁였다. 재니스 역시 그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머릿속엔 자신이 본 광경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남자가 위원장 쪽을 돌아봤다.
“위원장님, 영양가 없는 얘기를 더 들을 필요가 있습니까? 오늘 발언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만 여덟 명입니다. 이것도 제보자 수백 중 추리고 추린 거지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남자의 옆에 앉아 있는 머리가 벗겨진 다른 남자가 말했다. 그는 들고 있던 수첩을 몇 장 넘겼다.
“이상 현상이 새로 발생할 때마다 이주자가 배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젠 집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가는 사람들도 수두룩합니다. 어제까지의 통계로 약 1,208가구가 집계되었지요. 잠시 도시를 벗어난 사람들은 이미 2만 명이 넘고요.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유령 도시가 될 겁니다.”
“아까 누가 유령 얘기를 하던데 이미 유령 도시가 된 거 아닙니까?”
청록색 셔츠 차림의 남자였다.
하하하.
“장난은 그만둡시다.”
가장 중앙에 앉아 있는 위원장이 말했다.
“여분의 시간을 제외하고 한 사람에게 할당된 시간은 20분입니다. 적어도 그만큼은 들어보도록 하죠.”
위원장의 말에 재니스는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까부터 시비를 거는 남자를 쏘아보았다.
“믿기 힘든 얘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무엇 하러 거짓말을 하겠어요? 저 역시 이 도시에 산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이곳을 떠나고 싶지도 않고, 하루빨리 문제가 해결되길 바랄뿐입니다.”
“토박이는 아니네요.”
어디선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툭 나왔지만, 재니스는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여태 원인을 규명하지 못했으니 여러 가능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저 역시 제가 본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해 이곳에 왔고요. 변하지 않는 진실은 제가 건물 외벽을 미는 그 형체들을 분명히 보았다는 겁니다.”
그녀는 전방 위원장 셋, 좌측 회원 아홉, 우측 회원 아홉을 둘러보며 떨지 않기 위해 몇 번이나 연습했던 말을 내뱉었다. 그때 우측에 앉은 여자가 할 말이 있는 듯 펜을 들어 올렸다. 여자의 주변에는 유난히 많은 전자기기와 자료들이 쌓여있었다.
“재니스 리 씨, 소중한 제보는 감사합니다만 사실 그건 미는 힘이라고 보기 어려워요. CCTV 자료를 보시면 아시다시피 건물이 옆으로 움직이거나 일부가 파손된 후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순식간에 주저앉아 버리니까요.”
그녀는 이마로 눈썹과 입꼬리를 들어 올려 아주 무감각한 웃음을 지었다.
“정확한 원인 파악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만, 우선은 이 도시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문제다 보니 전면 하수도 공사로 인해 지반이 약해진 상황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확고한 표정에 재니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하수도 공사와 관련한 제보를 기다리고 있나 보군요. 제가 하는 말은 들리지도 않겠네요.”
재니스의 눈엔 그들이 자신들이 정해놓은 가설에 부합하는 제보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플래카드의 숫자만 몇 번이고 고쳐가며.
그때 한 사람이 느릿하게 팔을 들어 올렸다. 백발의 눈썹이 축 처진 노인이었다.
“나는 리 씨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오.”
남자는 낡은 항공 점퍼 안에 ‘로저스 농장’ 글씨가 하얗게 인쇄된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지금 사람들이 이 동네를 뭐라고 하는지 아시오? 마을 어귀로 들어오는 입구에 캐치프레이즈 간판이 하나 세워져 있지 않소? 그… 재작년에 폐렴으로 먼저 간 조쉬가 우유 잔을 들고 있고 뒤로는 젖소 서너 마리가 돌아다니는, 우리 농장이 나온 간판 말이오.”
노인이 주변을 둘러보고 간판에 대해 더 설명하려고 하자 청록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말했다.
“예, 다들 잘 알고 있습니다.”
뭣모르고 아버지를 따라온 뒤로 20년 동안 이곳에 발붙이고 살아온 재니스 역시 그가 말하는 간판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재니스는 어릴 적부터 그 농장에서 생산되는 ‘로저스 스타 우유’를 먹고 자랐다. 3년 전 여행을 위해 잠시 도시를 벗어났을 때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거기에는 원래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진 도시’라고 써있었소.”
노인의 말에 재니스는 파란색 바탕에 하얗게 쓰인 그 문구가 기억났다.
그가 계속 말했다.
“그런데 얼마 전 뉴스를 보는 중에 무슨 드라큘라 특집 다큐멘터리 오프닝처럼 그곳을 비추는데, 누가 빨간 스프레이를 잔뜩 뿌려놨더군.”
노인이 스프레이를 뿌리듯 한 손을 세게 흔들었다.
“내 동생 조쉬와 젖소들에게 빨간 눈과 악마 뿔을 그려놓고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진 도시’ 위에 ‘귀신 들린 도시’라고 써놨지. 귀신! 다른 사람들 눈에도 뭔가 이상한 거요. 제대로 된 원인도 찾지 못하고 귀신이 곡할 노릇만 일어나고 있으니.”
그때 왼쪽에 앉은 위원장이 ‘아버지, 진정하세요.’라고 말하며 옆에 있는 노인의 떨리는 손을 슬쩍 잡아 내렸다. 노인이 위원장의 손을 가볍게 무르고 말했다.
“귀신이라도 좋으니 이렇게 앉아만 있지 말고 뭐라도 빨리 찾아서 잡아내야 하는 거 아니오?”
“어르신, 불미스러운 일을 겪으셔서 힘드신 건 알지만, 그렇다고 귀신은….”
자료에 둘러싸인 여자가 노인의 굳건한 눈초리에 말꼬리를 흐렸다.
노인 헨리 로저스가 재니스를 돌아보았다.
“리 씨, 오해할까 봐 말하지만 단순히 그 간판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네. 우리 농장은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었소. 농장의 크기, 가축 수, 생산량 모든 게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었지. 그런데 어느 날 농장 옆에 있던 기념품 가게가 순식간에 무너진 거요. 통나무로 지은 것인데 하필 농장 쪽으로 무너진 통나무 잔해에 젖소 몇 마리가 희생당했소.”
재니스 역시 로저스 농장 사건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붕괴 원인을 찾지 못해 역시 이상 현상이 원인으로 지목된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말에 힘을 실어준다면 그의 말을 끊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더 재수가 없던 건 그 맘쯤 이상 현상을 취재하러 온 기자가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정신없이 해결하는 새에 죽은 소들과 피 묻은 바닥, 기념품 가게에서 판매하던 로저스 농장 캡모자가 흙먼지에 나뒹구는 모습을 찍어갔다는 거요.”
노인 헨리는 자신 옆에 있는 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이것도 다 그 귀신 나부랭이 때문이겠지. 그 모습이 보도된 이후로 고작 몇 주 만에 로저스 우유 판매량이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우유 짜기 체험 안내문도 걷어놓은 지 오래요. 사람들이 그러더군. 우리 농장도 저주를 받았다고.”
그가 말했다.
“농장을 바라보면 참담한데 남은 젖소들이 있어 떠날 수도 없소. 그러니 리 씨, 나는 당신의 말이 없는 얘기라고 생각하지 않네. 오히려 당신 말이 맞았으면 좋겠어. 무슨 해결이라도 할 수 있도록!”
그때 수첩을 들고 있는 머리 벗겨진 남자가 다시 말했다.
“재니스 리 씨의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증명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여태 원인을 못 찾았던 이유 역시 참에 가까운 증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리 있는 말이라는 증명을 할 수 없으면 일리가 없는 것과 같아요.”
그의 말에 대부분의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 로저스만이 증명을 기다리듯 재니스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현재로써는 증명이 어려워요. 그들은 사진에 나오지도 않고, 어디에 출몰할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죠. 제 눈에는 흐릿한 실루엣만 보이는 투명 인간 같아요. 그렇지만 오직 한 사람 눈에는 제대로 보이는데… 제 오랜 친구 커스틴 홀입니다. 커스틴은 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재니스는 다른 사람이 이의를 제기하기 전에 신속하게 내뱉었다.
“저도 처음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으나,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가만히 봤더니 그들의 실루엣을 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럼 그녀가 증명할 수 있습니까?”
“당장은 병원에 입원해 있어 이곳에 오기 어려운 상황입니다만, 도와주시면…”
“무슨 병원인가요?”
청록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재니스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하필. 재니스는 잠시 고민했지만, 진실을 말하는데 주춤할 것 없다고 생각하고 대답했다.
“레이크 정신병원입니다. 하지만 이건 그녀의 얘기가 거짓이라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녀가 평소에 우울증을 앓고 있어서 잠시 입원한 것뿐이에요.”
청록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이겼다는 듯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위원장을 향해 팔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내보였다. 헨리 로저스도 고개를 떨구었다. 젠장. 재니스는 예상하던 여러 결말 중 최악이 걸렸음을 직감했다.
중앙에 앉아 있는 위원장이 말했다.
“20분이 다 되었습니다.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시면 되겠습니다.”
재니스를 제외한 스물한 명 중 손을 든 건 단 두 명이었다. 위원장은 펜을 들고 앞에 놓인 종이에 무언가 휘갈겨 썼다. 아마 기각, 보류, 거절 같은 말일 것이었다.
“과반수를 넘지 못하였으므로 이 안건은 보류하는 것으로 결정하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