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차/칠레] 아타카마에서 가장 잘한 짓은 소금 호수 입수였다.
A.M. 09:10
이 호스텔에는 아침형 인간들만 묵고 있는 걸까? 오늘도 텅 빈 부엌에는 내 아침 상만 쓸쓸하게 남아 있었다. 조식을 먹으면서 동행을 만든 다음 은근슬쩍 따라다녀 볼 요량이었던 나의 전략은 이틀 연속 실패로 돌아갔다. 혼자 여유롭게 아침을 먹으며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오늘은 뭘 하면 좋을지, 뭘 하고 싶은지! 사실 나는 2인실에 새로 들어온 룸메에게 같이 조식을 먹지 않을라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그녀는 이미 어디론가 쌩하니 사라져 버린 뒤였다.
전날 아침 나갈 채비를 하는데 초인종이 띵동 울렸다. "짜잔! 룸메가 왔어!" 방문을 열어보니 친절한 호스텔 주인이 깜짝 선물이라도 준비한 듯 어떤 키 큰 여자를 데리고 와서는 직접 소개를 시켜주었다. 그때 서로 이름이라도 교환했길 다행이었다(비록 기억도 나지 않지만...). 주인이 떠난 후 우리는 형식적으로 두세 마디를 주고받고는 각자의 고요한 적막을 택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친구 사귀기 따위 관심 없음'이라고 대문짝만 하게 쓰여 있었다. 그녀가 복화술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나 좀 그냥 내버려 둬!'
조식을 먹고 오니 그녀가 방에 돌아와 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정내미가 없는 것 같아서 말을 걸어봤다. "근데 우리 기본적인 것도 안 물어봤네. Where are you from?" 그녀가 대답했다. "스위스". 잠시 마가 떴다. 그리고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한마디 덧붙였다. "너는?"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대화였다. 잠깐 방을 비운 사이 그녀는 인사 한 마디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융프라우 정상만큼이나 싸늘한 기운이 풍겼다. 아마도 그녀에겐 그녀만의 사정이 있었으리라. 어쩌면 '오늘 뭐 하지?'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던 나 또한 그런 서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A.M. 10:17
여행 커뮤니티에서 동행을 구하는 것도 녹록지 않았다. 렌터카 동행 모집글이 있어 연락을 해보니 전날 이미 다녀온 곳에 간다고 했다. 아타카마에서 뭘 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아타카마는 투어 천국이다. 알아보기 귀찮을 땐 그냥 투어사에서 투어를 추천받아서 아무거나 하나 골라 몸을 맡기면 된다. 나는 전날 투어 예약을 하면서 가격 비교하려고 찍어둔 홍보용 팸플릿 사진을 열었다. 가뜩이나 결정 장애가 심각한데 투어 프로그램이 무려 9가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대부분은 이른 아침에 출발하는 투어라서 자동으로 선택지가 좁혀졌다. 호스텔 테라스에서 한참 고민하다 보니 땀이 나기 시작했다(참고로 아타카마는 뜨거운 여름이다.).
그래서였을까. 몇 안 남은 당일 오후 투어 중 소금호수 투어에 자꾸 눈에 들어왔다. 어제 투어사에서 추천받은 투어 중 하나였다. 어제도 입수 시간을 준다는 말에 혹했지만 이미 예약이 마감되어 갈 수가 없었고, 오늘 꺼는 '혹시나 내일 귀찮아지면 어쩌지?' 싶은 생각에 섣불리 예약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온천 후기를 보고 혹시 몰라 챙겨 온 수영복도 개시하지 않으면 좀 서운할 것 같았다. 이 날씨에는 아무래도 뜨거운 온천이 아니라 시원한 소금호수에 입수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나는 마침내 마음을 정하고 투어사에 whatsapp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오늘 오후 2시 반 소금호수 투어 예약되나요?' 이 지역은 영어로 물어봐도 스페인어로 답이 온다. 'Sip, Es possible' 다행이었다. 오늘은 자리가 남아 있었다.
칠레 아타카마에서 볼리비아 우유니로 넘어가려면 하루에 한 대 있는 새벽 3시 30분 출발 야간버스를 타야 한다('25년 2월 기준). 원래는 호스텔에 짐만 맡겨두고 늦게까지 놀다가 바로 버스를 탈 생각이었는데, 소금호수에 입수한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소금물을 씻어내려면 호스텔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호스텔 주인에게 체크아웃 대신 1박 연장이 가능한지 물었다. 예약이 꽉 차서 숙소를 옮겨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행이었다. 오늘도 침대가 남아 있었다.
A.M. 11:00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미션, 우유니행 야간버스표를 사러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누군가의 여행후기에 따르면, 버스표는 인터넷 예매보다 현장 구매가 훨씬 저렴하다고 했다. 고로 미리 예약하지 않은 나를 탓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여전히 '오늘 떠날까? 내일 떠날까?' 그 깊은 고민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남미여행의 꽃이라는 우유니 사막의 날씨 변수에 대비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우유니로 넘어가는 것이 옳았지만, 아타카마에서 하루 더 머물며 최대한 많은 투어를 경험하고 싶기도 했다. 나는 곧 그게 다 쓸데없는 고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버스 예매 사이트에서 명쾌한 답을 내려주었다. '오늘 버스표는 이미 매진이란다. 네가 가고 싶다고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나는 아타카마에 하루 더 머물기로 결심당하고, 호스텔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버스터미널로 걸어갔다. BUS라고 적힌 낡은 표지판이 없었더라면 감히 그 쓰임새를 유추하기 어려운 외관이 등장했다.
더욱 당황스러운 건 우유니행 야간버스를 운행하는 Cruz del norte 버스회사였다. 티켓오피스 문이 닫혀있었다. 그것도 하필 그 집만. 문에는 아침 10시 반에 오픈한다는 종이쪼가리가 붙어있었는데 이미 11시도 넘은 시간이었다. 전화도 안 받고, 옆집도 모른다 하고, 그 앞에 있던 여자 둘이 한국말을 하길래 어찌 된 일이냐고 물으니 다른 버스회사 표를 사러 와서 모른다고 했다. 별 수 없었다. 일단 기다려보는 수밖에...
티켓 오피스 문은 무려 1시간이나 늦게 열렸다. 나는 직원이 문을 따자마자 따라 들어가서 번역기를 들이댔다.
'볼리비아 비자를 미리 못 받아와서 국경사무소에서 도착비자 받으려고 서류를 한 뭉탱이 가져왔는데요, 버스가 저를 기다려주나요?'
비자가 뚝딱 나오는 게 아닐 텐데 버스가 나 하나를 기다려주는 건지 아니면 국경에 버리고 가는 건지가 궁금했다. 그 어떤 후기도, 답변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 볼리비아 비자를 한국에서 미리 받아오거나 남미에 도착해서 대사관을 직접 찾아가 발급받는 모양이었다. 나처럼 공항도 아닌 국경에서 30불짜리를 120불에 파는 도착비자 장사에 호구당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자기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100% 번역기로 읽고 쓰며 기나긴 Q&A 시간을 할애해 준 그녀의 인내심과 출입국 관리 사무소에 가보라며 위치를 알려준 친절함은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근데 버스회사가 모르는 걸 누가 알겠어... 나는 시간이 없어 더 이상의 질문을 포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부탁을 건넸다. 국경에 버려지면? 또 방법이 생길 것이다...
P.M.12:00
마지막 미션, 투어사에 현금 결제를 하러 서둘러 이동했다. 왠지 평소 다니던 직진길 대신 샛길로 타고 ㄷ자로 빙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샛길을 빠져나오니 광장이 펼쳐졌다.
'아니 이런 곳이 있었단 말이야?!' 역시 충동은 언제나 옳다. 현지인들은 거대한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쉬고 있었고, 관광객들은 어느 하얀 건물 앞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안테나처럼 가느다란 십자가가 붙어있는 교회였다.
관광객들을 따라 교회 안으로 들어가 봤다. 소박한 교회 내부에 관광객들의 시선을 강탈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조각상들(?). 신성한 장소에서 이런 표현을 하는 것이 적절하진 않겠지만... 어찌나 귀엽고 앙증맞게 만들어놨는지! 이것이 칠레 교회 감성인가?
P.M.12:30
교회를 빠져나와 투어사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결제할 때 전날 다른 투어에서 만난 한국분과 함께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급격히 저하된 체력 이슈로 미리 예약해 둔 소금호수 투어를 하루 전날 돈을 몽땅 날리고 취소했다. 투어사에서 환불은 불가한데 호수 입장권 양도는 허용하겠다고 하여 그녀는 소금호수 갈 사람을 수소문하던 참이었다. 나는 마침내 입수를 결심했다는 소식을 알렸고 그녀는 너무 기쁜 나머지 돌려받은 금액의 일부를 나에게 원화로 보내주겠다고 난리였다. 사실 내가 돈을 받을 일은 아니었다. 나는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투어를 할 셈이었으니까. 내가 손사래를 치자, 그녀는 이제 곧 귀국한다며 고산병 치료 산소통, 샴푸, 바디워시 등 온갖 남은 짐들을 나열하며 필요한 게 없냐고 물었다. 안 그래도 캐리어가 터질 지경이라 괜찮다고, 마음만 받겠다고 하였지만 그녀는 뭐라도 하나 주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나는 혼자 여행 왔는데 삼각대를 놓고 온 안타까운 사연을 이야기하며 아타카마 거리에서 사진이나 몇 장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사진 촬영도 부족해 그럼 여행 정보라도 줘야겠다며 장장 30분 동안 내가 여행할 도시들의 맛집, 숙소 등 온갖 여행 팁을 전수해 주었다(남들과 반대 방향으로 여행하면 좋은 점!). 그것도 모자라 어제 다른 동행에게 받은 고산병 약이 부족할 수도 있지 않냐며, 저녁에 나를 따로 찾아와 고산병 약과 타이레놀을 통째로 주고 가기까지 했다. 어제 처음 본 사이인데 이렇게 따스울 수가... 이게 이렇게까지 감사받을 일인가...? 오히려 내가 너무 감사했다. 한국인의 정이란, 이토록 따스운 것이었구나...!
P.M.13:30
투어까지 1시간 남짓 시간이 떴다. 구글 지도에 근처 카페들을 검색한 뒤 리뷰 수가 많은 곳 하나를 찾아갔다. 아마도 입간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만한 작은 골목, 우거진 숲으로 이어질 법한 초록초록한 길 초입에 카페 FRANCHUTERIA가 숨어 있었다. 동남아 휴양지스러운 나무로 둘러싸인 야외 테라스, 그 사이로 내리쬐는 눈부신 햇살, 아름다운 새들의 노랫소리까지. 완벽한 휴식처였다.
이 카페에서 유명하다는 크루아상을 먹었다가는 소금호수에서 수영하다 쓰러질 것 같았다. 아침부터 무더위 속에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느라 지쳐버린 나는 하프 사이즈 연어 바게트 샌드위치와 시원한 아이스 라떼를 주문했다.
주문이 밀려있었는지 한참 만에야 음식이 나왔는데 세상에, 충격적일 정도로 거대한 바게트 샌드위치가 등장했다. 잘못 나온 줄 알고 종업원을 불렀는데 하프 사이즈가 맞다고 했다... 투어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 결국 바게트는 절반도 먹지 못한 채 투어사까지 전력 질주를 해야 했다. 땀범벅이 되어 입수하기 더할 나위 없는 상태였다.
P.M.14:30
오후 2시 반, 투어사 앞에 간신히 도착했는데 누군가 나에게 아는 척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오늘 아침 버스터미널에서 만났던 한국분들이었다.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투어사, 같은 투어프로그램에서 또 만나다니! 너무 반가웠다. 그들은 투어 내내 혼자 온 나의 말동무, 사진작가 등을 자처하며 나를 살뜰히 챙겨주었다. 이어서 또 다른 누군가가 반갑기 내 이름을 불렀다. 바로 어제 달의 계곡 투어를 이끌었던 가이드 R이었다. 투어가 9가지나 있는데 이틀 연속으로 같은 가이드를 만나게 될 확률은? 운명이라면 운명이 아닐까?
우리는 투어 차량을 타고 호수를 향해 오프로드를 털털털 달렸다. 첫 번째 목적지인 Laguna Tebenquiche에 도착했다. 살이 타는 듯한 뜨거운 태양 아래 그늘 하나 없는 사막의 길을 꽤나 오래 걸어서 들어갔는데, 사막에 웬 눈이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찌는 듯한 날씨와는 괴리감이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새하얀 소금이 마치 눈처럼 사막을 새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얼마나 광활한지 호수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관광객무리가 개미떼처럼 보였다. 군데군데 새파란 호숫물이 보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냥 빙하라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빙하를 직접 본 적은 없다...).
다음으로 이름 모를 민물 호수에 도착했다. 가이드 R이 사막 한가운데에 민물 호수가 형성된 까닭을 설명해 줬는데 까먹은 지 오래다. 예전에는 이곳에서도 수영을 할 수 있었는데 깊은 수심 때문에 사고가 발생하여 입수가 금지되었다고 한다. 맞은편의 또 다른 민물 호수에서는 관광객 무리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별 볼일 없는 작은 호수를 두고 무슨 사진을 그렇게 찍나 싶어 가까이 가보니, 호수 뒤로 펼쳐진 산들이 수면에 거울처럼 비치고 있었다. 포토스팟이라고 해서 따라 해봤는데, 안타깝게도 그날은 바람이 너무 심해서였는지 거울 반영이 출렁이는 물결에 모두 지워져서 사진에는 도저히 담을 수 없었다.
생각보다 별 거 없는 호수 구경이었다. 사막도 이틀이나 보니 그 풍경이 그 풍경 같고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내일 하루 더 투어를 한다고 새로울 것이 있을까?' 나는 버스터미널로 전화를 걸었다. 우유니행 야간버스 예약을 하루 당겨서 당장 오늘 밤에 넘어가야겠다는 충동이 들었다. 사실 오전에 버스회사 직원이 온라인에서 매진이었던 당일 티켓도 몇 장 남아있다고 해서 티켓을 바꿀까 말까 고민을 했었다. 망설이는 나에게 그녀는 생각해 보고 오후 4시까지 오면 표를 바꿀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어쩌면 전화로도 예약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버스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열 통이 넘도록 끈질기게 통화를 시도했지만 절대 받는 법이 없었다. 안 그래도 여행 일정도 짧은데, 내일 아타카마에서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왜 오늘 밤 당장 남미여행의 꽃인 우유니로 떠나는 버스표를 사지 않았을까...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오던 그때, 마지막 목적지인 Laguna Cejar에 도착했다.
P.M.17:00
대망의 소금호수 입수 시간! 차에 짐을 놓고 수건을 담은 검은 봉다리 하나만 달랑달랑 팔에 걸고 소금호수를 찾아 떠났다. 나는 미리 수영복을 입고 와서 이용할 일이 없었지만 입구에는 탈의실과 공용 샤워기(샤워실 아님...)도 마련되어 있다. 소금호수로 들어가는 길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우뚝 솟은 산을 둘러싼 노란 초원 위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그 맞은편에는 에메랄드 빛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에메랄드 호수에서 수영이라니! 잔뜩 신이 났는데 가이드는 우리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인도했다. 에메랄드 호수는 입수가 불가능한 곳이었다. 조금 걸어 들어가니 사람들이 둥둥 떠 있는 또 다른 호수가 등장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깔깔 대며 사해 체험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드디어 더위에 찌든 몸뚱아리를 시원한 호숫물에 풍덩 담갔다! 소금호수라더니 정말 몸이 곧바로 떠 버렸다. 궁금해서 호숫물을 살짝 찍어먹어 봤다. 바닷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짠맛이었다. 부력 때문에 수영을 하면 오히려 더 힘이 들어서 수면 위에 가만히 몸을 뉘어 떠다녀야 했다. '아, 이래서 다들 누워서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구나!'
호수 뒤로 병풍처럼 서 있는 거대한 산을 바라보며 호수를 침대 삼아 가만히 누워 물 위를 둥둥 떠다녔다. 소금호수 투어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단언컨대, 아타카마에서 가장 재밌었던 순간이었다. 물 위에 누워 자연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물아일체, 무위자연, 유유자적, 안빈낙도 등등 온갖 도가 사상이 떠올랐다. 아타카마 사막이 지루하다니. 큰일 날 소리였다. 아까 전화를 받지 않은 버스회사 직원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덕분에 아타카마에서의 남은 하루를 무사히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
무념무상의 경지에 빠져들 무렵 호수 관리인의 목소리가 나를 다시 현실로 끄집어냈다. 전원 물 밖으로 나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강력한 염분 때문에 피부 손상 등의 위험이 있어 입수시간이 20~30분 내외로 제한된다고 한다. 온몸에 새하얗게 들러붙은 소금 찌꺼기를 보니 납득이 되었다.
P.M.18:30
공용 샤워시설에서 소금기를 한바탕 씻어냈는데도 여전히 구석구석에 새하얀 소금 가루가 남아있었고, 머리카락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 찝찝한 상태로 우리는 사막 한가운데 스탠딩 간식 파티를 했다. 메뉴는 전날 달의 계곡 투어에서 먹었던 것과 정확하게 동일했지만, 물놀이 덕분인지 훨씬 맛있게 느껴졌다.
우리는 돌아가면서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다. 일행 열댓 명 중 대부분이 칠레로 여행 온 남미사람들이어서 다들 스페인어로 자기소개를 했다. 심지어 한국인 일행들도 간단한 스페인어를 뽐내시길래, 나도 그들을 모방하여 스페인어로 이름과 국적을 소개했다. 분위기는 굉장히 화기애애했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여행이란 이런 것이다. 다만 누군가의 통역 없이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지라 스페인어를 배우지 않고 여행 온 것이 내내 아쉬웠다. 스페인어를 알았다면 훨씬 더 재밌게 떠들 수 있었을 텐데!
P.M.19:30
투어가 끝나자마자 나는 곧장 투어사로 향하여 다음날 투어를 예약했다. 가이드 R이 '그림 속에 들어온 기분'일 거라며 추천해 준 '레드락 투어'를 하기로 결심했다. 무려 새벽 6시 30분에 출발하는 투어인데 다행히 아직 자리가 남아있었다. 문제는 카드로 결제하면 10%를 더 내야 하는데 현금이 부족했다. 나는 일단 예약을 걸고 환전을 해서 다시 돌아오기로 했다. 투어사에서는 저녁 8시 30분까지 결제를 완료하면 된다고 했다. 먼저 숙소에 돌아가 달러를 챙긴 후 환전소 골목에서 환율 쇼핑을 마치고 가장 저렴한 곳에서 칠레 페소로 환전을 했다. 복잡한 환전 과정을 거쳐 마침내 결제를 하러 다시 투어사에 도착했는데...
웬걸? 돌연 내일 투어가 취소됐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가이드가 아프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사람들이 투어를 취소했다고 했다가, 횡설수설한 설명이 영 이상했다. 분명 나 포함 열댓 명이 함께 할 거라고 했었는데, 투어 명단 엑셀파일 맨 마지막 줄에 내 이름을 추가하는 것도 보았는데, 내일 투어를 하겠다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으니 내일모레 다시 오라는 무책임한 통보라니. 내일모레면 나는 이미 아타카마를 떠나고 없는걸...?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직감적으로 거짓말이라는 촉이 왔다. 어찌 30여 분 만에 열댓 명이 갑자기 투어를 취소할 수 있단 말인가? 납득할만한 설명도 없이 나 몰라라 취소 통보를 날리신다면 나도 '안 되면 되게 하라' 카드를 꺼낼 수밖에... 나는 번역기를 들이대고 그럼 현금은 왜 환전해오라고 했냐, 지금 거짓말 하는거냐, 어떻게 갑자기 투어가 취소되냐며 끈질기게 따지고 들었다. 근데 번역기가 고장이 났던걸까? 돌아오는 대답이 하나같이 우스꽝스러웠다. 가령, 아무리 번역투라지만 이 심각한 상황에서 등장한 '겉 다르고 속 다르다' 같은 문장은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해석해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었다.
도저히 대화가 안 통했다. 나는 전략을 바꿔서 어떻게든 책임지고 다른 투어사의 동일한 투어로 연결시켜 달라고 똑같은 말만 기계처럼 반복했다. 투어사들이 다 문을 닫을 시간이라 당장 발품을 팔러 다닐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나도 참 진상이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아타카마인걸...? 시간이 너무 늦어서 불가능하다는 직원 앞에 꿈쩍 없이 앉아서 나는 곧 떠날 몸이라 시간이 없으니 내일 무조건 투어를 해야 한다고 거의 드러눕다시피 버텼다. 그랬더니 돈을 더 내면 다른 투어사에 연결을 해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투어 가격이 다르다나 뭐라나... 나는 딱 맞게 환전을 해와서 현금이 한 푼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버텼다. 결국 진상 고객을 빨리 처리하고 퇴근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는지 그들은 결국 나를 다른 투어사에 그냥 넘겨버렸다. 아니 이렇게 쉽게 되는 걸 왜 안 해준 거야...?
P.M.21:10
아타카마에서의 세 번째 밤, 놀랍게도 나는 아직 호스텔에 숙박비를 한 푼도 내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찬가지로 카드로 결제하면 10%가 더 비싸서 환전한 후 현금 결제를 하기로 했는데, 매일 늦게 다니다 보니 호스텔 주인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호스텔 주인은 매번 '내일 내도 된다'고 하더니만 돈 한 푼도 안 받고 1박 연장까지 해줬다. 근데 나는 그 추가 1박 요금을 환전하는 걸 깜빡해 버렸고, 또다시 환전소로 달려갔다. 영업 종료시간인 밤 9시를 살짝 넘겨 도착했는데 다행히 아직 문이 열려 있었다. 숙박비에 딱 맞춰 환전을 하고 싶었는데, 세어보니 동전 몇 개가 부족했다. 이제 내게 남은 건 큰 단위 달러뿐이고, 더 이상 칠레 페소 쓸 일은 없고... 나는 매우 난감한 표정으로 큰 달러를 들이밀며 딱 1달러만큼만 환전할 수 없을지 물었다. 환전소 아저씨는 허허 웃으며 얼마 부족하냐면서 그냥 동전 몇 개를 선물로(?) 줬다. 아니, 아무리 작은 돈이라지만 이렇게 쿨하게 돈을 주다니... 당황스러웠다. 이 얼마나 이상한 환전소인가!
P.M.21:30
나는 호스텔에서의 마지막 밤이 되어서야 숙박비를 지불했다. 3박 치 요금을 한꺼번에. 후불을 허용하는 호스텔이라니... 당황스러웠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나는 호스텔 주인에게 다음날 자정 넘어 새벽에 야간버스를 타야 하는데, 추가 비용을 내고 내일 샤워실을 써도 될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마침 내일 네가 쓰던 침대 예약이 없거든. 그냥 하루 더 자고 가!'
샤워실만 물어본 건데 아예 방을 쓰라니... 예약이 없다고 공짜로 1박을 더 연장해 주는 호스텔이라니... 혹시나 예약이 들어오면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꼭 예약을 받으라고 호스텔 주인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이 얼마나 이상한 호스텔인가!
P.M.22:00
하루 종일 소금기도 씻어내지 못한 채 아타카마 거리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는지... 먹은 것이라곤 쓰러질 것 같아서 사 먹은 아이스크림이 전부였다. 방에 돌아오니 새로운 룸메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녀는 구.룸메와는 달리 따뜻한 기운을 풍겼다. 그녀는 칠레 국내여행 중인 칠레 사람이었는데, 영어로는 대화를 한 마디도 할 수 없어서 번역기와 바디랭귀지로 수다를 떨었다. 분명 말이 안 통하는데 말이 통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말이 통해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말이 안 통해도 할 말이 끊이지 않는 사이가 있다. 아마도 상대방에 대한 관심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번역기에 따르면 그녀의 첫마디는 '네가 여기 산 페드로에 온 지 얼마나 되었느냐?'였다. 우리는 별 것도 아닌 대화로 깔깔 거리며 각자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아마도 웃음꽃의 8할은 번역기 말투 때문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말동무를 만난 나는 오늘 친절한 칠레 사람들이 내게 선사해 준 감동에 대해서 신이 나게 떠들어댔다. 손가락으로...
P.M.22:30
사실 새로운 룸메가 오면 같이 저녁도 먹고 춤도 추러 가자고 할랬는데, 시간도 너무 늦은 데다 번역기를 붙들고 밥을 먹을 수는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밥 먹고 오겠다는 마지막 문장을 보여주며 인사를 나누고, 식당을 찾아 다시 아타카마 거리로 나섰다. 배가 너무 고픈데 문을 연 식당이 많지 않았다. 혼밥 하기 적절치는 않은 장소지만 누군가 피자 맛집이라고 추천해 준 식당이 아직 열려있어서 무작정 들어갔다. 피자를 시킨 후 호스텔 주인에게 감사의 선물로 피자를 남겨 가져다줄까 싶었는데, 매콤한 토마토 스파게티가 너무 먹고 싶어서 생각을 접었다. 근데 고추 표시가 있는 스파게티가 품절이란다. 하는 수 없이 그냥 일반 토마토 스파게티를 시키고 기다리는 동안 오늘 받은 따스움에 취해 짧게 글을 썼다.
칠레 사람들은 참 친절하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할 만큼. 한 사람, 한 사람의 따뜻함이 나를 반성하게 만든다. 나는 누군가에게 따뜻한 적이 있었던가?
저녁이라도 맛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이 맛없기 힘든 토마토 스파게티가 또 맛이 없었다... 피자를 시켰더라면 맛있는 저녁도 먹고 따스운 사람도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아타카마의 외로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