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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여행 마지막 춤은 식당종업원, 투어가이드와 함께

[5일차/칠레] 클럽파티 그리고 새벽 3시 반 우유니행 야간버스

by 도나윤

나홀로 행 마지막 만찬


P.M.9:30

새벽 3시 반 야간버스를 기다리는 법

칠레 아타카마에서의 마지막 밤, 다음 목적지인 볼리비아 우유니로 떠나는 새벽 3시 반 야간버스를 타기까지 약 5시간 남짓 남은 상황이었다. 전날 서너 시간밖에 잠을 못 자서 숙소에서 잠깐 눈을 붙인 후 야간버스를 탈까도 싶었지만, 아무래도 쪽잠을 자는 시간이 아까웠다. 아타카마 밤거리의 시끌벅적한 펍들이,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활기찬 바이브가 혼자 배회 중인 나를 유혹했다.

'어디 더 놀다 가야지~ 잠은 죽어서 평생 잘 거잖아~?'

이럴 때 필요한 게 정신력,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일이었다. 다시 온다 한들 다 늙어서 돌아오면 무슨 소용이랴. 수면 부족을 논할 때가 아니었다. 딱히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혼자 거하게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 같이 놀 사람은 못 구했지만라도 춤을 추며 야간버스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딱히 먹고 싶은 것이 없다. 아타카마에서는 그 맛없기 힘들다는 토마토 파스타도, 엠빠나다도 모두 맛이 없었다. 무엇을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전날 가이드 R이 추천해 준 칠레 음식들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그녀가 꼭 먹고 가라고 강추해서 핸드폰 메모장에도 적어둔 칠레 전통음식 있었다. 파스텔 데 초클로(Pastel de Choclo)! 구글 맵에서 아직 문을 닫지 않은 근처 식당들의 메뉴판을 나씩 뒤져서 초클로 파는 곳을 찾아냈다.


그에게서 풍기는 동족의 향기

그런데... 이 낯익은 간판은...? 바로 전날 밤 사람이 많길래 맛집인가 싶어 들어갔다가 만석이라고 빠꾸 당한 식당이었다. 무슨 일인지 전날과는 달리 서너 명의 손님뿐, 테이블이 텅텅 비어있었고, 전날 대차게 나를 몰아냈던 종업원들의 격한 환대를 받으며 파리 날리는 식당으로 입장하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스페인어 메뉴판을 뒤적이며 초클로(Choclo)라는 단어를 찾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주문을 넣었다. 다행히 이곳은 영어 메뉴판은 없지만 종업원이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오~초클로! 아주 좋은 선택이야~!"

그가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이 종업원, 그에게서 동족의 향기가 느껴졌다. 대충 풍겨지는 에너지 레벨과 초면인 사람에게 뿜어내는 발화량을 보건대, 내 과였다. 나홀로 만찬이 그다지 심심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에게 왠지 친근함이 느껴져 주문을 넣고 한 마디를 덧붙여보았다.

"근데 초클로가 뭐야? 이거 맛있어?"

그는 칠레식 옥수수 파이라며 그냥 일단 먹어보라고 했다. 그리고는 마실 것은 무얼 줄까 물었다. 나는 구글 렌즈를 켜고 스페인어 메뉴판 위에 돋보기처럼 들이댄 후 3분만 더 시간을 달라고 했다.

"물론이지! 천천히 봐!"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방으로 리듬을 타며 춤을 추듯 걸어갔다. 사장님이 안 계시는 날인가? 식당에는 종종 손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한 그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터에서 혼자 흥이 나서 흘러나오는 노동요에 맞춰 노래까지 부르는 일꾼이라니... 노동을 이렇게 즐겨도 된단 말인가?! 자고로 일터란 디폴트 값이 고통인 것을... 신선한 노동 현장이었다. 두 눈은 구글 렌즈를 통해 메뉴판을 정독하고 있는데, 묘하게 덩달아 신이 났다. 내 몸은 이미 그의 흥겨운 노랫소리에 맞춰 까딱까딱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가 다시 주문을 받으러 돌아왔지만 나는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목이 말라서 탄산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싶은데 알콜도 섭취하고 싶고 그렇다고 맥주는 마시기 싫고. 이렇게 우유부단한 날엔 그냥 주사위 던지듯 추천을 받는 편이 나았다. "봐도 모르겠어. 그냥 여기서 네가 제일 추천하는 걸로 한 잔 줘!" 그는 망설임 없이 칵테일 페이지를 펼쳐 하나를 콕 집었고,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의 선택에 묻어가기로 했다.


칠레식 옥수수 파이와 이름 모를 블루 칵테일

곧이어 난생 처음 보는 노란 비주얼의 음식이 등장하였다. 푹신푹신하게 생긴 노란 반죽부터 한 입 떠먹어봤다. 상상이 가는 달콤한 옥수수 맛이었지만 정작 어디서도 먹어본 적 없는 류의 음식이었다. 노란 반죽을 걷어내니 예상치 못한 고기와 계란의 콜라보가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이드가 강추할만한 맛있고 특별한 현지 음식이었다. 문제는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어마어마한 양이었. 절반쯤 먹어치우니 써 배가 찼지만 잔뜩 남기기가 미안해서 아주 느 속도로 초클로를 찔끔찔끔 파먹었다.

이어서 그는 이름 모를 새파란 칵테일을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칵테일 만드는 직원이 퇴근해서 내가 직접 만든 거야~! 어때?!" 챙겨준답시고 유리잔을 가득 채운 새파란 칵테일이 곧 넘칠 듯한 바닷물처럼 출렁거리고 있었다. 색깔도 예쁘고 맛도 있었다. 여전히 흥이 나 있는 그에게 엄지를 척 들어 올려 주었다. 그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다면, 초클로에 버금가는 칵테일의 달콤함 견디기가 참 려웠다는 점이다. 나는 결국 갈증을 참지 못하고 그가 정성스럽게 말아 온 칵테일을 남겨둔 채 콜라를 시켜 들이켰다.

그는 야밤에 혼자 느릿느릿 밥을 먹는 외국인이 가여워 보였는지 이따금씩 말을 걸어주었다. 음식은 어떠냐, 어디서 왔냐, 왜 왔냐, 어디로 가냐... 는 몇 시간 뒤 이곳을 떠나는 자의 소감을 늘어놓았다. 줄어들지 않는 어마어마한 양의 초클로와 칵테일 덕분에 간간이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보니, 혼자 떨어진 남미 땅에서 마침내 친구 1호를 사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머무는 동안에는 이상하게도 동행이 잘 구해지지 않았다. 아타카마에서 꼭 하고 싶었던 유일한 한 가지는 십자가 언덕에 올라가 별을 보는 것이었다. 3일 내내 동행을 구해봤지만, 미끼를 문 사람들 마저도 당일 밤에 전부 파토를 내는 바람에 결국 언덕을 오르지 못했다. 빡빡한 일정 탓에 밤 10시 이후에나 출발하는 일정으로 동행을 모집했으니, 그들이 출발 직전에 체력 이슈를 언급하며 포기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마지막 밤이니 혼자라도 가볼까 싶었지만 호스텔 주인은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길을 30분 이상 걸어야 하니 낮에 자전거를 타고 가라고 했다(이곳에서 별을 보는 사람은 한국인뿐인가 보다...). 동행을 구해 별도 보고 어쩌면 같이 파티까지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혼자만의 상상은 물거품이 되었다. 원래 여행은 뜻대로 되지 않아야 제 지만, 만약 누군가 있었더라면 마지막 밤을 새하얗게 불태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적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혼밥 하러 들어온 식당에서 껏 입을 털 수 있는 상대를 만나게 될 줄이야.




나홀로 여행 마지막 춤


P.M.10:30

춤추고 싶은 밤

꾸역꾸역 밀어 넣은 초클로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제 식당의 다른 전우들은 모두 떠나고 나만 홀로 남아 초클로와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어느덧 식당에는 그의 노랫소리 대신 분주한 주방 마감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이제 더 이상 식도를 타고 느릿느릿 내려가는 초클로를 기다려 줄 수 되었다. 나는 여전히 잔뜩 남은 초클로 앞에 결국 항복을 선언하고 계산서를 요청했다. 살인적인 아타카마 물가를 보니 남은 음식이 더욱 아깝게 느껴졌지만 잠시 말동무를 난 값이라고 치면 나쁘지 않았다. 계산을 하고 말동무에게 덕분에 마지막 만찬이 외롭지 않았다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또한 밥 먹기보다 입 털기를 더 좋아하는 손님게 동족의 향기를 느낀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는 수다스러운 웨이터를 귀찮아하기는커녕 오히려 한 술 더 뜬 손님에게 감격한 듯 즐겁게 대화를 나눠주어 고맙다고 했다. 이어서 그는 관심법을 시전 하며 나를 흠칫하게 만들었다.


"오늘 식당 마감하고 춤추러 갈 건데 너도 올래?"

소름 돋는 제안이었다.
'아니, 춤추 싶은 거 어떻게 알았지...!!!'

같은 여행자 아닌 식당종업원이랑 같이 춤을 추러 간다, 이런 신박한 방법이... 여행 역사상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대단한 발상이었다. 이렇게 희귀한 기회가 찾아왔을 땐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예스를 외쳐야 하는 법이다.

"어디?! 몇 시?!?!"

재빠르게 숙소에 들러 짐스러운 노트북을 내려놓고 홀가분한 몸으로 다시 길을 나섰다. 이렇게 특별한 만남을 험하려고 그동안 그렇게 동행이 안 구해졌나 보다. 동행을 못 구했길 천만다행이었다.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분명히 나 또한 그의 재잘거림을 귀찮아했을 테니까.


P.M.11:00

LOLA로의 초대

약속시간 밤 11시, 아타카마를 떠나기 약 4시간 전에 기적적으로 같이 춤출 사람이 나타났다. 약속장소 LOLA, 아타카마에서 의 유일하게 파티를 즐길 수 있다는 그곳. 거리를 왔다 갔다 할 때마다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모닥불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가게 입구가 호기심을 자극하던 그곳이었다. 정 같이 갈 사람이 없으면 혼자라도 가려고 눈독 들인 으로, 우연히 만난 그가 나를 초대해 주었다. 대단한 행운이었다.

자세히 보니 입구의 모닥불은 불멍용 가짜 모닥불이었고, 들어가 보니 동네 호프집스러운 작은 바에서 사람들이 맥주를 홀짝이며 축구 중계 티비를 보고 있었다. 힙한 외관에 비해 소박한 내부가 살짝 실망스러웠는데, 왼쪽으로 보니 뭔가 번쩍거리는 또 다른 공간이 있었다. 노래방 기계 앞에서 누군가 마이크를 잡고 스페인어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그 앞 비좁은 공간에서 오로지 단 1명만이 춤을 추고 있었다.

'설마 이게 스테이지는 아니겠지...'

도대체 디서 춤을 춘단 말인가. 그때 어디선가 그가 튀어나왔다.

"여긴 가라오케야. 테이블은 밖에 잡아놨어. 일단 주문하자!"

맥주를 받아 들고 그의 뒤를 따라 어두운 통로를 통과하니 노란 알 전구들이 대롱거리는 은 야외 테라스가 펼쳐졌다. 정면에는 커다란 스크린과 비어있는 DJ석이, 양 옆으로는 만석인 테이블들이 다닥다닥 줄지어 있었다. 그 사이를 집고 DJ석 바로 앞까지 쭉 들어가니 그가 맡아 두었다는 테이블이 있었다. 4인용 테이블에는 이미 두 명이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오늘의 클럽 파티원은 나까지 총 네 명인 모양이었다. "올라!" 남은 한 자리에 합석하여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서너 시간 뒤면 이곳을 떠날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주었다. 그들은 모두 아타카마 현지인들이었다. 그들은 스페인어로 나누던 대화를 마저 이어갔다. 무슨 얘길 하는지는 몰라도 그의 친구들답게 참 유쾌하고 말들이 많았다. 그들은 간간이 나를 위해 영어로 말을 걸어주었는데, 쌩판 처음 보는 나를 마치 원래 알았던 사람인 양 편하게 대해주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언어를 쓰는 낯선 사람들 틈에 섞여있는 그 순간이 이상하게도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P.M.11:30

아타카마식 우정

문득 셋이 어떻게 만난 친구 사이인지 궁금해졌다.

"근데 너희는 언제 적 친구들이야?"

그들은 어리둥절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내 영어가 뭔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학교? 일? 어떻게 만났어?"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처음 봤는데"

맙소사, 친구 사이가 아니었다니. 깔깔거리며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 그의 친구들 무리에 당연히 내가 꼽사리를 낀 줄 알았는데, 그들도 쌩판 처음 보는 사이라니. 그는 딱히 약속도 없이 그냥 퇴근하고 혼자 LOLA에 놀러 온 것이었다. 그제서야 그들도 서로의 신상이 궁금해졌는지 나이 따위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분명 굉장히 오래 알던 사이처럼 친해 보였는데... 이것이 바로 아타카마식 우정인가?

실제로 그는 내 또래였다. 나이 얘기를 하다가 그는 뜬금없이 요즘 삶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나이가 들었지만 지금의 삶이 너무너무 좋다고 했다. 뜬금없지만 나도 그랬다. 나도 요즘 갑자기 삶이 너무 충만해져서 당황스럽다고 했다. 만난 지 2시간쯤 된 우리는 초면에 누가 누가 더 행복한지 자랑 대회라도 하듯, 각자의 행복을 뽐냈다. 그 누구와도 해본 적 없는 류의 대화였다. 보통은 누가 누가 더 힘든지 신세한탄을 하는 것이 익숙한데 말이다. 이것도 아타카마식 우정인가?


인생의 디폴트는 고통이라고, 언제나 분노에 휩싸여있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삶의 충만함(행복이라는 단어로도 설명이 부족한 상태를 이름)을 알아차린 지 3개월 차 되던 시점이었다. 아무런 신상의 변화도 없는데 요즘 삶이 너무 만족스러워 미치겠다고 호들갑을 떨면 다들 어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한 눈치였다. 그 누구도 맞장구 쳐주는 이가 없었는데, 아타카마에 있었다. 심지어 나보다 더한 애가. 30대가 되면 인생이 다 끝나는 줄 알았는데, 요즘은 나이 든 지금이 너무 좋다. 행복이란 나이가 조금 무거워져야만 알아챌 수 있는 것이었을까?


A.M.00:30

식당종업원랑 투어가이드 클럽파티

나는 가라오케 동태를 확인하고 싶어서 으로 들어갔다. 한창 판이 깔려있다면 기념으로 노래라도 한 곡 부르고 갈까 싶었다. 열댓 명은 되어 보이는 무리가 단체로 전세를 내고 앉아있는 것을 보아하니 아쉽게도 가라오케는 오늘의 영업을 종료한 듯했다. 다시 밖으로 나가려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잘못 들었나?' 이 구역에서 나를 알만한 이는 방금 막 우정을 나눈 세 명의 친구들이 전부인데...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보니 단체석에서 한 여자가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어 뭐야!!! 여기서 뭐해!!!!!"

우리는 격한 반가움을 표시하며 서로를 얼싸안았다. 어제까지 이틀 연속 나에게 아타카마 사막을 구경시켜 준, 그리고 마지막 만찬 초클로를 추천해 준 가이드 R이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그렇게 나는 식당종업원, 투어가이드와 함께 아타카마에서 마지막 춤을 추게 되었다.

DJ가 파티의 시작을 알렸고 아담한 야외 테라스는 춤을 추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가이드 R이 몇 명의 친구들을 더 데리고 왔다. LOLA에서 가이드 정모라도 한 모양인지, 알고 보니 전부 아타카마에서 가이드로 활동하는 구들이었다. 그들은 두세 시간 뒤면 떠날 이방인 관광객을 친구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쓸쓸했던 아타카마의 마지막 밤이 불과 몇 시간 만에 황홀함으로 물들어 갔다. 그들과 같이 웃고 떠들며 노래하고 춤추던 찰나의 시간이, 입이 쩍 벌어지게 신비로운 우유니 사막보다, 장엄한 자태를 뽐내는 마추픽추보다 훨씬 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혼자 밥 먹다 조금 독특한 종업원을 만날 확률 X 우연히 만난 그가 마침 내가 간절히 바라던 춤을 추러 가자고 제안할 확률 X 우연히 초대된 클럽에서 이틀 동안 투어를 함께 한 가이드를 다시 만날 확률 = ?

이 맛에 혼자 여행을 한다. 우연의 우연 가장해서 찾아오는 새로운 인연들을 발견하는 설렘,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조용히 스쳐가는 작은 기회들을 붙잡는 재미, 그리고 충동에 모든 걸 맡길 수 있는 자유! 비록 잠시 스친 인연일지라도, 지구 반대편에 언젠가 추억을 함께 까먹을 누군가가 생겼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새벽 3시 반 아슬아슬 야간버스


A.M.2:00

별 찾아 삼만리

새벽 2시를 넘기자 클럽은 칼 같이 음악을 끊고 문을 닫았다. 야간버스를 타기 전까지 남은 잠깐의 시간 동안 십자가 언덕을 오르지 못한 한을 풀기로 했다. 쏟아지는 별을 보러 시내에서 가장 어두운 곳을 찾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빛이 없는 어둠을 라 한참을 걷다 보니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아타카마 사막의 초입 이르렀다. 비록 십자가 언덕은 못 올랐지만 사막의 모래를 밟으며 사막의 바람소리를 음악 삼아 별을 보고 있자니 그곳이 곧 숨겨진 낙원이었다. 시내의 불빛, 지나다니는 자동차의 라이트가 새어 들어왔지만 어둠에 눈을 적응시키니 이내 별이 쏟아졌다. 진작 이런 곳이 있는지 알았더라면 돗자리라도 챙겨 왔을 텐데.

아니다, 나에겐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야간버스 시간에 쫓겨 거의 달리다시피 서둘러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시간이 없어 달랑 몇 분 별을 구경했을 뿐인데, 그 찰나의 순간에 시간이 멈춰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래서 달리가 사막 한가운데에 녹아내리는 시계를 마구 그려놓았던 걸까?


A.M.2:45

새벽 인터뷰, 사히 야간버스 탈 수 있을까

한바탕 파티를 즐긴 후 호스텔에 캐리어를 찾으러 돌아왔다. 정이 많은 호스텔 주인이 눈 좀 붙이고 가라고 하룻밤 공짜로 침대까지 내어줬는데 결국 머리도 대보지 못했다. 캐리어를 들고 살금살금 주방으로 이동했다. 야간버스를 타기 전에 할 일이 남아있었다.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 진행되는 짧은 화상 인터뷰 일정이 하필 남미시간으로 시간에 잡혀 있었다. 가뜩이나 촉박한 일정이었는데 예정에 없던 파티에 별구경까지 즐기는 바람에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모두가 잠든 그 새벽, 고요한 호스텔의 주방 문을 걸어 잠그고 거의 속삭이 인터뷰 렀다.

그리고는 도보 10분 거리 버스 터미널을 향해 음을 재촉했다. 울퉁불퉁 돌길을 달리는 캐리어 바퀴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동네에 우당탕탕 울려 퍼졌다. 로등 몇 개에 의지한 채 사람 한 명 안 보이는 어두운 밤길을 따라 뛰다시피 하여 표지판 하나 없는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캐리어를 끌고 온 여행객 몇몇이 어둠을 지키고 있었다. 낮에 표를 사러 미리 와보지 않았더라면 그곳이 버스터미널일 것이라곤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A.M.3:30

입국비자 없는 자, 사히 국경 넘을 수 있을까

내가 도착하자마자 대형버스 한 대가 들어왔다. 기가 막히게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스는 놓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남은 근심이 한 가지 있었다.

'혹시 국경을 못 넘으면 어쩌지...?'

우유니 사막을 보려면 남미여행에서 거의 유일하게 입국비자를 요구하는 볼리비아 국경을 넘어야 하는데 출발 하루 전에 비행기표를 끊고 급하게 날아오느라 입국비자를 미리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볼리비아 공항에 도착해서 일반적인 비자신청 비용의 4~5배쯤 되는 100불 이상의 거감을 내면 도착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육로로 국경을 넘으면서 비자를 받은 사람은 없어 보였다. 남미여행 커뮤니티에 질문도 올려봤지만 '저도 그게 궁금해요...' 등의 댓글 뿐이었다. 야간버스 탑승객들이 내가 비자받는 시간을 다 같이 기다려 주는 건지, 아니면 국경사무소에 버려지는 건지 궁금한 것 투성이인데 어디에도 정확한 설명이 없었다. 별 수 없이 나는 출국 전날 밤새서 준비한 의별 비신청 서류들을 뭉탱이로 달랑 들고 남미에 왔다. '어떻게든 되겠지...' 호기롭게 야간버스에 올라타 기사님에게 번역기를 들이댔다. '저 좀 기다려주세요...'

만에 하나 국경을 넘지 못한다면? 또 어딘가로 운명이 나를 이끌 지어니 그때 가서 생각해 볼 일이었다. 버스는 생각보다 적하고 편안했다. 의자를 젖히고 다리 받침대까지 펼치면 대충 반쯤 누워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날도 서너 시간밖에 못 잔 데다가 새벽 세 시까지 깨어었던 것이니 극심한 수면부족 상태였다. 머리를 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환영이었다.

남미여행의 첫 국가 칠레를 떠나 볼리비아로 향하는 길, 드디어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우유니 사막을 보러 간다. 물이 찰랑거리는 소금 사막의 거울을 보기 위해 과감히 우기에 남미여행을 왔더니 일기예보가 온통 비와 구름 투성이였다. 제발 부디 일기예보가 틀려야 할텐데! 야간버스의 불이 꺼졌다. 나도 눈을 감았다. 버스 의자에 몸을 뉘이고 약 24시간 만에 제대로 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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