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도 너를 지나치지 않을 때가 없다
그러나 너를 쳐다보지 않았다
한 번도 네가 나를 바라본다 생각하지 못했다
아직 무성한 너는
나를 보고 있구나
봄의 너의 꽃가루들은
영역 표시로 흔적을 남겨
너를 피해 차를 세웠다
여름의 무성함은
초록을 넘어 검은빛을 띄운다
나는
너를 비껴간다
오늘
나는 너를 본다
그 겨울의 황량함 속에
너에게 나를 맡기듯
떠나버린 분을 생각한다
너를 그곳에 입양한 분
함께 웃었다
영원할 줄 알았다
너의 생채기들은 너랑 함께 자랐구나
울퉁불퉁한 그 상처들은
아팠겠구나
나의 생채기들도 울퉁불퉁하다
떠난 분의 생채기는 작고 곱기를 바래본다
너는 나를 보고 있었구나
너를 비껴 지나간 긴 세월 동안
너는 나를 보았구나
너의 생채기를 만져본다
나의 생채기를 위로하듯
떠난 분 기억으로
못내 비껴갔던
너를 오늘 바라본다
교회 입구 오른쪽 끝에 느티나무가 서 있다
그 느티나무를 보고 기뻐하셨던 분이 계셨다
그 자리에 나무를 심고 자라는 모습을
보시던 목사님이셨다.
스물세 살에 이곳 부산에 왔다
광주에서 간호 전문대를 졸업할 즈음 나는 비로소
진로에 대해 고민했다
그때는 병원 취업문이 좁았다.
막연하게 조산사 트레이닝을 받고 싶었다
졸업시즌이 되자
고민 없이 부산행 열차를 탔다.
하루에 딱 한 번 있는 무궁화호
기억에 의하면 밤 9시 45분 기차였다
(난 내게 놀라고 있다. 흠칫!)
밤새 기차는 달리고 입석으로밖에 표를 구하지 못한
나는 새벽이 되면 잠을 이기지 못했다
준비한 신문지를 깔고 누웠을 것이다.
앞 의자와 뒤 의자가 서로 기대고 있으면
좁은 삼각지대 공간이 생긴다. 그 자리다
당시에 필기시험을 치러 왔었고 통과된 후 면접을
보러 다시 왔었다.
기숙사 생활로 나의 부산 살이는 시작됐다
현재도 그 근처에서 살고 있다
부산역에서 가깝긴 하지만 당시 부산에서
광주 가는 열차도
아침 7시 8분에 한번 있었다.
이렇게 쓰니까 내가 연식이 오래된
사람이라는 게 실감 난다.
고속버스는 없었나 생각이 들지만
당시 나는 딱 거기 까지였다
부산역에서 지하철도로 세 코스만 이동하면
되는 거리라
열차를 선택했을 거 같다.
당시 누가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낮에는 꼭 수업을 한 시간씩 들어야 했고
교육생이던 우리는 3교대를 했다.
당시 그 병원에서 일만 명이 넘는 신생아가
해년마다 태어나고 있었다.
밤근무를 일주일 내내 하다가 하루 쉬고
또 일주일을 반복했다.
다행히 바로 앞 기수들이 반기를 드는 바람에
처우가 좀 나아졌다.
졸업하고 막 들어온 우리는 6개월 먼저 들어온
선배들에 비하면 숙맥이었다.
교대근무가 익숙하지 않은 나는 오후 3시쯤
시작되는 수업시간 내내 잤다
뚜렷한 목표가 없었다
다음 해 국가고시를 동기들과 함께 무사히
통과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조산사 면허증을 취득했지만 정형외과 병동이
나의 첫 근무지였다
그 무렵 목사님을 만나게 된다
제자 훈련반 (성경 공부가 실생활에 이어질 수
있도록 적용하기 훈련)을 시작으로 3년을 함께한다
목사님은 순수한 청년들을 좋아하셨다
무섭지만 깊이 있고 인격적인 그분을 존경했다
멘토였고 영적 스승이셨다
그야말로 영혼을 갈아 넣은 가르침이었다
몸이 약한 목사님은 힘겨워하실 때가 많았지만
열정으로 사명감으로 언제나 이겨 내셨다.
목사님은 내가 결혼하고 큰 아이가
다섯 살 때 서울로 가셨다.
몹시도 많이 울었다.
가시던 날 느티나무 아래서 기다리고 있던 나를
큰아이와 함께 본인차에 태우셨다
그 짧은 거리를 이별 의식처럼 태워 주셨다.
잠깐 나눴던 대화는 기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