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후
무의식을 갈구했던 지난 별밤이
의지의 춤을 추게 하였다
내 노래는 그댈 향해 날아갔지만
남는 건 메아리뿐
제비 즐거이 오던 날
입을 모아 부르던 사랑의 노래가
밀물처럼 그립다
난 신의 질투가 두려워
하얀 모습을 그대에게 보였지만
오늘 세상을 사랑하게 돼버린
나의 사랑아
이 가슴은 슬픔이 되고 눈물이 되고
내 껍질은
화려한 웃음으로 아침을 맞는다
1985.6.3
고 2 때다
공부하고는 담을 쌓았다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시절이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때 읽었던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은 그 시절 나를 온통 뒤흔들었던 작품이었다.
나는 주인공 제롬의 사촌 누이 알리사였다.
신앙과 사랑의 갈등으로 끝내 제롬 곁을 떠나는 알리사 그녀였다.
그런 연유로 첫사랑과 헤어졌다.
중2 때 만났던 그 친구가 첫사랑 이라니
더군다나 알리사였기에 헤어졌다니
모르는 사람들은 억측이라 여기겠지만
내적 갈등은 헤어짐의 원인을 제공했고
알리사가 빙의된 소녀에겐 본질의 문제였다
길지 않은 만남이지만 첫사랑이었다
이 어설픈 사랑으로 그처럼 고뇌했었나?
나는 그랬다. 어린 왕자를 읽고 길들이기를 시도했고
데미안을 읽고 알을 깨고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위와 같은 시를 썼다
처음엔 뭔 말인지 모르겠더라
여러 번 읽으니까 조금 이해가 온다
어려운 시?를 쓰던 소녀였다
유일하게 옛집에서 건져 낸 나의 소지품이다
시노트
당시엔 예쁜 글씨로 유명한 글귀나 시를 적은 노트를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을 거다
책장을 뒤적이다가 수십 년 만에 이 물건을 꺼내 들어본다
시를 썼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반갑진 않다 어딘가에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의 과거를 펼쳐볼 이유가 없다.
펼치자 이내 덮고 말았다
그때의 알리사가 지금 글을 쓰며 앉아있다 나는 어쩌자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가
내가 알리사였음을 밝혀 가며 말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지금은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이 같은 꽃이여"
소녀는 그 누이보다 많은 중년으로 돌아와 있다
노트를 붙잡고 있었던 그 숱한 날들이 다시 시작됐다
다른 점이라면
그땐 해결 못할 시인의 고뇌가 있었다.
어쩌면 나의 결핍과 외로움이 독서와 글쓰기로 도피처를 삼았다
꽁꽁 숨은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다
지금 시작한 글쓰기는
여전히 나약한 나의 몸부림이 있다
그러나 삶에 대한 열정이 보인다 선물처럼 받아 들고뛰는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의 글쓰기는 어른의 글쓰기로 내 삶과 유기적이다.
어떻게 현재를 살고 있는지
내 기분은 어떤 빛깔을 띄고 있는지
사람들과 어떻게 사랑하는지
글쓰기는 내게 상세하게 알려 준다
쓰다 보면 지난 감정들도 저 밑에서 뿜어 올려진다
풀지 않은 숙제들은 꺼내서 마주 해야 할 때가 있다.
마냥 피할 수만은 없다.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잘 모르겠다.
걱정하지는 않는다. 마주한 상처들은 나를 바라보고 나도 더 이상 숨지 않을 거니까
소녀는 오랜 시간 기다렸다
비로소 중년의 여인은 낯설지 않은 소녀에게 손을 내민다
수줍은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추신 :1984년 둘째 오빠가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노트다
앞페이지에 ♡♡에게라고 쓰여 있고
앞쪽 몇 장은 예쁜 글씨로 유명한 시들이 있다
잔뜩 꾸민 글씨로
그중에 ' 보고파'라는 시도 있다
오빠에게 묻진 못할 거 같다.
취득 경위가 기억나지 않는다 노트를 두고 군대에 갔던지 집을 떠났겠지. 앞장을 몇장 지나면 소녀의 글씨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