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않았다.
슬프지 않았냐고?
모르겠다.
슬펐는지 안 슬펐는지
그때 나는 연애편지를 쓰고 있었다.
결혼한 사촌 오빠한테 뒤통수를 세게 맞았다
내가 맞은 이유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방에 엎드려
편지를 쓰고 있었으니
아버지에 대한 애도의 글도 아니었다.
연애편지 대상이 누구였는지 생각도 안 난다
내겐 자연스러웠는데
오빠는 용납할 수 없다는 단호함으로
세게 후려쳤다.
아팠다
아버지를 배신한게 아팠고
그 시간 연애편지 쓰던 그 일이 아팠다.
나는 홰 하필 친척들까지 모이던 장례식에
연애편지를 썼을까?
그래서 울지 않았다
아버지를 여읜 사실은 그렇게 큰 슬픔이 아니었다
떠나신 아버지는 내가 잡을 수 없지만
가까이 숨 쉬고 있는 누군가는 내가 잡으면 잡힐 거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집을 떠났다.
2남 4녀 중 마지막 주자였다.
가장 마지막까지 엄마랑 살았다.
부친을 잃은 형제들은
서로 앞다투어 집을 나섰다.
가난한 집에서 벗어나 각자 제앞길을 책임져야 했다.
나는 부산으로 취업차 오게 되었고
여기에 오랫동안 정착한다
지금은 서울 모교회에서 은퇴하신 목사님을 만나게 된다.
목사님께 3년 정도 훈련(실생활에 적용하는 성경공부)을
받았다
지금 글쓰기를 하며 중요하게 여기는 꾸준함과 습관 등을
배우는 훈련과도 같았다.
목사님은 청년들을 사랑했고 인격적이셨다.
당신도 고뇌하고 변화되는 삶을 추구하며 꾸준히 애쓰셨다.
공부하던 중에 누군가에게 과한 얘기를 했다고 생각한 날은
끙끙 앓으시며 잠을 못 이루신다 사모님께 들었다.
나는 유독 목사님을 따르는 청년 중 한 명이었다.
목사님은 무서웠고 말하기 힘든 대상이었지만
식사나 공부할 때 옆에 가서 앉았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어색하고 불편함을 이겼다.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목사님과 일정 거리감이 생겼다.
다시 훈련반에 들어가 새로움을 시도하지만
예전 같지가 않았다.
목사님은 서울 교회의 초청으로 이곳을 사직하게 되었다
편지를 썼다
번복하시면 안 되는지 절절한 편지였지만 목사님은 언급하지 않으셨다.
젊은 나는 떠나셔야만 하는 사연들을 다 알지 못했다.
목사님은 금요일밤기도회에 예의 익숙한 낡은 보랏빛 패딩 바지와
색 바랜 같은 계열의 점퍼를 입고 계셨다.
(지금도 낡은 그 옷들은 상징처럼 떠오른다)
맨 뒷자리에서 기도하시며 힘겨워 하셨다
고별 설교를 하셨다.
속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처럼 따뜻하고 무서웠던
그분의 부제를 생각하니 좀처럼 울지 않던
나의 눈물의 둑이 터졌다.
일요일 교회에 가서
설교가 시작될 때
긴장해서 앞으로 당겨 안는 나의 무의식적인 동작들
깊은 데서 건져 올린 차분한 음성과 말씀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목말라했다
어느 지친 오후 시간에
물 한잔 떠다 드렸을 때
나를 향해 여름날 냉수와 같다고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이사하시던 날 휴가를 내서 교회 앞으로 갔다.
사람들과 인사를 마친 목사님은
나와 어린 큰 아이를 승용차에 태웠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없다
잠시 후 차에서 내렸다
몇 걸음 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 짧은 거리에 굳이 나를 태우신 목사님을
이제야 이해 할거 같다.
아니 지금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아팠다.
남겨진 상처가 컸다
항상 함께 할 것 같았다
생겨진 거리감은 이내
회복될 줄 알았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익숙하지 않다
너무 일찍 가신 아버지가
나로 이별을 못 견디게 했는 것인지 모르겠다.
정작 아버지가 가실 때는 천연덕스럽게 연애편지를
쓰고 있었던 나
중학생이던 나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
아니 위암으로 피골이 상접한 아버지가 가시는 게 옳다
여겼을 수도 있겠다.
아버지의 부재는 찌그러진 동그라미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없는 것은 팩트였고
내가 좀 손해를 봐도 되는 이유 같았다.
그렇다고 크게 손해를 보거나 불이익을 당한 것도 없었다.
결혼식에 작은 아버지가 대신 서신 것
더도 덜도 아니었는데
나는 찌그러진 동그라미 같았다.
무섭지만 때로는 다정했던 아버지
당신 자전거를 논두렁에 빠뜨리고 엉망을 만들었지만
혼내지 않으셨다
뭐든 배우려 하는 나를 기특하게 보셨다.
아버지는 나를 자전거에 태우고 버스 정류장에 한 번씩
데려다주셨다.
아버지 상의를 붙들고 뒤에 앉은 행복한 내가 있었다.
아버지 자전거로 나는 자전거를 배웠다.
가시기 전 거의 못 드실 상태였을 때 사춘기의 나는
상대적으로 식욕이 폭발하고 있었다.
다락에 홍시(대봉감이었던 거 같다)를 익히고 있었다.
매일매일 열심히 다락을 올라 다니며 곶감을 빼먹고 있었다
홍시를 찾던 아버지는 거의 남지 않은 홍시를 보고
노여워하셨다.
뭐라 하셨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
수치스러웠던 몸의 감각만 생생하다
그 상처로 난 울지 않았을까
본래 잘 울지 않았었던 것도 같다
내 무의식에게 묻고 싶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울지 않았던 너는
목사님과의 이별 앞에서 봇물 터지듯
울음을 참을 수 없었던 이유가 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