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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in Oct 22. 2024

선이야  억울하면  너도 해!

 

광주광역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함평에서  올라와  처음 정착했던 곳은  상무대라고  큰  군부대  건너편의

넓은  평수의  집이었다.  내 나이  네 살 때였다.

집앞쪽으로  개울이  흐르고 더  앞쪽엔 까만  아스팔트  로가  있었던 거 같다

그 개울에서  개구리를 잡았다.  6살  많은  바로  위  오빠를  따라다니며

개구리  구워 먹던 곳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막대기에  감은   긴  실 끈 끝에 잘게  자른  호박꽃을  묶는다.

개구리를  유혹하는  낚시대였다.

넓은 마당  한 가운데는  우물도  있었다.  

한쪽에서  겨울엔  못 치기를   했었다.

내 손등은 놀기에  치쳐  겨울엔  항상  텄다.

누군가 바셀린을 발라  준거 같은데  아버지인지  언니인지 모르겠다

전체 집을  빙 둘러  셋방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군인  장교들이  이제 막  살림을  시작하며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계속  이동하는  사람들이라  오래 살지는  않았던 거  같다

갓난아기도 있어  한 번씩  내게  아기를 부탁하고  외출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기꺼이  아기를 봐줬다.

구경하기  힘든  분유를  입에 털어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숟가락을  털어  먹었다. 그 맛은  살짝 느끼하면서도  고소함이  있다.

분유가  많이 줄었다  생각해도  아기를  봐줬으니  뭘  더 얘기할 수 있었겠나?

내가 돈을  받은 것도 아니고

나는 우리 아이들을 키울때도  분유를  자주 털어 넣었다.


마당을 지나  안쪽에 자리  잡은  안채는  아궁이가  있는  오래된 집이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쯤  하사관 주택이라는 마을로  이사를  했다.

앞전 보다 현대적이었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을  들어간  곳이었다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야 한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퇴역한  군인도 계시지만  현역  군인들이었다.

우리 골목에도  군인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한 블록 뒤에  사는  선이 아버지도 군인  이셨다.

선이도 여동생이 있었고  나도 여동생이  있었다

언제부턴지 우리는 단짝이 됐다


선이 엄마는 전업 주부셨고  눈이  부리부리한  키가 크신  분이다

선이는  아버지를 닮아  아담하고  요목 조목  예쁘장한  모습이었다.

마을  끝에 산으로 이어지는 집은   농장집이라 불리었다.

젖소를 키우고 있었는데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냄새가 고약해  코를 움켜쥐어야 했다

아버지는 그 집에서  소젖을  노란 주전자에 받아  오시곤  했다

그것을 한번 끓인 후  내게  주셨다. 맛은 구수했고 나는 잘 받아먹었다.

선이는

"그걸  어떻게 먹냐?"

나는

" 맛있는데  뭘."


선이네는 아버지가 군인이라  생활이 비교적  안정돼 보였다.

도시락에 계란 프라이와 오뎅이  있었다.

계란 프라이는  밥 중간에 발견되었다.  밥과 밥사이에  넣으시는  어머니의  사심이  보였다.


반면 우리 집은  선이 집보다 형제도 많고 아버지는  안정된 직장이 없이  노동일을  하고 계셨다


아버지 자전거로 나는  자전거를  배웠다.

나는 선이를 매번 뒤에 태우고 달아나듯이  마을을 빠져나갔다.

한 살  아래 여동생은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언니를 부르며 맨바닥에  앉아  다리를  구르며 울었다

( 이 장면이  떠 오를 때면  마음이 아프다)

어디에 태우란  말인가?

동생의 애원을  뿌리치지 못하고 앞쪽에 한 번쯤은 앉혀  세 명이서 곡예를  했던 것도 같다.

소녀들에게  동생은 귀찮은 존재였다.


5학년때  노래를  잘했던 선이는  당시 동요대회인 '누가  누가  잘하나?'에

<파란 마음 하얀 마음> 으로  나와 이중창을 했었다.

상은 안 받았나 보다  기억이 없는 거 보니까


당시 국민학교는 산길을  지나  한참을 가야 도착할 수 있었다.

선이는  느긋한  나 때문에 늘 숨이 찼다.

급할 것도 없고 비가 와도 피하지 않는 곰탱이와의  동행이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  혼자  먼저 학교에  간 날도  있을 것이다( 잘했다 선이야)

한 번은  대판 싸웠다.

오랫동안 얘기하지  않던 우리는 등굣길도 하굣길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어린이들에게  불편함은  괜한 심술로 드러난다

선이의  존재가 아쉬웠던 나는  무작정 시비를 걸었다.

나의  몽니만  선이에게  전해질뿐이다.

다시  친해지고 싶은데  융통성 없는 나는  가슴앓이만 해야 했다.

그래봐야 어린이들이 한 달을 넘길 수 있었을까?



우리는 같은 중학교에 배정받았다.

버스를 갈아타고 가야 하는 공립학교였다

낮은 담벼락과 개구멍이 있었다.

왕성한  사춘기의 식욕은  담을 넘는 용기로 이어졌다. 그러다 아예 벗어 나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려야 했다. 선이는 같은 반이 아니라 나의 무용담에 가담하진 않았지만  등하교는  늘 같이 했다

바야흐로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충만하여

버스를  갈아타는 곳에서 자주 마주치는 남중학생들을  사귀게 된다

예쁘장한  얼굴에 말발이 얹어진 선이는 인기가  많았다

그 친구들은  중학교 럭비부였다. 주장은  나랑 사귀었다.

이성에 대한  관심에 비해  경험도 없고 어설픈 나는 번번이  관계들을  이어가지  못했다.


각자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선이는  졸업 후  취업을 했다

그리고  광주를 떠났다.

이미  외로워진  나는 대학생활 내내 싱클레어(데미안을  읽고 있다)처럼  이중적인  생활을 했다


오늘  선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이가 주로   먼저 전화를 한다.

" 안 죽었냐?"

" 어 선이네."

그러고는 어제 얘기하다 만  얘기들인  것처럼 한참을  수다를  떤다


나의 삶과 한 발짝 떨어진  채  고향에서 정착하고 살고 있는 선이에게는

나의 비밀을 한 번씩 털어놓게 된다

거리의  안전감도 있고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아련함으로 서로를 보듬어 줄 거 같기 때문이다


새로운 행복 나의  글쓰기를  어린 나를 아는 그녀에게  처음  공개를 했다.

좋은 것은 말하고 싶은 건데

모든 부끄러움은  내 몫이  돼야 하는 사실 앞에 주위 사람들에겐  자신이 없다


선이야 너도 내 글쓰기에  등장인물이 됐다

하고 싶은 말 있니?

할 말 많겠지?  네가 나를 불렀던 호칭,

콜라에 밥 말아먹은 나의 먹성

속 터지는  일들

그러나

네게는 자유가 없구나  

손은  나만 쓸 수 있어서

억울하면  같이 하자꾸나 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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