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in Oct 24. 2024

세 남자

김남웅  선생님

5학년때  담임 선생님이시다.

엄마  아버지가  두 분 다  일을  나가셨다.

아홉 살 많은 둘째 언니가  엄마처럼  

도시락을  싸주곤  했었다

없는  옷가지에  그나마  단정하게  입혀주는 이도  둘째  언니였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다가  도시로  옮겨  온 게  내 나이 4살 때였다.

한  번씩  시골집에  내려갔던 기억이  남아  있다.

벌에 쏘여  퉁퉁  부어  된장 바르던 일, 

아버지랑  자다가  쥐가  나와 소동을 벌인 일

집 입구에 감나무가  서있던  풍경

사실은  어렴풋하다.


도시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엄마는  서른아홉에  나를  낳고  연이어  동생까지  태어났다.

늦둥이로  태어난  자매는 '있으나  마나'라는  별명을  가졌다.


국민학교  시절  젊은 엄마를 가진 친구들이  부러웠다.

2학년 때  학교  운동회를 하는데  학년별 엄마들  릴레이를  했다.

선생님이  엄마  나이가 서른 살 미만이면  손들어 보라 했다.

손을  번쩍 든 그 친구의  엄마는  스물아홉

울 엄마는  오십이  코앞이었다

엄마가  학교 오시는 게  꺼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젊은 엄마를  가진  아이들이  부럽긴 했다



선생님이 나타났다(이분 분위기다)




5학년이  되었다

나는 얌전하고 말이 없는 아이였다.

중년의 남자  선생님이  오셨다.

선생님은  글짓기를  많이  시다.

말없는  내게도  칠판  닦는 일을  시키셨다.

다음날 아침에  풀어야 할  자습 문제도 

방과 후에  칠판에 쓰게  하셨다.

그래도  난 말이  없었다.

시에서 주최하는 글짓기 대회에  

나와  다른 한 친구를  데리고 나가셨다

입상은 못했다.

그 후에도   글짓기를 자주  시키시던  선생님은 

어느 날  내가  쓴 것을  읽고  

대회 때 이렇게  썼으면  우수상 받았을 건데 하며 

아쉬워하신다

그 글을 반친구들 앞에서  읽게 했다.

내 생애  통틀어

5학년때만큼  성적이  좋았던 적이  없다.


고2 때  교회 선생님이  있었다.

교회 오빠는 아니었고 둘째 언니  동기였다

그러니까  아홉 살  많았다.

남녀 합반이었다.

선생님은  항상  똑같은 의상이었다

넥타이 없는  흰 셔츠에 까만 정장 바지

여름엔  예의  그  흰  셔츠의  팔을  접어  입으셨다

단정한  문학청년이었다


수업을 마치면  시를 한편씩  읽어  주었다

그중엔 자작  시도 있었다.

여학생들은  비교적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를  들었지만

남학생들은  어느  날부터는  대놓고  콧방귀였다.


선생님에게 편지를 썼었다.

연애의  감정보다는 소통하고 싶은  갈망이었다.

바로  위의 오빠가  여섯 살  많았다

늦둥이 둘은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내면을 나누고  싶은  어른이 필요했다  

형제들은  이미  집을  떠났고

엄마와  동생은  따로따로였다

나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선생님과 연애의  감정이 아니었음을  길게  설명했다


시를  담은  편지를  곧잘 썼다

피드백을  한 번씩 해주셨다.  

가  고3이 되었을 때

선생님은  전혀  뜻밖의  인물과 결혼을  했고

 빠르게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다  다른  동기생한테 편지의   답장을  해줬었다는

 얘길 들었다


나는 물었다. 내  편지엔  왜 답장하지  않았냐고 

그리고  왜  그분과 결혼했냐고?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변명했는지 

사과했는지  쳐다만  봤는지  가물가물  하다


지나간  날들에  대해  기억이 없다

마치  기억상실증처럼  좀처럼 생각나는 게 없다


글을  쓰다 보면  실타래처럼  기억들이  끌려 나온다

 나의 글쓰기의  역사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기억샘에서  두 분이  소환됐을  뿐이다.




이승윤 가수




2020년  jtbc 싱어게인  1부를  매주마다  숨죽이고  봤다

결국  우승을 거머쥔 이승윤 가수로 인해  덕후가  됐었다

그의 자작곡들을  찾아다니며  매일  듣고  있었다

깊이  있는 시였고  철학이었다. 

잠들어  있는 나의 감성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승윤으로부터 시작된  나의 촉수들이 글쓰기로 나를  이끌었다.

검색을 통해 그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점령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

전국투어를  하는데   꼬박꼬박  따라다니는  덕후들을  보았다

범접할 수  없는 수준임을  깨닫고  뒤로 물러 서기 시작했다


글쓰기에  영향을 준 세 남자들

지면을  빌어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책 세권 정도 쓰고  하는 인사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나는 세내기 브런치 작가다

누구나 할 수 있음을 내 글쓰기로 맛보기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