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4도 이상 떨어지면서 때 아닌 태풍을
부를 것 같은 바람까지 분다
실내에 들어오면 따뜻하지만 바깥은 춥다
심술부릴 일은 아니지만 너무하다
긴 여름에 잠깐 들른 계절
가을아 가는 거니? 언제부터 그렇게 냉정 해진 거야
어스름이 오면 골목에서 대문을 열고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그 스산한 기운과 갑자기 쌀쌀한 공기까지
피부로 흡수하면 내 머릿속은 징소리
같은 울림이 있었다
빈가슴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이맘때면 우울이 습관처럼 자리를 잡는다.
우울감을 잘 이겨내지 못할 때도 있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너무 좋아했던
김광석 노래를 삼십 대 중반부터
듣지 않았다
더 우울해진다는 스스로의 진단이었다.
40대를 지나오면서 우울은 설자리를 잃고 말았다.
점점 작아진 채로 내속 어딘가 땅굴을 파고 들어갔다
4년 정도 악기를 전공했다. 직장과 학교를 병행하며
도무지 우울을 초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는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테라스 벽돌을 바르고 옥상 방수를 스스로 하고
집안 곳곳 작은 인테리어까지
아기자기 변모해 가는 재미에
우울은 들썩거릴 뿐
머리를 들이밀지 못한 채였다.
그때부터 얻어진 병이 가만있지 못하기 병이다
혹시 주위에 가만있지 못하고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몸으로 우울을 떨치는 사람일지 모른다.
갱년기를 맞이하고도 우울은 거의 없다
계절이 지나가며 주어지는 쓸쓸함은
가슴을 지긋이 누르기도 하지만
쓸쓸함으로 그냥 받아들인다
이 계절은 늘 그래왔고 가면서도
미련을 옴팡지게 남기기도 하지만 그뿐이다
나는 내 마음을 그냥 두기로 했다
마음보다 중요한 일상이나
해결해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울이 땅굴을 뚫고 뛰쳐나올 수도 있겠지만
바쁜 내게 저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을 방임하는 것은 아니다
하고 싶은 대로 두겠다는 것이다
갑자기 추워진 탓인지 몸이 계속 가라앉는다
오후 예배 시간에 둘째와 나란히 앉아
맛이 간 눈빛을 서로 주고받았다
나도 최근 수면 부족이지만
직장 생활하는 둘째도 한국사 시험 보겠다고
새벽 5시까지 공부하고 잤다 한다.
어떻게 됐냐 하니까 " 당연히 1급 통과했지"
"재수 없다! 공부도 안 하더니만 치!"
엄마의 축하 멘트다.
글 쓰는 것이 칼로리 소모가 많다고 들었다.
생각 없이 먹고 있다
이번주는 유난히 피곤하다
오늘 일요일 저녁은 막막하기까지 하다
출근 지옥 때문인가?
글을 써야 하는데 딱히 할 말도 없고
좀 전에 머리를 감으면서 두피맛지지를 하며
세포야 도와줘라고 주문을 외웠음에도 무심하다
일요일 저녁의 특수성이라 이해해도 될지?
아님 계속 막막할 건지 확답을 듣고 싶은데 대답이 없다.
그때
식탁에 앉아 있는 내게 들려오는 엄마 목소리
우리 엄마는 꿈쟁이다.
맨날 꿈을 꾼다
벌떡 일어나시며
"울 애기 어디 갔냐? 여그 있었는디?"
멀뚱이 쳐다보는 딸 보더니 다시 누우신다.
1인 2역도 하신다
남편과 얘기를 하는데 제법 다정하시다.
아버지 생전에 다정한걸 별로 보지 못했다.
매일 저녁 꿈을 꾸신다.
민망하게 깔깔 웃으실 때도 있지만
무슨 일인지 호통을 치고 소리 지를 때가 많다
무슨 세월을 사신건지..
심지어 소곤소곤거릴 때도 있다
불처럼 화내는 것보다 아이처럼 웃는 게 낫다.
글과 씨름하는 내게 들려온 엄마의 비장한 목소리
"계속 그런 식으로 하면 죽여 블랑께."
죽인다는 말을 어찌 저리 쉽게 하는지
앞에 어떤 놈인지 몹시 궁금하다
빼꼼하던 우울이란 놈도 그사이 도망치고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