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화가와 복권방남편이야기
그녀는 화가다. 그녀의 손에서는 항상 둘 중 하나의 냄새가 난다. 캔버스 앞에서 묻혀온 알싸한 테레빈 유 냄새 거나, 아니면 부엌에서 배어든 고소한 참기름 냄새 거나. 쉰을 훌쩍 넘겨서야 처음 붓을 잡았을 때, 주변 사람들은 "그 나이에 무슨 그림이냐"며 혀를 찼다. 하지만 그녀는 인생은 육십부터가 아니라, 붓을 든 그 순간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20년을 버텨 칠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녀는 이젤 앞이 가장 편안한 현역 화가다.
그런데 요즘 그녀의 스케줄이 팔레트보다 더 복잡해졌다. 치매를 앓고 계신 친정어머니가 인천에 계셔서 매주 올라가는데,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볼 때면 추상화보다 더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싶다. 게다가 최근에는 지방 순회공연 코스가 하나 더 늘었다. 바로 그 못 말리는 바깥양반 때문이다.
정년퇴직하고 집에서 세끼 꼬박 먹던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사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칠십이 다 된 나이에 말이다. 그녀가 도시락을 싸 들고 말리려고 했지만, 남편의 눈빛이 스무 살 청년처럼 반짝여서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차린 게 자신의 고향인 인천에 '복권방'이다. "지인들도 많고, 월세 싸고, 남들에게 희망을 파는 장사"라는 낭만적인 이유였는데, 참 대책 없으면서도 귀여운 모습이었다.
그렇게 문을 연 지 3개월이 지났는데, 희망을 파는 건 고사하고 파리만 날려서 월세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남편의 어깨가 축 처져 있는 걸 보고, 그녀는 결국 붓 대신 국자를 들고 일주일에 한 번씩 남편 가게로 출근 도장을 찍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그녀는 순간 가슴이 철렁해서 "가게 쫓겨나? 어디 아파?"라고 물었지만, 남편은 이렇게 외쳤다. "여보! 나왔어! 드디어 당첨자가 나왔어!"
알고 보니 1등도, 2등도 아닌 3등 당첨자가 나온 것이었다. 당첨금이야 얼마 안 되겠지만, 개업 3개월 만에 처음 나온 당첨자라 남편은 마치 본인이 1등 된 것처럼 흥분했다. "시작이 반이다, 이제 명당 터가 트였다" 하면서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데, 그 말을 전해 듣는 그녀도 코끝이 찡해졌다. 평생 성실하게만 살았던 사람이 고작 3등 하나에 그렇게 활기를 되찾는 게 짠했다.
그래서 그녀의 부엌은 아주 난리가 났다. 붓은 깨끗이 씻어두고 프라이팬을 잡았는데, 반찬 하나하나에 주술을 걸었다. 멸치볶음에는 견과류를 듬뿍 넣어서 씹을 때마다 행운이 톡톡 터지라고 빌고, 꽈리고추는 인생의 매운맛을 다 가져가라고 매콤하게 볶았다. 그리고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돼지고기 장조림은 뭉근하게 오래 졸여서, 대박 기운이 깊게 배어들라고 정성을 쏟았다.
그 무거운 반찬 통을 바리바리 싸 들고 나서면서도 그녀의 표정은 참 밝았다. 평소에 그림 그릴 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명작은 한 번에 그려지는 게 아니라, 덧칠하고 수정하면서 깊어지는 것이라고. 지금 겪는 이 웃지 못할 복권방 소동도, 어머니를 돌보는 시간도 다 인생이라는 그림을 덧칠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녀는 작은 차를 몰고 인천으로 갔다. 문 열고 들어가면 남편이 파리채 대신 걸레를 들고 "여보, 여기가 3등 나온 명당이야!" 하며 반겼다. 그녀는 "그래요 사장님, 그 3등 기운 받아서 이 반찬 드시고 힘내요.라고 말했다.
아직 월세 걱정하는 초보 사장님이지만, 가져간 그 반찬들이 그에게는 수억 원짜리 당첨금보다 더 든든할 것이다. 3등이면 어떻고 꽝이면 어떤가. 서로에게 1등인 부부가 마주 앉아 밥 한 끼 따뜻하게 먹으면, 그게 바로 대박 난 인생인 것을.
행운을 볶아서 배달 하는 화가의 뒷모습을 마음으로나마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