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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약일지(1)

약 먹고 주정뱅이처럼 휘청거려요

by 홍시

최근 정신과 약을 새로 복용하기 시작했으니 복약 후기에 대해 써보려 한다. 기존에 실행하던 감정일기를 포함한 그루밍 프로젝트는 계속해서 진행 중이고 정신과 약을 하루 세 번 복약하는 단계만 추가됐다. 이번에 처방받은 약은 예전에 약 3년 동안 먹었던 약과 다른 약이었다. 전에 먹었던 약보다 우울과 불안에 조금 더 효과적일 수 있는 약을 처방해 주셨는데 그렇게 해서 먹게 된 약은 렉사프로, 아티반, 인데놀이었다. 이번에는 인데놀 처방을 굳이 요청드리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처방을 해주셔서 원래 불안장애에 잘 쓰는 약인가 싶었다. 한편으로는 몇 년 전 한참 의지했던 약을 또다시 만나게 되어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이번에는 정말로 내 멋대로 먹지 않고 꼭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주신대로만 먹을 거라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약을 먹으면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다. 약에 적응하기 전까지는 졸릴 수 있고, 머리가 아프거나 소화가 안 될 수도 있는데 우선은 참고 약에 적응 먼저 해보기를 권하기 때문에 너무 힘들면 두통약이나 소화제를 먹는 등 일단은 불편함을 참고 약을 꾸준히 먹어보라고 하셨다. 전에 다니던 정신과에서 약을 처방받을 때는 이런 경고를 들은 적이 없어서 괜히 겁이 났다. 전에 먹던 약과 아예 다른 약이라서 더 세다, 약하다를 비교할 순 없지만 전에 먹던 약보다 용량적으로 더 세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말씀 주셨는데, 먹고 나니 개인적으로는 이번 약이 더 센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전에 약을 먹었을 때는 인데놀의 효과만 뚜렷이 느껴지고 그 외 달리 신체변화가 느껴지는 게 없었는데 이번 약은 초반에 복약할 때마다 신체변화가 너무 뚜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복약하며 느꼈던 일시적 부작용(?)은 아래와 같다.




졸리다는 느낌보다는 온몸에 힘이 쭉 빠져서 나른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몸에 힘이 없으니 걷는 데 자꾸 휘청거리고 어디 부딪힐 거 같은 느낌이 든다.

복약 직후에 머리 뒤 혈관이 조이는 느낌이나 파스를 붙인 거 같이 갑자기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집중이 잘 안 돼서 회사 업무만 간신히 소화할 수 있다. 복약 초반에는 출퇴근길 독서나 매일 하던 루틴을 다 지키지 못하고 빼먹기도 했다.

식욕이 떨어진다. 0.5인분 먹기도 힘들다.

저녁 약을 먹으면 너무 나른해서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다. 낮에는 일해야 하니까 어찌어찌 버티는데 저녁에는 10시 이전에 무조건 취침한다.




가장 뚜렷하게 느껴졌던 건 몸이 너무 나른하고 힘이 빠져서 걸을 때 자꾸 휘청거리게 된다는 거였다.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졸리다는 느낌은 피곤해서 졸린 느낌이라기보다는 몸에 힘이 안 들어가서 나른하고 무기력해지는 것에 가까웠다. 그래서 오징어처럼 흐느적흐느적 다니다가 나도 모르게 어디 부딪힐 것처럼 휘청거리기도 했다. 약 먹는 동안 내내 이러는 건가? 싶어서 약을 바꿔야 하는지 잠깐 고민도 했는데 한 2주 정도 먹었을 때부터 약을 먹고 나타났던 부작용들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두통약도 소화제도 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나는 약에 잘 적응했다.


의사 선생님께서 가장 중요한 불안은 어떤지 물어보셨다. 나는 확실히 덜 불안하다고 느꼈다. 전에 다니던 정신과에서 먹었던 약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심리상담도 받았고 인지행동치료도 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전보다 내면이 단단해져서 더 효과적이라고 느끼는 건지, 지금 먹는 약이 정말 더 잘 듣는 건지 좀 긴가민가하긴 한데, 어쨌든 전보다 불안이 훨씬 덜 느껴졌다.


예전에는 약을 먹으면서도 불안한 게 계속 느껴졌었다. 인데놀에 과도하게 집착했고 인데놀이 없으면, 인데놀의 약효가 떨어질 거 같은 시간이 되면 긴장되고 초조했었다. 그런데 이번 약은 똑같이 인데놀을 먹으면서도 그런 느낌이 없었다. 예전에는 약을 안 들고 나온 걸 알아차리게 되면 다시 집에 돌아갈 정도였는데, 이제는 그냥 웁시~ 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워졌달까?


회사에서도 매일 비슷비슷한 사람들하고만 마주치기 때문에 사회불안이 좋아졌는지를 테스트해 볼 일이 거의 없었는데, 얼마 전 새로운 거래처와 통화를 하면서 사회불안 또한 많이 좋아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안달복달하고, 긴장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난처한 질문이 들어오면 많이 당황했을 텐데 이제는 전화할 때도 여유가 생긴 느낌이었다. 전에는 내 안에 없었던 소위 ‘아님 말고.’라는 마인드가 생긴 것이다. 마음이 여유로워지니 땀도 나지 않고, 얼굴도 빨개지지 않고, 훨씬 차분하고 여유롭게 통화를 마치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창 정신이 피폐했을 때는 회사사람들이 다 나를 모함하는 것 같고,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 같고, 미움을 받는 것 같이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다. 심리상담을 받고, 주변 환경이 바뀌며 이 생각은 많이 나아졌지만, 빈도수가 떨어졌을 뿐 여전히 나는 억울함을 안고 직장동료들에게 화가 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약을 먹고 나니 동료들에 대한 분노가 눈에 띄게 사그라들었다. 아예 분노 자체가 거세되었다기보다는 동료들에 대한 관심 자체가 현저하게 떨어졌다. 애초에 관심이 가지 않으니 감정도 들지 않는 것이다. 약을 먹고 주변에 덜 과민해진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께서 약을 먹기 전 불안의 정도가 100이라고 하면 지금은 어느 정도로 느껴지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50 언더라고 대답했다. 약을 먹은 뒤로 회사를 다니면서 불안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은은하게 깔려 있는 나의 내면의 불안이 아직 50 정도는 차 있는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약에 적응도 어느 정도 했으니 불안을 더 잡기 위해 렉사프로 용량을 늘리자고 하셨다. 렉사프로 용량을 늘려서 전과 같이 약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씀도 해주셨다. 이미 불안이 많이 낮아진 것을 체감하고 있어서 렉사프로 용량을 늘렸을 때는 얼마나 더 불안이 낮아질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약을 먹기 시작한 뒤부터 집중력이 좀 떨어진 거 같다는 느낌이 든다는 거였다. 난 다른 사람이 한 말을 쉽게 까먹는 편이 아닌데, 약을 복용한 뒤부터 근 한 달 동안 “까먹었어?”라는 말을 다섯 번도 넘게 들은 것 같다. 문제는 내 입장에서는 그들이 한 말을 까먹은 게 아니라 완전히 처음 듣는 것 같이 느껴진다는 거였다. 일할 때는 크게 문제가 없었으나 가족들과, 친구들과 잡담한 내용들을 한 달 동안 정말 자주 까먹었다. 궁금해서 의사 선생님께 여쭤 보니 지금 먹고 있는 약이 집중력 자체에 영향을 주는 약은 아니라고 하셨다. 하지만 집중력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지금 약이 사람을 좀 늘어지게 하고 각성을 떨어뜨리는 면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집중력이 떨어졌다고 느낄 가능성은 있다고 말씀하셨다. 기존에 각성 상태가 너무 높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약을 통해서 이걸 떨어뜨린 건데, 집중이 덜 된다고 느끼는 지금 이 상태가 사실은 더 정상적인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게다가 오히려 불안이 잡히면 더 집중력이 높아질 수도 있다고 하니 당분간은 일시적인 효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꾸준히 약을 복용하며 우울과 불안을 잡는 데 몰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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