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치료는 실패했을까?
상담사 선생님의 “이제 사회불안 상담은 졸업해도 되겠어요.”라는 선고를 들은 후, 나는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몇 년 전 정신과를 다닐 때도 인데놀 덕을 많이 보긴 했지만 신기하게도 어떤 게 더 내면의 평화를 가져다줬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심리상담을 택할 것이다. 인데놀은 얼굴만 안 빨개지지 여전히 내 속에서 우울, 불안, 자기혐오가 들끓느라 속이 시끄러웠는데 심리상담은 여전히 얼굴이 빨개지긴 하지만 내 안의 감정들을 어느 정도 어루만져주고 나니 오히려 속이 고요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심리상담이 끝난 후에도 매일 감정일기를 쓰며 내가 느끼는 특징적인 감정들을 꼭꼭 씹어 소화해 줬고 정말 위장이 편안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음도 평온해졌다.
어제와 같은 오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들이 반복됐다. 심리상담이 끝날 무렵 주변 환경도 바뀌면서 더 이상 내가 모난 돌 취급받고, 스트레스받는 상황도 함께 사라졌다. 덕분에 나는 평범한 일과를 보내고 종종 얼굴이 빨개졌던 순간들에 대한 감정일기를 쓰며 매일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거… 지금 내가 나아지고 있는 게 맞나?’ 심리상담으로 해결책을 찾고 마음의 평화까지 찾은 것은 맞지만, 내 생각에는 근본적인 스트레스 요인(나를 모난 돌 취급하던 사람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내가 급격히 평온해진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내가 주변 환경이 변함없이 똑같았다고 해도 지금처럼 얼굴이 덜 빨개지고, 스트레스를 덜 받으면서 지낼 수 있었을까? 또다시 낯선 환경에 던져지고, 내가 미움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 조성되면 여지없이 스트레스에 취약해져 불안과 우울이 나를 잠식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때 문득 상담사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약물 치료받으면서 인지행동치료도 같이 병행했다면 효과가 더 좋았을 텐데.” 성격이 급해서 당장 내일이라도 얼굴이 안 빨개지는 결과를 얻고 싶었던 나는 또다시 약물의 유혹에 휘둘렸다. 인지행동치료는 이미 잘하고 있으니 의사 선생님 지도 하에 약물 복용까지 같이 하면 훨씬 더 빨리 사회불안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인데놀에 과하게 의존하고 인데놀을 남용했던 시절이 잠시 떠오르긴 했지만, 이번에는 인데놀을 처방해 달라고 선생님께 부탁드리지도 않을 거고, 그냥 의사 선생님께서 처방해 주시는대로만 약을 먹는다면…?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얼굴이 빨개지는 나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 나는 똑같이 그냥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일 뿐이다. 감정일기를 쓰며 인지행동치료를 하다 보면 결국 감정홍조의 빈도와 정도가 우하향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조금 더 빨리 찾아왔으면 싶었다. 내 성격이 급한 탓도 있지만 결국 남의 시선 의식하는 걸 버리지 못한 비겁함이 더 크다. 어쨌든 나는 매일 감정일기를 쓰는 판에 약물 부스터까지 맞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사회불안 증상에서 탈출하고 싶어서 다시 정신과에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효과를 제대로 보기 위해 가는 정신과였기 때문에 상담센터를 찾을 때 도움을 줬던 상담사 친구의 도움을 또 받아 사회불안 증상을 잘 보기로 유명한 정신과를 추천받아 갔다. 잘 보기는 정말 잘 보는지 예약부터 진료 대기까지 정말 박 터지게 치열했다. 환자가 하도 많아서 의사 선생님은 굉장히 지치고 사무적으로 보이셨지만 상처는 받지 않았다. 이제는 정신과와 심리상담센터의 차이를 확실히 알기 때문이다. 의사 선생님은 심리 검사 결과를 보시고 아래와 같이 진단하셨다.
사회불안 점수는 아주 높은 수준인데, 그냥 혼자 있을 때 불안 점수도 높네요.
우울감은 중증도 정도예요.
혼자 있을 때 불안이 높다는 건 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의사 선생님은 불안과 우울을 잡는 약을 하루에 세 번 먹도록 처방해 주신다고 하셨다. 전에 먹었던 약보다 세지 않을 거라고 하셨는데, 먹어본 결과 전에 먹었던 약보다 ‘나 약 먹었다!’ 하는 느낌이 훨씬 강렬하게 와서 대체 약이 세다, 세지 않다의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아무튼, 진료를 받으면서 궁금했던 거 없냐고 물어보시길래 요즘 내가 느끼는 증상들에 대해 몇 가지 여쭤봤다.
Q. 울 상황도 아닌데 말하다가 울컥하면서 눈물이 나는데 이게 우울증 때문인가요?
A. 가능성이 꽤 높다. 우울감이나 불안감이 평상시에도 좀 높은 편이라서.
Q. 화가 잘 나는 것도 우울증 때문인가요?
A. 그것 또한 가능성이 있다. 우울하고 불안해서 과민해져 있는 사람은 조금만 건드려도 터지니까.
Q. 사람들이 계속 저를 욕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욕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욕하지 않았을 거라고도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이 계속 들어요.
이것도 우울증 때문인가요?
A. 그 증상을 관계사고라고 하는데, 사회불안, 불안, 우울증이 원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전혀 다른 데서 기인했을 수도 있다. 일단은 불안, 우울을 먼저 잡아보자.
의사 선생님께서는 사회불안이 약을 먹는다고 치료되는 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사회불안을 예전에는 사회공포증이라고 했는데 이게 약을 먹어서 증상이 덜해질 수는 있어도 완치할 수는 없다고. 계속 부딪히고 적응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사람을 자꾸 피하지 말고 대화도 해보고 만나는 자리도 가 보면서 대면해 봐야 한다고 하셨다. 모든 책, 상담, 진료에서 같은 말을 하기도 하고, 내가 생각해도 사람을 계속 만나야지만 사회불안이 치료될 거 같다는 게 참 슬프지만… 뭐 어쩌겠는가. 사회불안 극복하겠다고 약도 먹고 상담도 다니고 심지어 글까지 쓰고 있는데. 꼭 전보다 나아져서 언젠간 나 같은 수줍보스들에게 하나의 귀감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