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가락 나의 상태
거의 한 달 만에 다시 글을 쓴다. 이전 글 ‘복약일지(1)’를 다시 읽어 보니 불안이 많이 떨어져서 희망에 가득 차 있던데 그 후 한 달이 지난 지금, 나는 그루밍 프로젝트로 간신히 잡아놓은 일상이 완전히 무너져서 현재 다시 재건 중에 있다.
어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약을 복용하면서 눈에 띄는 부작용에는 무리 없이 잘 적응했는데 부작용인가 아닌가 긴가민가한 무기력증에 빠져 한 달 동안 허우적대다가 이제 막 빠져나오고 있는 참이었다. 한 달 남짓 동안 나는 너무 무기력했다. 심리상담을 통해 만들어낸 감정일기와 그루밍 프로젝트를 통해서 날 잘 돌보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약물에 적응한 어느 시점부터 나는 점진적으로 무기력해지기 시작했고 뭘 하고자 하는 욕구는 바닥을 쳤다. 예전에 만들어 놓은 간단한 루틴들도 하기 싫을 정도였다. 나는 다시 정크푸드를 먹고, 새벽까지 숏츠를 보고, 이불속에만 처박혀 있는 삶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의사 선생님은 약 때문이 아닐 거라고 하셨지만 기억력, 집중력이 정말 현저하게 감퇴했다. 진짜 건망증이나 ADHD가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다. 사람들이 한 말을 처음 들어본다는 듯 계속해서 까먹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물건을 잃어버려서 끝내 못 찾은 물건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방금 하려던 말도 생각나지 않아 영영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지 못한 문장들도 여럿이다. 원래도 똑똑한 편이 아닌데 약을 먹은 뒤로 급격하게 더 바보가 된 거 같아서 두려움에 약을 끊고 싶은 충동이 올라올 정도였다.
불안장애, 우울장애 약이 효과가 없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최근 한 심리검사에서 내 우울증은 중등도에서 경도로 줄어들었고 불안감도 여전히 있긴 하지만 많이 감소한 상태였다. 전보다 덜 우울하다는 건 나도 생활하면서 알 수 있었지만 불안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결과는 의외였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우울감과 불안감은 많이 줄었지만 사회공포증 점수가 별로 줄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셨다. 오히려 우울감과 불안감이 이렇게 줄었는데 사회공포증 점수가 조금밖에 줄지 않은 건 사회불안이 더 세졌다고 볼 수도 있는 거라고. 확실히 사회불안은 체감하기에 전보다 늘어난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전에는 사회불안이 50% 언더로 줄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80% 정도로 늘어난 느낌.
의사 선생님께서는 우울과 불안은 약으로 어느 정도 교정이 되지만 사회공포증을 약으로 치료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셨다. 공포를 느끼는 상황에서의 순간적인 불안감을 줄여주는 역할은 하지만 사회공포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결국 내가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과 계속 부딪히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사람들을 대하는 게 편해질 정도로 반복하고 연습해야 한다고. (사람을 대하는 게 편해지다니… 죽을 때까지 그런 날이 올까 싶다만...) 아무튼 그래서 나는 하루에 세 번 먹던 약을 두 번으로 줄이고 조금 더 사람들과 부딪혀(?) 보는 연습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파워 I가 마음을 먹어봤자 주변에서 갑자기 새로운 사람들이 샘물 솟듯 솟아날 리 없었다. 집, 회사, 아는 친구들만을 반복해서 만나는 나의 일상. 내가 갑자기 대로 한복판에 나가서 프리허그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훈련을 해보기로 시작했다. 일단 회사에서는 내가 낯설게 느끼는 사람들에게 일부러 말을 먼저 걸어봤다. 처음에는 한두 마디를 하다가, 나중에는 어떤 콘텐츠에 대해서 대화다운 긴 대화를 나눠보기도 했다. 친구들을 만날 때는 자주 만나는 친구들 대신 연락만 하고 오프라인에서는 자주 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다. 때로는 친구의 친구나 애인을 만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분명 내게는 어려운 경험이고 당연히 뚝딱거리긴 했지만 보조적으로 약의 도움을 받아서 그런지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이전보다 훨씬 수월했다.
그리고 낯선 이들과 대화할 때 대화하는 콘텐츠에 집중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예전에는 ‘내 얼굴이 빨개지면 어떡하지?’, ‘내가 바보 같이 보이면 어떡하지?’하고 남이 보는 나에게 매몰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내 생각을 어떻게 더 전달력 있게 말할 수 있을지 생각했고, 상대가 말하는 걸 놓치지 않기 위해 경청하려 애썼다. 대화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자연히 내 홍조에 대한 생각은 저 멀리 귀퉁이에 처박히기 시작했다. 때로는 얼굴이 빨개지기도 했지만 셀프토크와 감정일기를 통해 이제는 빨개진 내 얼굴을 자책하지 않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너무 잘 보이고 싶은데 부정적 평가를 받을까 봐 얼굴이 빨개진 거구나, 내 몸이 나를 보호하려고 얼굴을 붉게 만든 거구나, 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자책하기보다는 다독이고 그러려니 넘어갔다. 약을 먹어서 전보다 얼굴이 훨씬 덜 빨개지는 거 같긴 하지만 약물을 인지행동치료와 병행하니 사회불안 탈출 속도가 훨씬 빨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약물의 힘 때문에 얼굴이 덜 빨개지는 거지만 조만간 내가 정말 다른 사람들처럼 대화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자신감이 생긴달까?
똑같이 인데놀을 먹고 있지만 예전처럼 ‘인데놀 없인 못 살아.’ 모드로 살고 있진 않다. 정말 딱 약물을 보조적으로 쓰고 있는 중이다. 한두 달 정도는 약물에 적응하느라 일상도 죄다 무너지고 아직 바보 같아지는 느낌이 있는 건 ing지만 의식적으로 다시 나 자신을 재건해 나가려고 노력 중이다. 일찍 일어나고, 먹는 음식을 신경 쓰고, 도파민 뿜뿜인 무의미한 숏츠들 대신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운동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그리고 약을 먹으며 낯선 세상에 한걸음 더 다가가려는 노력. 이 사소한 행동들이 나를 사랑하는 행동이고, 나를 더 사랑하게 되면 세상에 다가가는 게 훨씬 더 거리낌이 없어지지 않을까 싶다. 내가 나를 더 믿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