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고, 잘 먹고, 잘 싸기
아무리 익명이라고 해도 세상에 내놓기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내 사회불안과 감정홍조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 글을 한번 응모해보고 싶어서였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글을 보며 위로를 받았듯 나와 비슷한 증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내 글을 읽고 힘을 냈으면 했다.
지금 이렇게 매주 글을 업로드하고 있지만 내가 정신과와 상담센터를 다닌 시간은 생각보다 지난하고 길었다. 이 모든 일들은 약 5년 남짓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비교적 최근에 방문했던 심리상담센터의 상담사 선생님은 몇 회기의 상담 끝에 나를 사회불안 상담에서 졸업시키셨다. 사회불안과 감정홍조 관련해서 알려줄 건 다 알려줬고 내가 가이드대로 너무 잘 따라 하고 있으니 이젠 스스로 훈련하면서 얼굴이 붉어지고 땀이 나는 신체 반응의 빈도와 강도가 점차 우하향하기를 기다리면 된다고 하셨다.
비싼 가격의 상담이 빠르게 종료된 건 기쁜 일이었지만 더 이상 전문가에게 의존하지 못하고 내가 다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동안 내가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 비용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상담센터를 그만둔 후에도 매일매일 셀프토크를 기반으로 한 감정일기(를 비롯한 다른 일기들)를 열심히 썼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강박적으로 쓰려고 노력했다.
이전 글에서 나는 육체적 재건과 정신적 재건을 위해 그루밍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 했는데, 그루밍 프로젝트는 별거 아닌 거 같아 보였으나 내게 생각보다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줬다. 건강은 말할 것도 없고 정량적으로 측정하기 힘든 기분과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 또한 달라졌음을 눈에 띄게 체감할 수 있었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싸고. 어른들이 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젊은이들은 등한시하는 이 덕목들이 왜 그렇게까지 중요한지, 잘 자고, 잘 먹고, 잘 싸보고 나니 알겠다. 새벽에 자서 새벽에 일어나 되는 대로 음식을 먹던 나는 장누수를 의심할 정도로 설사에 시달리고 온몸이 피부 발진과 여드름에 뒤덮였었는데, 매일 늦어도 10시 전에 잠들고, 아침 일찍 일어나고, 한식 위주로 규칙적인 시간에 적당량의 밥을 먹고 나니 이 모든 불편함들이 서서히 사라자기 시작했다. 심지어 플러스알파의 효과로 피부가 좋아졌고, 욱신거리던 관절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고, 이제는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배란통과 생리통과 관련된 통증이 아예 사라져 버렸다. 몸이 불편한 곳이 없으니 성미가 곤두서지 않았고 늘 은은하게 깔려있던 신경질적인 성격이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일기는 나를 현재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 줬다. 현재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게 됐고, 현재의 즐거움, 행복함, 안락함, 평온함 등에 대해 진심으로 감탄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됐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 다른 사람이 하는 것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곤 했는데 일기를 쓴 다음부터는 기록을 하기 위해서라도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늘어서 다른 사람보다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주변 사람, sns에 나오는 사람이 아닌 ‘내’가 오늘 뭘 먹고, 뭘 입고, 누구를 만났고, 뭘 했고를 기록하는 동안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하고 싶어 하는 것 등에 대해 더 잘 알게 됐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게 되고 나니 내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들을 선택하는 것은 쉬웠다. 내가 기분이 좋아질 만한 것들을 선택하고 그것에 나를 자주 노출시킴으로써 나를 점점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었다.
감정일기를 처음 쓸 때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는데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나? 이걸로 변화가 있을까?’라는 불신이었다. 하지만 얼굴이 빨개질 때마다 감정일기를 쓰고 나니 반복적으로 나오는 나의 핵심 신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반복해서 나오는 나의 잘못 형성된 핵심 신념은 아래와 같았다.
나는 완벽해야만 해.
나는 모든 것이 부족한 사람이야.
사람들은 나를 무시해.
얼굴이 빨개지고 식은땀이 나는 상황마다 나는 셀프토크를 하며 감정일기를 썼다. 그때 왜 당황했을까? 왜 부끄러웠을까?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왜 그런 감정을 느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묻고 ‘왜?’라는 질문을 반복하다 보니 위와 같은 세 가지 핵심 신념이 반복적으로 나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실 이 핵심 신념들은 지금 봐도 그렇게까지 틀렸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게 바꾸기 쉽지 않은 신념들이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감정일기를 쓰고 핵심 신념을 찾아내는 과정을 하다 보니, 정말 과연 내가 그렇게까지 부족한가?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가?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상담 예능 프로그램들을 즐겨 보는 편인데, 그런 프로그램들을 보면 나와 비슷한 출연자들이 종종 있다. 그들은 자기만의 핵심 신념에 너무 깊게 빠져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변을 쉽게 돌아보지 못한다. 상담사와 패널들이 그게 틀린 거라고 지적을 해줘도 출연자는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 그때는 비슷한 상황인 나조차도 속이 답답하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나도 저렇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도 주변에서 ‘너 그렇게까지 부족하지 않아.’, ‘사람들은 너를 무시하지 않아.’라고 말해줄 때마다 저것도 나를 위로하기 위한 빈말이지 진실이 아닐 거야, 하고 타인의 진심을 의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런 게 거울치료일까? 그 출연자들을 보니 내가 완전하다고 생각했던 내 핵심 신념 또한 남들이 보기엔 별거 아니고, 부술 수 있는 것이고, 부수고 나오면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생각을 가져도 사람은 관성의 힘에 크게 끌리기 때문에 사람이 당장 다음날부터 위풍당당하게 변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나도 변할 수 있다, 내 핵심 신념이 틀릴 수 있다는 믿음을 나의 새로운 핵심 신념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다 보면 부족하고 무시당하기만 하는 나의 핵심 신념에도 균열이 가고 산산이 부서지는 기회가 오지 않을까?
지금 내가 생각했던 핵심 신념들에 균열이 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과 대화할 때 얼굴이 빨개지고 식은땀이 난다. 그 빈도와 강도를 따져보면 내가 느끼기엔, 상담을 하면서 많이 줄어든 것 같지만, 객관적으로 측정을 해본다면 전과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그것들을 어떻게 느끼느냐에 있는 것 같다.
나는 확실히 전에 비해 얼굴이 덜 빨개지는 것 같다. 그리고 얼굴이 빨개질 때마다 죽고 싶고 숨어버리고 싶기보다는 교감신경계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활성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내 몸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라고, 나는 생존에 유리하고 최적화된 몸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단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데는 살짝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내가 지금 불편함을 느끼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당황스럽기는 할지언정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는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이런 훈련들이 나의 사회불안과 감정홍조를 조금 더 의연하게 안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사회불안으로 사람들을 만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약간의 이상함을 의연히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