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보다 더 큰 가치

by 이윤지

헌혈의 집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시절, 나는 수많은 헌혈 이상의 가치를 마주했다.


#

주말이면 가족 단위로 함께 헌혈하러 오는 분들이 종종 있었다. 보통은 아빠가 헌혈하고, 엄마와 아이들이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은 부부가 함께 헌혈하는 모습도 있다. 그중에서도 유독 인상 깊었던 한 가족이 기억에 남는다.


한 아버지가 오른팔에 바늘을 꽂고 채혈 중이었다. 잠시 뒤,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했다.


“간호사님, 혹시 바늘 보이는 부분을 밴드로 살짝 가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이에게 헌혈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바늘을 보면 혹시 무서울까 봐요. 헌혈이 무서운 게 아니라 좋은 일이라는 인상을 남기고 싶어요.”


그 말 한마디에 아이를 향한 깊은 배려가 묻어났다. 요청대로 조심스럽게 밴드를 덮어드렸고, 잠시 후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OO야,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병원에 있는 친구들이랑 동생들 본 적 있지?”

“응.”

“아빠가 지금 이렇게 헌혈하면, 이 피가 그 아픈 친구들에게 전해지는 거야. 우리 OO이도 나중에 크면 아빠랑 같이 헌혈하자. 우리가 이렇게 도와줄 수 있는 거야.”

“우와 우리 아빠 진짜 멋지다!”

그 장면을 지켜보며 마음이 저절로 따뜻해졌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나중에 나에게도 아이가 생긴다면, 나는 저 아버지처럼 할 수 있을까? 아이에게 무엇을, 어떤 마음을 물려줄 수 있을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전하는 가르침, 그것이 얼마나 큰 울림을 주는지 느꼈던 순간이었다.


#

또 다른 기억도 있다. 만 16세가 되어 처음 헌혈하러 온 학생이 있었다. 살짝 긴장한 듯하지만 설레는 얼굴이었다. 옆자리에서 헌혈 중이던 중년 여성 헌혈자는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핸드폰을 내게 건네며 사진을 부탁했다. 내가 당황하자 학생이 웃으며 말했다.


“저희 엄마세요.”


알고 보니 어릴 때부터 엄마가 헌혈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 아이였고, 자신도 ‘나도 크면 헌혈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첫 헌혈의 순간, 그 마음의 시작이었던 엄마와 함께 오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 둘의 얼굴엔 자랑스러움과 사랑이 가득했고, 그 장면은 내가 본 가족 중 가장 아름다운 닮음이었다.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닌, 삶으로 전해진 진짜 유산 같았다.


#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은 많다. 물질만이 전부는 아니다. 부모의 행동 하나하나가 아이에게는 교과서이고, 삶의 기준이 된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본 것이 그 아이의 마음과 태도를 만든다. 아이 앞에서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헌혈의 집에서 수없이 마주한 가족들을 통해 배웠다.


내가 헌혈의 집에서 배운 건 단 하나, 아이에게 가장 큰 사랑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이가 자라며 묻는다면,

“엄마, 나도 멋진 어른이 될 수 있어요?”


나는 웃으며 말해줄 것이다.

“그럼, 우리 오늘도 누군가에게 작은 희망을 나눴잖니.”

keyword
이전 11화네가 희귀병인 걸 알게 되는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