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하는 날 축사

by 이경주

나는 축사하러 간다. 이른 봄 화창한 날씨 그래도 좀 춥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늦을 세라 서둘러 집을 나섰다. 마침 장소는 서울, 버스로 30분 정도 멀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가까운 거리는 나를 더욱 초조하게 했다. 언젠가 달리는 부산행 KTX 열차에 동료들과 동반 석을 차지하고, 2시간 이상 행사 준비에 골몰했던 생각이 난다. 오늘도 급한 마음에 버스 타고 축사 준비하려고 했다. 그러나 요동치는 버스 도저히 불가능했고, 눈 깜빡할 사이 정류장에 도착했다. "어머나 벌써!" "어쩜 좋지!?" 축사는 결코 만만한 게 아닌데, 보통 축사 한번 하려면 온갖 심려를 기울여 긴장 상태로 몇 날 준비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긴장이고 뭐고 그냥 백지상태로 왔다.


운치 있는 넓은 교회 꽉 찬 여자들이 화기애애한 분위를 만들어 내고 있다. 오늘은 여전도회 연합 수련회다. 희망찬 눈빛 저마다 은혜를 받을 준비에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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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회장으로부터 받은 전화는 2006년 3월 여전도회 연합 수련회에서 할 축사 건이다.

순서 맡은 사람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차질이 생겼다고 축사를 맡아 달라는 다급한 요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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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랐다, 동시에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뭐? 축사라고?" "지금 축사하러 다닐 때가 아닌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이사하는 날이잖아! "이건 또 뭐야 그럼 그렇지 하지 말라는 암시다. 평소 같으면 벌써 흔쾌히 승낙했지, 1년에 한 번 있는 연합 수련 회 연중 가장 크고 중요한 행사다.

축사 역시 귀한 순서다."얼마나 큰 영광인데"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상상도 못 할 환경의 변화로 터질듯한 분노와 까칠하고 강퍅 한 심성으로 변한 나 다. 누구든 나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 코 닥친다. 옛날 영화 제목 "이유 없는 반항"(제임스딘 나탈리우드 주연) 이 생각난다 바로 그 짝이 되어버렸다. 그저 누군가 에게 분 풀 이 하고 싶은 심정, 이런 사람이 경건한 자리에서 어찌 축사를 한단 말이냐! "그럴 순 없어하면 안 돼"

너무 아쉽지만 완강히 거절했다. 내 심정을 알 턱이 없는 그는 전화를 끊지 않고 재차 부탁한다. 물론 회장의 입장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 그 형편을 잘 아는 난 더 이상 거절 못하고 일단 승낙은 했다. 하지만 내심 더 큰 이유가 있지 "주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게 부담은 더 크고 극도로 긴장된다.


"우리 이사하는 날이라 못 가요"

한마디 했으면 될 것을 뭘? 숨기려고 전전긍긍하는 어리석은 내 꼴!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행복했던 우리 가정에 하루아침에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 70 이 다된 늙은이가, 쫓기다시피 이사하는 날이다. 얼마나 비참하냐! 내색도 못하는 무 표정, 백만 불 자리다. 나는 빛 좋은 개살구,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다만 한 가지 "주님"의 일이기에 결국 순종이 아닌 복종으로 대처했지만, 어쨌든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개회 예배로 시작 오전 오후에 걸쳐 진행한다. 내 차례는 오전 마지막 순서다. 준비를 못했으니 긴장과 염려 속에 떨고 있다. 그래서 강사의 내용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근데 이게 웬일!? 서적을 통하여 알게 된 K목사가 강사가 아닌가! 독자와 작가로 존경하는 분이다. 매우 반가운 일이다 너무 반갑다. 물론 강사는 나를 모른다. 근데 왜 이렇게 더 떨리지!? 침착해야 할 난 갈피를 못 잡고 마구 허둥댄다. 겨우 겨우 억제하고 부동자세로 앉았다. 숨을 죽이고 강사를 뚫어져라, 귀는 쫑긋, 오직 축사의 주제를 끄집어내기 위한 절박한 심정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고 있다.


그때 번뜩 떠오른 생각과 동시에 눈앞에 뭔가 아른거린다. 놓일 세라 앞에 있던 순서지 여백에 얼른 끼적였다. 간단명료한 단어가 보였다. 그동안 생각했던 것 과는 전혀 다르다. 마치 누군 가가 불러 주는 것을 받아 적은 듯하다. 하, 둘, 셋 축사의 주제가 종이 위에 적혔다.


포착, 근면, 지혜


이윽고 축사 시간 내 이름 석 자가 불린다. 떨고 있던 조금 전과는 다른 평온함이 온몸을 살포시 그러나 힘 있게 감싸 주는 느낌이다. 가슴을 펴고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강단 위로 올라왔다. 그때 시야에 들어온 5. 600여 명의 눈망 울, 큰 선물을 기대하듯 나를 따사롭게 응시하다. 가슴이 뭉클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어떤 말들로 그 시간을 채웠는지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축사가 끝난 후, 힘 있는 ‘아멘’의 화 답과 함께 우레와 같은 환호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잘했나!? 혹시 실수는?" 하는 우려도 잠시.


예배가 끝나기 무섭게 여인들이 내게 몰려와 덥석 껴안고 야단들이다. 감동이다,


멋졌다, 은혜받았다는 등 칭찬을 아끼지 않고 내 주위를 둘러쌓다. "정말 잘했나?"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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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곁에서 서로 돕는 어느 선배는, 만족한 표정 조용한 어조로, "그 어느 때보다 멋진 축사였다"


큰 감동받았다며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등을 토닥토닥거리다.


고마움에 콧등이 시큰 울컥 눈물이 났다. 이런 기분 처음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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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에 인색한 후배마저 도 기분 좋은 한마디 거들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 다더니. 정말 나도 그런 기분인가 보다.


유대인의 탈무드에서는 칭찬은 말의 선물이라고 하는데, 난 오늘 선물을 한 아름 받은 셈이다.


사실 축사는 내가 한 것이 결코 아니다. 신이 순종 하는 자를 도와주신 것이다. 그래 맞아! 이젠 안도의 숨을 쉬게 되었다. 이렇게 축사는 무사히 끝났고 나는 이사하는 집으로 달려가다.


나중에 알았지만 강사도 축사 잘했다고 칭찬했데요, "믿거나 말거나"


먼 훗날 세상에 내 책이 나온다면 그때야 비로소 누군 가가 내 눈물을 딱 아 주겠지 그때 그랬구나!


벅찬 내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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