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13등 했다!!!"
순간 엄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니는 지금 그걸 잘했다고 말하는 거가.."
국민학생 2학년이던 어느 날
성적 개념조차 없었던 나는
처음 시험을 보고 13등을 했다.
한 반에 50명 정도 있었으니
내 기준으로는 꽤 괜찮은 성적이었다.
신나서 엄마에게 말했는데
엄마는 친구들 앞에서 나를 부끄러워하는 듯했다.
그때 알았다.
'13등은 자랑하면 안 되는 거구나..'
그 이후로 나는 문제를 풀고 정답을 맞히고
점수를 따지고 등수를 신경 쓰며 살아갔다.
9살의 나는 그렇게 평가라는 틀에 길들여졌다.
열세 살 무렵, 학원을 다니던 시절
꾸준히 공부 덕분에 좋은 성적을 냈고
자연스레 우등생이라 불렸다.
어느 날 학원 선생님이 아이들을 불러모아
분식파티를 열어주셨다.
그리고 재미 삼아 풀어보라며 수학퀴즈를 냈다.
나는 도무지 풀 수가 없어 괜히 다시 물었다.
"아 그러니까 지금 000을 구하는 문제인 거죠?"
선생님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맞아. 그걸 물어보는 걸 보니 니나는 이미 푼 거 같은데?"
그 순간 나는 "모르겠어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대신 알지만 굳이 말하지 않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만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이상한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이후로도 나는 '정답'과 '평가'에 묶여 살았다.
하지만 최근에서야 알았다.
내가 믿던 정답들이
사실은 유일한 답이 아니라는 걸.
아마도 내가 옳다고 주장하던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순간,
그들의 시선을 마주하며
"아... 아닌가..."
하고 흔들리며 알게 된 것 같다.
세상에는 정답이 없었다.
정답이 없으니 틀리는 것도 없고
나와 너는 다르니
다른 답을 내놓는 게 당연했다.
그걸 깨달은 이후부터
나는 서로 다른 답을 찾는 일이 즐거워졌고
정해진 답을 구하라는 문제가 불편해졌다.
어느 날 누군가 퀴즈를 내고 사람들은 이 답 저답을 외쳤다.
출제자는 웃으며 말했다.
"땡! 틀렸어!"
정답은 이거야!
그때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네가 땡!
이 세상에 땡이 없는데
땡을 외치는 게 땡이지.
이 깨달음은 손자병법 계편의 가르침과 닮았다.
손자는 “형세에 맞추어 움직여야 한다”라고 했다.
전장은 늘 변하고, 승리의 길은 한 가지로 정해져 있지 않다.
순간마다 달라지는 지형과 형세에 맞추어
답은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
삶도 다르지 않다.
하나의 정답을 고집하기보다
변화에 따라 생각을 바꾸고,
상황에 맞게 길을 찾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전략이다.
박웅현 작가의 『여덟 단어』에 이런 대목이 있다.
대한민국은 인풋 중심의 교육을 하고
외국은 아웃풋 중심의 교육을 한다.
인풋에 바탕을 둔, 정해진 해답.
아웃풋에 바탕을 둔, 나를 드러내는 해답.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우리는 혹시 이 교육 때문에
점점 더 좁은 ‘우리’ 속에 갇혀온 건 아닐까.
다음 중 정답은 무엇일까요?
1번
2번
3번
4번
5번
이 질문이 이제는 낯설어졌으면 좋겠다.
모두가 ‘정답 없음’을 자유롭게 누리고
서로의 생각을 자신 있게 드러내며
따뜻하게 들어주는 시간.
정답을 찾는 학교보다,
다름을 배우고 행복을 배우는 학교가
점점 더 많아지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