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 어느 날,
당시 남자친구가 조용히 말했다.
“난 니 말투가 너무 싫어.”
그 말뜻이 처음엔 잘 와닿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 내 경상도 억양이 싫구나' 싶었다.
그때 새로 옮긴 직장에는
말도 예쁘고 행동도 조심스러운 동료가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 부탁할 때마다
“미안한데~~” 하며 살며시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가 지나간 자리엔
늘 어지러운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책상 위 남겨진 간식 쓰레기며,
환자의 땀과 각질이 묻은 채 치워지지 않은 장비들.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미안해서 하는 말 맞아?
말만 예쁘면 무슨 소용이야.”
그때 나는 말의 무게를 알지 못했고,
그저 말투만 보고 판단했다.
시간이 흘러 10여 년이 지났다.
연애는 점점 뜸해졌고,
어떤 만남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다 얼마 전 소개팅에서
나보다 한 살 많은 말끔한 남자를 만났다.
그는 짧은 시간에도 나를 참 좋아했고,
낯간지러운 말들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나는 그 마음에 기대며 말했다.
“그래, 한번 만나봐요.”
하지만 연애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사소한 일에 나는 그에게 화를 냈다.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내 입장과 생각을 또박또박 설명했다.
그는 당황한 나를 달래려 했지만,
끊이지 않는 내 화를 견디지 못하고
말없이 멀어져 갔다.
며칠 뒤, 그는 말했다.
“안 될 것 같아.”
그 한마디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 사랑받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
한순간에 등을 돌린 것은
분명 내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였다.
며칠 밤을 고민하다가,
친한 친구에게 눈물 섞인 다짐을 했다.
“나, 꼭 고칠 거야. 꼭.”
나는 더 이상
불덩이를 던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손자병법 시대, 사람들은 불로 싸웠다.
‘화공’이라 불린 그 불은
한 번 붙으면 모든 걸 태우는 무서운 힘이었다.
바람이 조금만 틀어져도,
그 불은 아군까지 삼켜 버렸다.
그래서 손자는 말했다.
이익이 없으면 군대를 움직이지 말라.
전쟁이 내게 득이 되지 않으면 화공을 쓰지 말라.
급하지 않으면 싸움을 피하라.
분노의 말도 화공처럼
내가 지키고 싶은 모든 것을 태워 버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뒤
나는 조금씩 말을 조심하게 되었다.
말하기 전에 상대를 살피고,
몸짓, 눈빛, 숨결,
그리고 잠시 머무는 침묵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이
그 속에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다.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고고는 부츠가 벗겨지지 않아 괴로워하며 디디에게 화를 낸다.
디디는 조용히 말한다.
“이 세상에 고통받는 게 너 하나뿐인 줄 아냐?”
잠시 뒤, 고고가 조심스레 묻는다.
“너도 아팠냐?”
디디는 대답한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냐?”
아팠지만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던 디디,
도와달라고 말했지만 닿지 않았던 고고였다.
서로 다른 곳을 향했던 자신들의 대화를 곱씹으며
고고와 디디는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의 대화 속에는
말보다 더 많은 것들이 숨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읽지 못할 때가 많다.
말에만 매달리다
더 큰 감정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이제 조금 알 거 같다.
정확히 말을 건넨다고
서로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말하지 못하는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
진짜 이해라는 것을.
말은 무겁고 강한 무기다.
한 때 나는 겁 없이 불덩이를 던졌지만
이제는 달라지고 싶다.
두 손에 작은 촛불을 들고
조심스레 상대의 마음을 비춰보고 싶다.
삶이라는 전장 속에서
더이상 태우는 불이 아닌
비추는 불을 선택하고 싶다.
그 촛불로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는 사람,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