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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Nov 04. 2024

그녀에게

11. 나도 여자랍니다. (2)

그녀에게도, 첫사랑이 있었더랬다.

둘째 외삼촌의 친구이자, 당시. 경주 불국사 옆 호텔 지배인으로 근무했던 남자.


경주 바닷가에서.. 알록달록한 꽃무덤 속에서.. 불국사 앞에서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몰래) 카메라로 담던 남자.


"그 오빠야가 내 시집가고 얼마 뒤에, 집으로 내를 찾아왔더라대"

그녀가 어느 날 문득, 꺼낸 말이다.

"물레방앗간 가서 확!! 손이라도 잡아 보지 그랬어?!"

나의 우문에

"어.. 했다.. 뽀뽀.. 그 오빠야 캉"

그녀의 현답을 듣고, 나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를 그토록,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카메라로 담던 남자,

그녀가 시집간 사실을 모른 채, 그녀를 찾던 남자.

첫사랑 그 오빠야 한테 시집을 갔더라면.... 어땠을까?!

나의 그녀는.. 행복했을까?!



"우르르 쾅!!"

무섭게 폭풍우가 내리치던 밤이었다.


"쾅!!"

탁자를 부러트릴 듯 내리치는 두 주먹.

"인자.. 고마하고.. 이혼해라!!"

거의 한 달 가까이, 시골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시커먼 아부지를 기다렸다.

그리고, 오장육부 아니, 저 아래 똥꾸녕에서부터 올라오는 기를 모아

수만 번. 준비하고 준비했던 문장을 드디어, 뱉어냈다.


'이제.. 아부지가 대답할 차례다' (나는 이날, 맞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는 나의 불타는 눈빛에... 시커먼 아부지는 그저 기가 막히다는 눈빛으로 응대했다.

(마치, 어린 시절 내가 주워 온 딸이라고 글짓기를 한 걸 본 그날처럼 말이다.)

"우리 학비.. 생활비만 아부지가 대 주고, 엄마캉은 이혼하고 보지 마라. 더 이상 지옥같이 이렇게 살지 말잔 말이다. 내 말 몬 알아듣나?!"

이제 갓, 열아홉 살 된 딸의 당돌하다 못해, 못돼 처먹은 말에 대답 대신,

시커먼 아부지는 돼지갈비만 앞 뒤로 뒤집으며 먹지도 못하게, 시커멓게 익히고만 있었다.


그녀가 마련한 자금으로 김해와 마산 사이를 오가는 시외버스를(당시 현금 장사)를 몰던

시커먼 아부지는 주머니에 돈이 생기자,

신나게 보험 여자들을 갈아타가며,

보험을 들고, 신혼여행 가고, 해약하고를 반복하는 '잽'을 날리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그저.. 참아줄 만했다.

하지만, 내 입에서 "이혼"이란 말이 나올 당시엔

마산 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진주식당'(백반집)을 하는 여자와 살림을 차린 지 6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잽'이 잦아지면 '훅'이 될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상황은 심각했다.

당시, 대학생이던 언니와 고등학생이던 나. 막내까지.

그녀 혼자 벌이로,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진주 식당' 여자와, 동거를 시작한 시커먼 아부지는 아예, 생활비를 십원도 주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는 늘 숨이 턱까지 차오른 듯한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마!! 이혼하고 각자 행복을 찾아라. 이 말이다."

"시끄럽다. 마!!!"

그렇게, 시커먼 아부지와 나는 서로를 똑바로 마주한 채,

얼마나 시간이 간 줄 몰랐다.


지난밤,

나는, 이불속에서, 그녀가 마산 '진주 식당'을 찾아갔더라는 말을(그녀와 언니와 대화) 엿들었다.

가서, 그 여자 머리채라도 잡고 흔들어 놓고 온 줄 알았다.

하지만, '진주 식당' 여자와 다정히 마주 앉아 행복해하는 나의 시커먼 아부지를

창문 너머로... 가만히 서서 마치, 가마니처럼 구경만 실컷!! 하고 왔다고 했다.


'아놔!!'

그래서.. 그날, 내 안의 화산이 폭발했던 것이다.

늘 우리가 필요한 돈보다 적게 주는 그 쩨쩨한 돈이라도 내놓고,

당신은 그 여자한테 가서 행복하라는 내 말을

그날 밤, 나의 시커먼 아부지는 끝끝내.. 못 들은 척했다.





내 한 손에 딱 들어갈 만한,

주먹보다 조금 작은 돌멩이를 교복 상의 주머니 속에 항상 넣고 다녔다.

그리고, 늘 빠른 길 대신.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당시, 대학 준비로, 마산 입시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그래야, '진주 식당' 앞을 지나갈 수 있으므로.


나의 "이혼" 협박에도 아랑곳없이.

'진주식당' 여자와 알콩달콩 신혼살림을 이어가던 아부지가 집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은 지

그렇게 또 한 달이 흘렀다. (쌀이 떨어져서 외상을 하러 간다고 집을 나서는 그녀를 본 뒤였다.)

그래서, 우야든 둥 다른 방도를 생각해 내야 했다.

수 없이 '진주 식당' 앞을 오가도 볼 수 없던 아부지의 그녀.

나는 늘, 주머니 속 돌멩이를 만지작 거리며,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하며,

'진주 식당' 유리창을 깨버릴(겨우 생각해 낸 방법이다. 어휴!) 디데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조금 넘던.. 어느 날.

드디어, 나는.. 젖 먹던 힘을 끌어 모아,

내 주머니 안 돌멩이를 끄집어내는데 까지 성공했다.

마침내, 야구 선수처럼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고 가볍게 팔을 뒤로 제껴 이제 던지기만 하면, 되는데...

그 순간!! 그 여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평화롭게... 빗자루로 식당 앞을 쓰는 여자..

곱게 묶은 머리.. 발목까지 하늘거리는 치마. 몸에 착 달라붙는 셔츠...

연예인 누군가를 닮은 하얗고 조막만 한 얼굴...

헉!!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랬다. 나의 시커먼 아부지는 어디서 예쁜 여자들 꼬시는 학원이라도 다닌 듯.

세상 예쁜 여자들만 골라서, 연애를 했던 것이다.)

'진주식당' 그녀가 무슨 일이냐는 듯, 허리를 들어 나를 돌아봤다.

순간, 그녀의 시선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지는 나의 시선들을 느끼며,

얼른 돌멩이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마치, 호떡집에 불난 거 끄러 가는 사람처럼 후다닥 도망치고 말았다.

제기랄...


그렇게 일 년 여가 흘렀고,

시커먼 아부지는 '진주 식당'에 사다 나른 물건들 중 일부를 챙겨 컴백홈했다.

그중 제일 비싸고 신기했던 건 '창문형 에어컨'이었다.

(당시에는 시골에 에어컨 있는 집이 없었으므로)


나의 시커먼 아부지는 우리 벽을 뚫고 창문을 에어컨을 달며

사랑에 패배해 쓰러져 우는 남자처럼

'왁왁' 화를 내며, 그녀에게 분풀이를 해댔다.


"저.. 낙동가에 느그 아부지 빤스를 갖다 태았어. 점쟁이가 와서 굿도 하고.. 그라니까네 돌아오긴 했네.

그 점쟁이 용하다"


실패한 사랑에 슬퍼, 술에 절은, 시커먼 아부지가 냅다 엎어버린 상을 치우며 그녀가 말했다.

순간,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며,

그녀가 시집간 후.. 그녀를 찾아온

그녀의 첫 사랑.. 그 남자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노을이 지는 저녁.

그녀가 살던 집 대문을 조용히 밀고 들어서는 길고 부드러운 손.

하얀 와이셔츠에. 검정 면바지를 입고

그 아래. 하얀 컨버스화를 댄디하게 신은 남자.

머리는 짧게 잘라. 포마드 기름으로 단정히 빗어 넘긴듯해 보인다.


인기척에 슬리퍼를 끌고 나온 그녀의 둘째 오빠

"니 몰랐나?! 우리 영희.. 시집갔다. "

그녀의 둘째 오빠의 한 마디에.. 길고 긴 노을을 배경 삼아

마당 한편에 망연자실 서서,

면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짚어넣은 채

하늘만 올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뱉는

그녀의 첫사랑... 그 남자의 뒷모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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