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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드 입은 코끼리 Nov 10. 2024

그래서 뮤즈라고?

소설:둘이 서로가 뮤즈가 되다. 

솔은 2주를 꼬박 기다리면서 지냈다. 하루하루 솔의 일과 중 하나는 자신의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고 꼭 숫자를 세는 것이었다. 2주가 금방 지나가기를 바라며, 곧 송화와의 만남을 기다렸다. 그러나 생각보다 시간은 빨리 지나가지 않았다. 현실에 치여 동사무소에서 민원을 받느라 바빴고, 그 사이에 있었던 축제도 있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루가 너무 고될수록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갔다. 집에 와서 낡은 침대보를 어루만지며 누울 때마다 송화를 만날 날을 기다리며 바닷가의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들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송화도 마찬가지였다. 밀려있던 웹툰 외주가 끊이지 않았다. 컷당으로 받는 수당이 조금씩 올라가자, 이때다 싶어 일을 몰아붙였던 송화였다. 자신의 그림체는 점점 잊혀지고, 더 상업적인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림은 마치 '카드캡터 체리' 같은 순정만화 스타일로, 눈은 커지고 몸은 늘씬하며 비현실적으로 큰 얼굴을 그리게 되었다. 그러던 중, 문득 2주가 지났는지 궁금해 달력을 보았는데, 솔과의 만남이 채 3일도 남지 않았던 것이다.


송화는 당황했다. 오늘만큼은 일을 빨리 끝내고 자신의 그림을 그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부터 시작해 저녁 9시까지 화장실에 몇 번 갈 뿐, 계속 그림을 그렸다. 10시가 되어서야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송화는 빈 캔버스를 가지고 와서 앉았다. 그리고 상상 속의 솔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송화는 우선 솔의 눈동자를 위주로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솔의 커다랗고 아름다운 눈은 마치 바다를 담고 있는 듯해, 눈 속에 바닷가가 흘러나오도록 초현실적인 화풍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그 눈 안에는 갈매기와 파도가 담겨 있어야 했다. 그래서 연필로 구도를 잡을 때부터 갈매기부터 그렸다. 솔의 눈 속에 담긴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몇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다 보니 어느새 자정이 되었다. 눈의 밑그림을 완성하고 나서야 송화는 잠을 청했다. 자신이 솔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행복이 가슴에 가득 차올랐다. 그렇게 잠에 들었다.


솔과 송화는 약속 시간에 정확히 맞춰 만났다. 그들은 이번에는 사곡 해수욕장에서 만났다. 늦은 밤이라 사람들은 물속에 없었다. 바닷바람이 워낙 세서 듬성듬성 사람들이 앉아 바다를 보고 있었다. 송화와 솔도 그런 자연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그저 보고만 있었다. 송화는 갑자기 붓을 꺼내 들고 바다를 그리기 시작했다. 솔은 그런 송화를 내버려 두었다. 그가 자신의 예술 세계에 몰입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솔은 그 동안 자신이 가지고 온 카메라를 들고 파도의 결에 맞춰 섬세하게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서로 약 40분 동안 말없이 있다 보니 바람이 더 거세져 몸을 녹이러 들어가야만 했다.
"우리 들어갈까요?"
송화가 점잖게 물었다.
"네, 좋아요. 저기 있는 카페에 가도록 해요."
그들은 몸을 녹이러 오래된 카페로 들어갔다. 해수욕장 바로 앞에 있는 유일한 카페였다. 다방처럼 낡은 냄새가 났고, 손님들은 쌍화탕을 즐겨 마시는 분위기였다. 에어컨은 90년대에 산 것인지 먼지가 가득했고, 벽면은 가짜로 붙여진 연예인 사인들로 가득했다.

"오늘은 어떤 그림을 그렸어요?"
"저는 오늘 약간 추상적으로, 대생 연습하듯이 파도의 역동성을 그려보았어요."
송화는 파란색 연필로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다. 파도가 일렁이는 듯한 모습이 파랗게 표현된 그림이었다. 옆으로 보거나 앞으로 보면 파도가 뒤에서 움직이기 직전의 모습처럼 보이는, 파도의 역동성이 다양한 방면에서 느껴지는 멋진 스케치였다. 송화는 재능이 타고난 사람이었다.

"솔님, 어제 솔님을 생각하며 그린 그림이 있어요. 오늘도 솔님을 그리고 싶어서요. 저의 정식 뮤즈이니, 눈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
솔은 고개를 끄덕였고, 송화는 카메라 앞에서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었다.
"완성되면 솔님께도 보여드릴게요."
"하하, 너무 좋죠. 오늘도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요즘 친구들과 카페나 음식점에만 가서 노는 게 대부분인데, 이렇게 바다를 보니 너무 좋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언제 한번 오솔길도 함께 걸어요. 그림을 그리려는 목적이 아니라, 데이트 삼아서요."
솔은 깜짝 놀랐지만, 태연하게 끄덕였다.
"그치만 솔님, 저는 그렇게 솔님과 가까운 사이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딱 한 번의 데이트만 있을 예정이에요. 뮤즈와 가깝게 지내다가 파탄이 난 화가들을 보면 너무 슬퍼져서요. 저는 솔님과의 영원한 뮤즈 관계로 있고 싶어요."
"아, 네. 대신 저도 송화님이 저의 뮤즈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오늘 송화님과 보낸 시간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인화해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어요."
"네, 그렇게 해요. 우리 2주에 한 번씩 만나서 계속해서 그림과 기록으로 관계를 쌓아가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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