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같은소설:고3이야기
흐아. 내가 고3이 되다니. 정말 싫다. 윗학년의 수능이 끝나자마자 내가 고3의 자격으로 승격된다는 점에서 무서웠다. 두려웠다. 그리고 나에게 올 줄 몰랐던 나이였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흘러버렸고, 결국에 올 수밖에 없는 현실에 봉착해버린 것이다. 나는 18살 11월 13일 이후부터 고3이다. 앞으로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도 방향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다가올 시험 나날들 때문에 사라질 자유 시간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1년만 버티면 곧 성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시간들이 가득할 테니 1년만 버티면 된다는 선배들과 어머니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를 발전시켜야만 등극할 수 있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가 나만의 길을 개척할 수 있다.
나는 고2 겨울방학부터 혹독하게 수능 준비를 했다. 그때부터 학교 학기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입시 과열로 인한 대치동 바닥은 뜨거웠다. 아이들의 발걸음은 겨울 바닥의 한기를 밟으면서 오히려 열기가 날 정도였다. 점심시간에 동시다발적으로 먹는 마라탕과 컵라면으로 마음의 스트레스를 줄였다. 그리고 들어가서 수능특강 강의의 일타 강사들을 찾아가 4시간짜리 강의를 듣고 근처 스터디카페에서 공부하다가 오는 것이 매일의 루틴이었다. 어떤 엄마들은 성화가 너무 심해서 아이들이 걸어 다니지 못하게 매일 차에 가두어 두고 손수 만든 고급 반찬을 아이들 입에 넣어 주곤 했다. 그렇게 학원에서 학원으로 옮겨 다니며 아이들의 기를 살리고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며 1년 동안 뒷바라지가 시작된 것이었다.
집안 분위기 역시 달라졌다. 방 안에서 조금이라도 누워 있거나 딴짓하는 순간 잔소리가 날아오기도 했다. 중간고사 때 바짝 공부하던 때와는 너무 달랐다. 결국에는 국어의 모든 문학 작품을 살펴 다 암기하고 이해해야 했고, EBS에서 나오는 영어 지문을 달달 외우며 나오는 단어들을 쓸 줄 알아야 했다. 수학도 마찬가지로 끈기 있게 문제를 풀면서 모르는 문제가 있더라도 30분은 달라붙어서 풀이를 연습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풀리기 시작하면 29번 문제, 30번 문제의 해답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내 마음대로 풀리는 날은 거의 없었다. 결국에는 해답지와 인강 강의에 의지하여 문제풀이를 하다 보니 나의 성장이 더디게 느껴진 것도 있다.
3월에 등교하자마자 교실은 쌀쌀했다. 고2, 고1 모든 학년을 통틀어 가장 조용한 방이었다. 그 방에서 발걸음 소리가 또각날 때마다 침묵을 깨고 울렸다. 구두를 당장 벗고 맨발로 방 안에 들어가야만 할 것 같은 구조였다. 어떤 애는 벌써 머리가 산발인 채 공부에 매진하여 누가 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그런 애가 사실 한둘이 아니었다. 바짝 공부해야 갈 수 있는 대학이었기 때문에 미친 듯이 샤프가 샤샤샥 하고 움직였다. 담임이 들어오자 일절 자리 뽑기로 앉기로 하여 2주에 한 번씩 자리를 바꾸기로 약속했다. 애들은 수긍했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6월 모의고사를 치르고 우는 친구들이 많았다. 자신은 이젠 헛수고를 한 것 같다며 울기도 했다. 나 역시 눈물이 날 정도로 잘 보지 못했다. 그래서 겨우겨우 오답 노트를 펼쳐 나의 치부를 닦아내며 공부했다. 그날은 독서실에서 훌쩍거리는 친구들이 많았다. 다 고3의 참담함과 우울함에 뒤섞인 분위기로 휩쓸렸던 것이다. 결국 한 아이는 밖을 뛰쳐나가 엉엉 울었다. 그 소리를 듣자 흐느끼며 우는 친구도 생기고 결국 나도 눈물을 터뜨리며 화장실에 갔다. 가 보니 다들 자신은 재수할 것 같다는 대화를 나누면서 차라리 마음 편히 공부하는 것이 낫겠다고 위로했다. 나는 그런 말을 듣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나는 친구들과 얼싸안고 울었던 날이었다. 결국 마지막에 떡볶이를 시켜 먹으며 검은 속내를 씻어냈다.
어느덧 수시를 접수할 때가 오자, 애들 사이에서 자신은 00대부터 **대학까지 지원했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하고 다녔다. 그러면서 동시에 담임이 수시 상담을 진행했다. 학원을 다니며 학원 선생님과 함께 진학 상담을 하며 사교육에 의지하고 있었던 때라 담임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하지만 형식적인 절차였기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가 친절하게 대화를 나눴지만 기분이 으스러질 듯 나빠졌다. 나의 성적을 비관적으로 말하면서 대학은 문턱 걸치기도 힘드니까 마음 편히 지내라며 건강한 것이 최고라고 했다. 차라리 2년제 대학을 알아보라는 말에 담임이 미워지고 증오심이 가득해졌다. 그리고 그날부터 눈알이 빠지도록 공부만 했다.
스터디 시계를 틀어놓고 집중도를 체크하며 공부했는데, 보통 5시간 정도 하면 잘하는 날이었다. 그 이상 하면 머리가 아파 더는 들어오는 내용이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복습하기도 하고 책을 읽었다. 그러자 친구들이 오히려 여유 넘쳐 보인다며 나를 시기 질투했다. 쟤는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 일부러 책 읽으면서 지식을 쌓는 이상한 애라고 했다. 나는 졸지에 "공부도 못하고", "이상하고", "버릇없는" 고3 동기가 된 것이었다.
결전의 나날이 다가오자 더욱 교실은 자습시간으로만 바뀌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제치고 모의고사 체제로 들어선 지 오래였다. 자신이 버티고 있는 사회 과목들을 암기하느라 바빴다. 그것만 완벽하게 해내면 솔직히 승산 있는 수시 싸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나 역시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 공부에 매진했다. 그때는 수면 시간도 조금씩 줄였지만 오히려 악영향을 주는 것을 깨닫고 다시 잠을 자며 공부했다.
수능날이 다가왔다. 학교와 근처에 배정을 받았고 많은 교실 친구들과 함께 수능을 치렀다. 모의고사가 잦아서 그런지 수능이 수능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사실 나는 너무 긴장되어 손가락이 마비 증세가 올 정도로 두근거렸다.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 모르겠고 집중도 안 되고 오히려 꼬이고 꼬여서 머리카락이 삐죽 섰다. 결국 이번 모의고사이자 수능은 망했음을 직감했다.
1교시가 끝나자마자 눈물을 닦으러 화장실에 갔다. 나 같은 애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나는 포기 각서를 쓰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독관 선생님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순간, 주위 친구들이 말려주었다. 그때 말려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떤 재수 학원을 어떻게 몇 년을 다녔을까 싶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저녁 5시까지 문제를 풀고 나왔다.
해방감이 아니었다. 좌절감이 먼저 든 채로 밖을 나섰다. 멀리서 보이는 엄마가 손을 흔드는데 받아줄 기운이 없었다. 나는 그저 눈물만 왈칵 쏟아 내며 집을 향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증오가 밀려왔다. 언제부터 공부했어야 잘 볼 수 있었을까? 나는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궁금증이 밀려들어왔다. 그렇게 고3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