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니, 힘들게 살다보니
10년간 살던 집이 재개발 되던 날이 왔다.
우리 집이 재개발 구역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현실이 될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내 인생에 돈이 쉽게 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이 재개발은 로또당첨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나의 집은 재개발에 동의하지 않아서 급하게 현금을 받고 팔 수 있는 찬스가 왔다.
그 집의 담보대출금을 즉시 상환하고 나머지 금액을 우리가 받았다.
워낙 빚이 많아서 집 담보대출금 상환하고 나니, 현금 2억이 나의 통장에 들어왔다.
당장 은행에 가서 현금 2억을 달라고 했다.
큰 가방을 들고 대기석에 앉아서 2억을 기다렸다.
가슴이 콩닥콩닥. 첫사랑 애인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한 기대와 설레임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런데 지점장이 직접 나와서 나를 오라고 했다.
벌떡 일어나 돈넣을 큰 가방을 들고 덩실덩실 나갔다.

지점장은 자기 지점에 현금 2억은 없다고 했다. 다른 지점에서 현금을 조달받아 줄 수도 있는데
수표로 받는 편이 나을거라고 말했다.
계속 현금을 요구하면 국세청에 신고할거라고 말했다.
나는 단지 다른 집을 구하는 동안 현금 2억을 안아보고 싶었을 뿐인데
지점장은 내 마음을 너무도 몰라줬다.
내 통장에 들어온 돈을 내가 마음대로 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현금을 함부로 안고 뒹굴 수 없다.
지점장이 시키는 대로 했다.
자기앞수표로 받았다.

새로운 집을 구하는 동안 나에게 잠시 2억이 머물렀다.
내생에 처음으로 내 품에 안긴 2억을 생각할 때면 웃음이 나왔다.
2천만원도 아닌 2억이 나에게 있다!!! 세상의 모든 억울함이 사라졌다.
용서하지 못할 일이 확 줄어들었다.
신기하게도 2억이 통장에 있는 동안 내내 배가 불렀다.
아무 것도 먹고 싶지도 않았고,
아무 것도 갖고 싶지도 않았다.
계속 배가 부르고, 마음이 가득했다. 몸과 마음이 고요해졌다.
일시적으로 나는 예수, 부처가 되었다.
가끔 먹고 싶었던 햄버거, 치킨, 초밥, 보드라운 고기쌈도
먹고 싶지 않았다.
가끔 눈 앞에서 아른거렸던 휘핑크림 가득 올린 커피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
백화점에 가면 한참동안 바라보았던 원피스도 잊혀졌다.
새로운 집을 구하는 동안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고요하고 거룩하고 잔잔했다.
이것이 금융치료였다.
진짜 돈이 있으면 자주 먹고 싶지 않고, 이것저것 물건을 가지고 싶지도 않다.
어쩌면 자극적인 음식이 자꾸 먹고 싶고
예쁜 옷이 입고 싶은 것은 심리적 허기일 수도 있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나는 다시 고소하고 보드라운 음식이 먹고 싶고, 유행하는 원피스를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