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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라는 것이 슬퍼지는 나이

꽃게탕

by 이정

나의 사촌지간은

친가 쪽으로는 고모네 사촌오빠 둘.

어릴 적에는 작은아빠네 사촌동생 둘과 더 잘 어울렸으나,

대학생이 되면서 나는 부쩍 사촌오빠와 친해졌다.

사실 둘 모두 친하진 못했다.

큰오빠는 나의 대학입학식에 군대 휴가까지 내어 와줄만큼

나를 살뜰히 챙겨주고 든든히 지켜주었지만,

작은오빠는 어린시절부터 괴짜같은 이었다.

아빠 말로는 '기가 막힌 지능' 이라고 했으나 내게는 그저

희한하고 남에게 관심없는 이상한 오빠였다.

나의 짓궂은 장난에도 켈켈 거리고 웃기만 하는 것을 보면

착한 심성인 것은 분명했으나,

혼자서 골똘히 무언가를 만들고 부수고,

열마디를 걸어도 겨우 두어마디 돌아오는

재미없는 오빠일 뿐이었다.


내가 막 인턴사원으로 입사했을 시기,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그 곳에서 터를 잡았던 오빠가

한국 기업에 스카웃이 되며 돌아왔다.

그 시절엔 카톡 대신 메신저가 유행이었으므로

우리는 컴퓨터 창 안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서로의 고충을 털어놓곤 했다.

생각보다 유쾌하고, 기대보다 말이 잘 통하여

나는 오빠와 부쩍 가까워졌다.

여전히 무뚝뚝하고, 이상한 생각으로 가득찬 오빠였지만

대신 나의 이야기를 곰곰이 잘 들어주고,

기발한 솔루션을 내어줄 줄 아는 오빠가 나는 참 좋았다.


각자 결혼을 하고 나서도 우리는

종종 만나고, 같이 어울렸다.

조카가 아홉살이 되던 해, 결국 다시 캐나다로 떠나기로 한 오빠네 부부를

아쉽고도 서운한 마음으로 보내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먼 곳에서라도 소식을 전하며

한국에 들어오면 어떻게든 여행을 함께 하고 식사를 마주하며

그리 지냈다.

오빠보다는 새언니와 주고받는 연락이 대부분이었지만,

다정한 언니에게 전해듣는 오빠의 소식들은

여전히 무뚝뚝하고, 그러나 특이한

그래서 언니는 지극한 애정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때로는 서운하고 곤란해야하는 사정들을

나와 함께 나누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모부가 쓰러지셨다.

딸이 없는 집에, 어떻게든 어린 나를 꼬셔 놀러오게 했던 분이었다.

"나한텐 니가 최고다!" 하시며

아빠의 어깨에 올라 탄 어린 동생 옆에서

고모부는 초등학생 나를 기어이 끙끙대며 목말을 태우셨더랬다.

그래서일까. 나는 고모부를 고모아빠라 부르며 살았다.

어떻게 그 호칭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남들은 그리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중학교때 깨달았음에도

고집스레 고모아빠라 부르며 자랐다.

나에게 두번째 아빠가 있다면, 고모아빠였다. 나에겐 그런 분이었다.


오빠는 서둘러 한국에 들어왔다.

조카의 학교 일정으로 혼자 들어온데다,

회사 스케줄의 한계가 있었기에

오늘내일 하시지만, 마냥 한국에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고모아빠에게 미안하게도

고모아빠의 비보보다 사실은 무뚝뚝한 오빠가 더 걱정되었다.

곁에 있어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와

말로 다 뱉어내지 못하는 저 성정에

얼마나 맺힌 것들이 많을지

나는 그 마음이 안쓰럽고 걱정되었다.


얼마 못 버티실거라는 의사의 말과는 달리

오빠가 있는 2주동안 고모아빠는

감사하게도 잘 버텨내어 주셨다.

그리고, 오빠는 돌아가기 이틀 전, 나에게 연락을 했다.

"지영이가, 너 꼭 보고 들어오래서........."

매일 병원으로 출근하느라 오빠는 나를 만날 틈이 없었다.

새언니 핑계라지만, 오랜만에 오빠를 만날 수 있는 기회라니 고마운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모두가 슬픈 마음에 하하호호 웃으며

식당으로, 어딘가로, 돌아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오빠! 집으로 와. 뭐 먹고 싶어? 병원에 있느라 먹고싶은거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거잖아."

뭐라도 먹이고 싶었다. 늘 한국음식을 그리워했던 오빠였다.

억지로라도 집밥을 먹이고 보내고팠다.

"다 좋아.... 얼큰한거? 전골 같은거? 찜 같은거?

아, 해물탕! 그런거?"


핼쓱해진 얼굴로

우리집에 들어온 오빠에게

나는 꽃게탕을 내 놓았다.

겨우겨우 버티는 고모와

난데없는 비보에 당황한 마음은

근 보름동안 밥 한 술을 제대로 떠보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두 그릇을 가득 먹는 오빠를 보며

나는 마음이 자꾸 구겨졌다.

언젠가는 나도 겪을 이 슬픔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쓰며

오빠오빠 쫓아다니던 꼬맹이 사촌 여동생이 끓여낸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느라 고생하는 듯 하여 속이 상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슬픈 기색은 내보이지 않았다.

물꼬가 트이면, 막아낼 재간이 누구에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밥상을 물리고

우리는 남은 소주를 기울이며

마냥 즐거운 이야기만 했다.

캐나다에서 조카가 얼마나 즐겁게 지내고 있는지,

오빠네 고양이가 얼마나 귀엽고, 마당의 허브들은 어찌 자라는지,

우리는 마음 변두리의 이야기만 나누었다.


"이제, 가 봐야겠어."

오빠가 인사를 하며

"이정아." 나를 불렀다.

생각해보면 오빠는 내 이름을 부른 적이 별로 없었다.

어떻게 불러왔는지도 가물할만큼

나는 나의 이름을 불리는 것에 갑자기 덜컹 했다.

뱅글뱅글 돌던 변두리에서

알맹이로 들어가야 할 시간인가, 싶어졌다.


"낼모레 내가 캐나다에 가거든,

그리고나서 안 좋은 일이 갑자기 생기거든,

너가 형 옆에 좀 있어줘.

형이....나 없으면..... 혼자야."


아.

평생을 무뚝뚝한 이었다.

생전 속마음을 표현할 줄 모르는 이었다.

쓰러진 아버지를 두고 먼먼길을 떠나야 하는 그 마음이,

형에게만 모든 것을 맡기고 가야 하는 그 죄책감이,

나는 감히 헤아려지지가 않았다.

오빠 성격에 이 말을 꺼내려면,

아무리 가까운 사촌동생이라지만 무언가를 부탁하려면,

얼마나 온 힘을 긁어모아야 하는지 알고도 넘쳐서

마음 속이 부르르 부르르 떨렸다.

이 한 마디를 하기까지

서너시간이 넘는 시간을 우리와 어울리며

얼마나 삼키고 삼켰을지 조금이나마 가늠이 되니

식사자리에서 오빠의 웃음과 농담과 그 모든 것이

나에게 비수로 꽂혔다. 아프게 맺혀졌다.

이 부탁을 하는 때까지 얼마나

수십번 고민을 하고, 뒤로 물러서며 애닳았을지,

나는 기어이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다.

끅끅 소리를 내면서도 눈물을 삼키는 오빠 앞에서

주책없이 마음을 터뜨리는 건 결국 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꽃게철이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꽃게철은

매년 기다리던 시기였다.

남편은 '엄마표 꽃게탕'을 아주 좋아해서

나는 일년에 두 번, 그 시기를 기다리곤 했다.

그 날 이후,

나는 꽃게탕에 들어갈 단호박을 썰어내며,

꽃게를 다듬으며, 야채를 손질하며,

그 날의 사촌오빠 마음을 기억한다.

"내가 없거든...형이 혼자야..."

이 말을 할 때까지

무뚝뚝한 오빠가 얼마나 많은 마음의 고개를 넘고

얼마나 수많은 황야를 거쳐야 했을지

나는 늘 그 말과 함께했던 오빠의 먹먹한 표정을 떠올린다.


두 그릇을 맛있다며 비워내는 동안에도

오빠는 망설이고 삼키는 시간을 보내었을 것이다.

캐나다에서 비행기표를 끊고,

나에게 전화를 하고,

우리집으로 차를 돌리는 모든 순간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 지

자식의 애통함을 머금고 담아내었을 것이다.


고모아빠는 다시 괜찮아지시는듯 하더니, 기어이 걱정한대로

오빠가 없는 어느날,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코로나 이슈로 급하게라도 들어올 수 없었던 오빠네 가족은

나의 페이스북 영상으로 장례식을 함께 했다.

나는 고모아빠가

오빠의 애닳았던 마음을,

그 성격에 어렵게 꺼내놓았던 애통을,

충분히 알고 가셨으리라 믿는다.

동생을 본 처조카의 마음까지 헤아리셨던 분이다.

무뚝뚝한 자식이라도

그 마음은 알고도 남으실 분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남겨진 이들은 늘

한이 맺히고 후회가 된다. 오빠도 그랬으리라.

고모아빠의 장례식을 보내며, 영상 너머로 종종 들렸던

난생 처음 들어본 오빠의 울음소리는

아직도 꽃게탕을 끓일 때마다

보글보글 소리와 함께

같이 끓어오른다. 아프게 들려온다.

언젠가는 그 울음을

내가 이어가고 있을 것 같은 생각에

꽃게탕은 어느새 나에게 슬픈 음식이 되었다.


벌써 5-6년 전의 일.

한해 한해 지나며, 나의 꽃게탕이 엄마의 맛과 비슷해질수록

보글대는 소리는 나에게 더 크게 들려온다.

오래도록 모른척 피하고 싶었으나,

이제는 더 물러설 수 없는.


자식됨은 결국, 슬픈 몫이라는 것을

알아가야 하는 나이인가보다.




꽃게탕


엄마표 꽃게탕은 특이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사촌오빠 같았달까요. 희한하지만, 항상 좋게 기억되는. 글을 쓰다보니 둘은 참 닮았었네요.

엄마표 꽃게탕에는 꽃게만큼이나 단호박이 중요하답니다. 다른 야채 대신 단호박으로 달큰하고 진득한 맛을 내어주었거든요. 꽃게탕을 끓이기에는 알이 가득한 암케보다, 살이 꽉 찬 숫케가 더 맛있다고 엄마는 늘 말씀하세요. 결혼하고 처음 단호박 넣은 꽃게탕을 먹어본 남편이 최고의 음식이라 한 것을 보면, 아마도 이 맛은 누구도 싫어할 수 없을겁니다. 가을 숫케철에 맛있는 꽃게탕으로 푸짐한 한 끼를 해보시면 어떨까요.


1. 꽃게를 껍질 구석구석과 다리 끝을 제거하고 깨끗하게 씻어줍니다. 끓이는동안 안의 살이 새어나올 수 있으니 게딱지를 떼어내지 않고 그대로 통으로 넣어주세요.

2. 멸치육수에 고추장(너무 많이 들어가면 텁텁해집니다.)과 고춧가루, 그리고 단호박을 숭덩숭덩 썰어놓고 푸욱 끓여주세요.

3. 단호박이 익어갈무렵, 손질한 게를 넣고 두부와 대파, 다진마늘 넉넉히, 다진생강 조금을 넣어 끓입니다.

4. 국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하고, 단호박이 충분히 물러진 후에 두부와 쑥갓을 넣어 한소끔 더 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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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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