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된 고집일수록 끝은 길었다
나는 야심차게 독립을 했다.
부모님댁과 가까운 곳에 집을 얻는 조건이었다.
친구와 보증금을 보태 함께 지내기로 했던 계획은 어그러졌지만,
이게 어딘가 싶었다. 보수적이었던 부모님의 허락을 얻는 것은
영영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시끄러웠고, 꽤 오래 부딪혔으나,
아마도 이제 서른을 바라보고 있던 나이에
결혼은 할 생각이 없어뵈는 딸래미를
마냥 품안에 자식으로 붙들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엄마가 부모님댁 코 앞으로 집을 얻으라고 했을 때에
마냥 자유롭지는 않을 것을 예상을 했었지만,
수시로 집에 와서 청소를 해놓고, 냉장고를 채워놓는 엄마의 마음은
그 당시엔 고마움보다는 성가스러움으로 다가왔다.
꿈에 그리던 자유를 속절없이 침해당하는 기분이었다.
엄마가 다녀가면 집은 쾌적해지고 먹을 것이 넘쳐났지만,
엄마가 내 집에 머룰러 있던 시간보다 더 길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왜 옷은 다 어질러놓는지, 왜 며칠 전 넣어둔 음식은 그대로인지,
처음에는 감사히 느끼자 마음을 먹었으나
한참 바쁜 시간에 전화를 끊을 기미조차 없이 잔소리가 이어지면
나의 처음 마음과는 반대로
"그러게, 왜 와서 스트레스를 받으시냐."는 못된 말이 튀어나오곤 했다.
회사일보다 사람에 지치던 중이었다.
예전이라고 해본들 20여년 전이건만, 그 시절은 지금과 달랐다.
늙수그레한 상사들은
본인의 저질스런 위트가 맘에 드는지 뿌듯하게 웃어대곤 했고,
남자, 혹은 선배라는 이유로
여자직원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에 부끄러운 줄 모르는 때였다.
미투운동이 시작되기 전, 그런 일들은 회사에서 수시로 일어났다.
처음에는 그런 분위기에 혼자 화장실에서 울기도 하고
발끈하며 받아쳐서 '맹랑한 신입' 이라는 딱지를 달기도 했지만,
나 또한 어느새 능글능글 넘어가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왠만해선 상처받지 않을 깡을 기르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었다.
그 인간도 그랬다.
첫 출근날부터 우리팀에 와서
"젊은 아가씨가 있으니 좋으네!" 라며 이죽대던 옆 팀 차장.
노총각이라던 그 차장은 걸핏하면 우리 팀에 와서 커피 심부름을 시키고
우리팀 회식자리에 찾아와 꼭 내 옆에 앉아 술을 마셨다.
그 차장의 치근덕거림을 눈치 챈 몇몇 선배들은
일부러 나와 그 차장 사이에 끼어들어 막아주기도 했고,
적당히 하시라는 농담을 가장한 직언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럭저럭 무시하며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날의 인사발령은 내 편이 아니었다.
새로 발령받은 팀으로 갔을 때, 그 차장은 능글맞은 웃음을 띄고
내 옆자리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날부터였다.
지나가면서 슬쩍 내 등을 쓸고 간다거나
회식이 잡히면 테이블 밑에서 내 손가락을 튕겨본다거나
밤만 되면 잔뜩 취한 티가 나는 철자로 보고싶다며 문자를 보낸다거나.
그 인간의 행동은 도를 넘어 토악질이 나오는 수준으로 내달렸다.
속 없는 몇몇이 노총각의 짝사랑을 받아주라며
내게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던지기라도 하면,
그 인간의 능글맞은 눈빛은
기고만장하게 입술 끝을 당겨 올리곤 했다.
그 차장의 새벽 문자에 더는 못 참겠다고 답을 보냈던 날.
다음날 회의실로 불러서 잔뜩 불쌍한 척을 하는 그 인간에게
적당히 좀 하시라고 쏘아붙이고 나와버렸던 날.
일주일 넘게 그 인간은 일로 나를 괴롭혔다.
나의 모든 제출안들은 거절 당했고
회의마다 날선 반응으로 민망하게 만들었다.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또 전화를 해서
'집꼬라지'를 이야기 하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던 날이.
늘 그렇듯 딸들의 모든 성질머리는 엄마를 향한다.
출발은 도처지만, 적당한 종착지를 못 찾으면 결국 엄마에게 가 닿는다.
그 날이 그랬다.
별다를 것 없이 안부 겸 잔소리 겸 전화를 했던 엄마는
난데없는 성질머리를 받아내야 했다.
다시는. 다시는 집에 오지 말라고 했다.
비밀번호도 바꿔 버릴거고, 청소도 음식도 하나도 필요치 않다고 했다.
이미 다 커버린 딸은
엄마가 혼낸다고 고치지도, 벌준다고 반성하지도 않을 작정이었다.
내가 부모님과 가까운 곳으로 독립을 했을 때에
수시로 엄마가 드나들 것을 예감했던 것처럼,
엄마 또한 내가 독립을 선언했을 때에
이제는 엄마 손을 떠나버린 자식이 될 것임을 예감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은 그 날, 그 예감이 적중했다는 것을 아프게 인정해야 했을 것이다.
엄마는 받아들였고, 나는 멈칫 했다.
함께 살던 때, 도저히 무너지지 않던 엄마의 뜻이
그리 쉽게 무너지는 것에 사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이제 와서 엄마를 다시 집에 들이는 것은 싫었다.
엄마가 수시로 드나드는 한, 이 상황은 계속 반복될 것이고, 여기서 멈추고 싶었다.
무엇보다 냅다 질러놓은 성질을 금세 수습하기엔
내 못난 자존심이 너무 고집스러웠다.
그 후로 엄마는 오지 않았지만 가끔씩
집사님이 들렀다 가시곤 했다.
엄마 말로는
엄마가 내 걱정을 하면 집사님이 먼저 나서서
장보러 나가다가 잠깐 들르거나, 우체국 다녀오다 들르시는거라 했지만,
나처럼 집사님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집사님이 내 사는 모습을 잠깐 들여다 봐주는 것만으로도
엄마가 얼마나 안심을 하고 편안해지는지를.
성질 못된 딸래미를 놓지 못해 늘 맘이 불편한 엄마를
집사님은 그렇게라도 돕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집사님도 내 걱정이 되어 그리 해야 하셨을 것이다.
내가 독립을 한다고 처음 말했을 때
부모님만큼이나 펄쩍 뛰었던 사람은 집사님이었다.
과년한 처자가 결혼할 생각은 않고 겁도 없이 혼자 살려고 한다며
혼삿길이 막힐까봐 걱정이 늘어지셨었다.
부모님댁 아파트 단지를 나서서 큰 길 하나만 건너면 되었던지라
집사님은 그렇게 우렁각시처럼 가끔씩 들렀다.
퇴근이 늦어 내가 부모님댁을 들를 상황이 안 되면
내가 좋아하는 병어조림을 식탁 위에 놓고 가시기도 했고,
또 어느날은 과일칸을 채워 놓으시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집도 출근때와 달리 말끔히 정리가 되어 있기도 했다.
밥 먹듯 야근이고, 여차하면 밤샘인 딸의 생활을 아는지라
야속하면서도 걱정이 많을 엄마 속을 모르지 않았기에,
사실은 엄마에게 화를 내고 집에 오지 말라고 성질을 부린 것이 미안했기에
그 정도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없는 시간에, 어쩌다 한 번 오시는 것이므로
상관 없었다. 엄마가 자주 오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편했다.
어느날은 예고없이 들렀다 가시기도 했지만,
간혹 들르실 것을 미리 알고 출근하는 날이면
나는 포스트잇에 간단한 인사를 적어 냉장고에 붙여 두었고
퇴근 후, 포스트잇이 떼어져 있는 것으로 집사님의 답장을 받았다.
"벨 짓을 다 한다!" 하며 무뚝뚝한 미소를 지었을 집사님이 그려졌다.
엄마에게는 감사인사는 커녕, 뭐하러 오냐고 핀잔을 주던 딸은
집사님에게는 달랐다. 엄마에게는 낯간지러울 일들이
집사님에게는 어렵지 않았다.
집사님이 몇 번 들르고나서 나는
결국 그 차장을 어찌하지 못하고 휴가를 내었다.
나에게 복수하듯 괴롭히다가, 돌연 마음을 풀었는지 괜찮아지기에 방심을 하고 있던 때였다.
며칠 잠잠한가 싶더니, 다시 치근거림은 올라오기 시작했고
내 뒤에 서서 모니터 속 회의자료를 함께 본다더니 이내 내 어깨를 주물거리기 시작했던 순간,
하나, 둘, 셋... 속으로 숫자를 세며 부디 멈추기를 바라고만 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 차장을 밀치고 가방을 챙겨 집으로 와버렸다.
팀장님에게 개인적인 사유로 며칠 쉬겠다고만 문자를 넣었다.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만두든 잘리든, 어차피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회사에 새로 전근을 온지라,
회사 분위기도, 팀 분위기도 낯설었던 팀장은
아마도 사람들에게 나와 그 차장의 문제를 전해들었을 것이다.
팀장은 일단 회사로 복귀해서 방법을 찾자고 했으나
나는 버텼다. 방법이 생긴 후에 복귀를 하겠다 했다.
마땅한 방도 없이 서로 같은 말을 반복하는 줄다리기가 이어지던 며칠,
나는 집 앞을 찾아온 동기 몇몇과 밤늦도록 맥주를 마셨고
다음날 늦잠을 자고 있던 터였다. 일찍 일어나본들 골치아픈 시간만 길어질 뿐이었다.
"이정아! 니 회사 안가고 뭐하노!!"
집사님의 호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집사님이 들를 줄 몰랐고, 집사님 또한 내가 있을줄 몰랐다.
나만큼이나 놀란 집사님을 앉혀두고 나는 그간 있던 일을 털어놓았다.
집사님은 썩어빠진 놈, 우라질 놈등등, 내 속이 시원하도록 찰진 욕을 곁들여 주셨고,
나는 아차 싶었던 조금 전과는 달리,
눈물콧물을 빼며 집사님에게 우르르 털어놓았다.
일러바치는 것만으로도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내, 나는 집사님을 조심시켜야 했다.
"집사님, 그런데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요."
"와? 엄마가 알아야지 뭔 소리 하노!"
"안돼요. 말하지 마요. 괜히 신경만 더 쓰여요. 진짜에요."
"...... 하이고마..... 알았다."
엄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딸이 몇이나 될까.
때로는 모두가 다 알아도 엄마는 몰랐으면 하는 일들이 있다.
내 일에 나보다 더 힘들어 하는 것을 알기에
나는 엄마에게 숨기는 것이 늘 많았다.
내 앞가림만으로도 숨이 벅찬데, 엄마의 기분을 살피고, 엄마의 마음을 안심시켜야 하는
일련의 과정은 버거운 노릇이었다.
엄마가 이 상황을 알게 된다면
당장 집으로 들어오라고 할 것이 뻔했다.
혼자 사는 딸에게 정신나간 놈의 집착이 향해 있다는 것은
가슴이 철렁, 무섭디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수시로 내 안부를 물을테고
나는 하루에 열두번 엄마에게 나의 안녕을 전하며
엄마의 불안을 달래고, 엄마의 걱정을 잠재워야 할 것이었다.
집사님이 대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나는
"정말이에요 집사님. 엄마한테는 비밀이에요." 라고 강조를 했으나
집사님의 마뜩찮은 대답에 나는 사실
곧, 엄마가 알게 될수도 있다고 맘의 준비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너무 빨랐다.
바로 다음날이었다.
퇴근을 했던 집사님은 도저히 걱정이 되어
다음날 아침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왔다고 했다.
이정이가 너무 걱정이 되니, 전화해서 좀 살펴보라고 당부가 이어졌다 했다.
나는 또다시 화를 내었다.
그리 부탁을 했건만, 하루를 못 참고 엄마에게 알렸냐며
집사님이 이렇게 못 믿을 사람인지 몰랐다고 길길이 뛰었다.
이게 엄마에게 숨길 일이냐고, 집사님이 백번 잘 하신거라고
엄마는 엄마대로 서운함과 걱정이 뒤섞인 화를 내었다.
집으로 들어오라는 엄마의 말에도 나는 집사님에 대한 화를 터뜨렸고,
상황이 어떻길래 그러냐는 말에도 나는 집사님만 운운하며 화를 내었다.
예상하고 있던 반응이었기에, 그리고 사실 이해할만한 말들이었기에
나는 이렇다하게 반박할 논리를 찾을 수 없었으므로
엄마의 말을 막아설 용도로 집사님을 이용했다.
화를 내면서도 멈추어야 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못된 마음은 수습하기 더 어렵다.
이미 터뜨리기 시작한 내 말들을 다시 주워담을 방법이 없었기에
집사님도 이제 출입금지라는 결론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꺼진 핸드폰을 보며, 엄마에게 집사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올라왔지만
착하게 수습하기엔 나의 못된 마음이 너무 멀리 왔다. 다시 돌아갈 길이 요원했다.
그래서 그 날도 나는 비겁하게
이 상황을 굳이 만든 엄마와 집사님을 탓하는 것으로 덮어두었다. 그게 훨씬 쉬웠다.
다행히 팀장님의 수습으로 나는 다른 팀으로 전출이 되었다.
사정을 알고 있던 옛 사수가 자신의 밑으로 내가 오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고
나의 회사생활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 차장은 나에 대한 집착을 거둬들이고 다른 타겟을 찾아나섰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음 타겟이 된 후배직원은 저녁마다 나를 찾아와
맥주를 기울이고 소주를 따르며 하소연을 했고,
알고보니 당한 사람이 꽤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런 놈이었다. 그런 놈에게 나와 그 후배가 유독 길게 붙들려 있었던 것이었다.
그닥 가깝지 않던 나와 그 후배가 갑작스레 친해진 것에 그 차장은 예민하게 굴었다.
둘이 같이 회의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거나, 점심을 함께 먹고 올라오다가 마주치기라도 하면
얼굴에서 덜컥, 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 후배에게는 나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넌지시 묻기도 했고,
나에게는 어쩌다 그 후배와 친해졌는지 농담처럼 물으며 눈치를 살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그 놈다웠던 것은
그리 눈치를 보고 신경을 쓰면서도 후배에게 향한 추파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차장에 대한 결론을 말하자면, 1년쯤 후에 내가 다른 회사로 옮길 때에
나를 꽤 좋게 보아주던 인사본부장님에게
이 모든 상황을 전달하는 것으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인사본부장님은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냐고 물었고,
나는 팀장님이나 그 외 많은 이들이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들이 알면서도 모르는체 덮고자 한다면
겨우 대리딱지를 붙인 내가 싸워낼 방법은 없었다고 했다.
인사본부장님은 내게 약속한대로
여직원 대상으로 그 차장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정도의 차이었을 뿐
우리를 제외하고서도 제법 많은 여직원들이 짧지만 비슷한 경우들을 겪었고,
정말 치졸하게도 고졸여사원들에게는 더욱 악랄했다는 것까지 드러났다.
그 차장은 결국 자진퇴사로 마무리 되었다는 소식을
나는 다른 회사에서 통쾌한 기분으로 들었다.
그 소식을 마지막으로 나는 업계에서 그 차장의 소식을 들어본 적 없었다.
나의 문제가 해결되어가는 동안,
집사님은 그렇게 나에게 마음을 거절당한 채로 머물러 있었다.
돌이켜보면, 집사님에게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모른척 할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 시기에는 할머니까지 요양원에 들어가셨으므로
사실, 부모님 댁에서 집사님이 이렇다하게 할 일은 없었기에
집사님은 평일 주2회만 들르는 중이셨다.
내가 회사에 있는 시간, 우리가 마주칠 일 없던 그 주2회는
집사님에게 미안했다가,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또다시 떠올라 맘의 짐이 되었다가, 다시 잊고 아무렇지도 않아지는 새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어느날,
집을 나설 준비를 하던 집사님이 화장실에서 넘어지시는 바람에
고관절을 다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놈의 골다공증은 종종 집사님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팔을 상하게 하더니
기어이 고관절까지 건너왔다.
한동안 거동이 힘들거라는 성미언니의 연락을 받고 엄마는
마지막을 예감했다고 말했다.
감사인사를 제대로 전하지도 못했는데,
마지막으로 깊게 안아보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정말 집사님 볼 날이 없을듯 하다며 엄마는 울었다.
나는 여전한 고집으로 엄마에게 속엣말을 꺼내지 못했으나
화내서 미안하다고, 집에 오지 말라고 해서 미안하다고,
나야말로 이게 정말 마지막이면
나는 이 미안함을 어떻게 주워담을지 막막해졌다.
아닐거야, 어쩌면 다시 추스리시고
한번쯤은 꼭 다시 보게 될 날이 오겠지.
해결할 방법을 마땅히 찾지 못한 나는 또다시
편리한 방법을 찾아 그리 합리화를 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성미언니를 통해 종종 전해듣는 집사님의 안부는
시간이 흐를수록 심상찮았다.
그럴수록 나는 힘을 주어 엄마에게 말했다.
"아니야. 그래도 떨치고 일어나실걸.
설마 이렇게 마지막이기야 하겠어."
그래야만 했다. 십여년의 정이 '출입금지'로 마지막을 맞이하다니
그럴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집사님을 꼭 다시 만나
그 때에는 죄송했다고, 사실 내내 맘이 불편했다고
말해야 했다. 집사님과의 십여년이 나와 엄마에게는 어떤 의미었는지
집사님이 모두 헤아리고 계시더라도 내 입으로 꼭 전해주어야 했다.
집사님과 다시 만날 날이 돌아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