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의 죄도 자식이지만, 그 어미의 숨구멍도 자식이다
양집사님이 며칠, 우리집에 출근하지 않은 이유를
나도 자세하게는 모른다.
엄마는 나에게 그저 '좋지도 않은 얘기' 라며 시원스레 알려주기를 조심했고,
어릴적처럼 집에 딱 붙어앉아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기엔
한참 바쁜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엄마아빠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라도 열심히 주워들을 바로는
아빠가 양집사님의 아들에게
무슨 대리점일을 연결해 주었는데
떼어먹었다는 건지 뭔지, 여하튼 돈문제를 만들었다는듯 했다.
아빠는 소개해준 분에게 곤란해졌고, 양집사님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며
더는 페 끼칠 수 없다며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엄마아빠는 양집사님의 아들래미 얘기가 나오면 한숨을 쉬다가도 이내
"그게 어디 양집사님 탓이겠어. 자식이 어디 부모 뜻대로 되나."
라며 결론을 지었는데,
나는 그게 나를 향해 하는 말이라고 느꼈다.
스물스물 올라오던 사춘기가 절정을 치달을 때였다.
하루걸러 하루, 엄마아빠와 전쟁을 치루는 중이었다.
엄마아빠는 그렇게,
자식가진 죄를 함께 지고 사는 양집사님을 동지로 받아들였다.
남의 일도 아니고, 헤아리지 못할 일도 아니라고 느꼈던듯 하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라, 양집사님 아닌가.
엄마는 새로운 누군가를 구할 생각도 않고 버텼다.
그리고 양집사님을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모르나,
일주일이 좀 지나고 나서야 집사님은 우리집으로 돌아왔다.
뻔뻔한 구석이라고는 없이 순박하던 집사님은
괜시리 내 눈치까지 보며 며칠 좀 어색하게 행동했는데,
나는 그런 양집사님을 보며
내가 말썽을 부리면 엄마아빠도 어딘가에서 저리 눈치를 보겠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아주 편리한 사고방식을 고수하는 그 나이때의 특징답게
내가 뭐, 돈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나는 그럴만하니 그런거라고 얼른 마음을 고쳐먹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 마음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았기에 회피했던 것이지
내심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엄마아빠에게 미안한 맘을 품고 살았던듯 하다.
아무리 부딪히고 싸워도 내 아빠인데
그럼에도 나는 양집사님이 밉거나 원망스러운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우리 가족이 되어준 것이 마냥 다행스러웠다.
집사님은 옳고 그름으로 멀어지거나 할 수 없는,
손익을 따져 관계를 이어나가지 않는,
외할머니의 분신이자, 큰이모이자, 나의 집사님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더 아무렇지 않게
"집사님, 왜 안 왔었어요!" 하고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내게
"아이가! 야가 와카노!" 하면서도 얼른 민망한듯 등을 돌리던 집사님도
며칠이 지나자 다시 예전으로 돌아와서
내 장난에 괜한 퉁박을 던지거나, 부엌에서 외할머니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듯 돌아간것 같았지만
그 후로도 내내, 엄마가 집사님 아들의 안부를 묻거나 하면
"문디자슥, 내 어찌 알겠능교. 여정이 엄마도 그 자슥 죽었는지 살았는지 맘 쓰지 마소." 라며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표정 뒤에 숨긴 집사님의 애끓는 마음을 아는 동지였던 엄마는
"자식 일, 마음대로 되는 게 어딨겠어요. 집사님도 우리 신경쓰지 말고 맘 풀어요.
엄마 기도가 어디 가겠어. 맘 잡겠죠." 라며
연신 집사님 눈치를 보며 도닥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집사님이 너무 성호만 떠받들었어. 사리분별 그리 분명한 분이 왜 그런대요.
고기도 성호만 먹이고, 신발도 성호만 사 신기고. 성미한테도 잘해요 이제.
성미같은 자식이 어디 있다고. 아들 몫 열배는 해 낼걸!" 하며
집사님을 나무라기도 했던 것을 보면,
집사님은 남존여비 사상에 아직도 흠뻑 젖어서
남매를 드러내놓고 차별을 했던듯 하다.
엄마가 나무랄 때마다 집사님은 "어찌 아들이랑 딸이 같응교!" 하며 버럭 했는데,
그러면 나까지 득달같이 집사님 옆에 붙어 앉아서 엄마와 한 편을 먹고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러는거냐며 성화를 부리기도 했다.
그랬다. 집사님에게는 속썩이는 아들도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미덥기 그지없는 딸도 있었다.
성미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능한 아빠와 사고뭉치 오빠를 지고이고 살아가는 엄마를 도와
생활비도 보태고, 집안일도 거들며, 가장 역할을 집사님과 나눠 살았다.
종종 전해듣는 이야기만으로도 남매의 차별이 얼마나 심한지 가늠될만큼
집사님은 그 속썩이는 아들한테 온 정성을 쏟으며 키워냈으나
그럼에도 든든하게 집사님 곁을 지키는건 늘 성미언니었다.
집사님은 옛날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좋은 음식, 좋은 물건은 대를 이을 아들에게 주긴 했지만 내가 지켜본 바,
마음은 사실 성미언니에게로 마냥 기울어져 있었다.
성호오빠 얘기가 나오면 목소리가 우악스러워지며 서슬이 퍼래지던 집사님이지만
성미언니 얘기를 할 때면 수줍게 자랑을 곁들이며
때로는 애틋한 마음에 눈가를 훔치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집사님이 성호오빠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속이 상한 듯 하면 얼른,
성미는 어떻게 지내냐며 말머리를 돌리기도 했는데
그러면 집사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치켜들었던 눈꼬리를 풀며 "아이고, 고노무 가시나..." 로 시작해서
새색시같은 표정으로 수줍어 하며 언니의 기특함을 늘어놓거나
무심한 척 귀찮은 척, 흉을 보는듯한 말투로 언니 자랑을 이어가기도 했다.
양집사님의 숨구멍이었던 성미언니는
명절이 되면 우리집에 인사를 오기도 했다.
집사님과 달리 아주 예쁘장하게 생겼던 언니는
과일바구니를 우리에게 주면서도 괜히 미안한 기색을 보였고,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 아빠의 길어지는 덕담에도
다리에 쥐가 나지도 않는지 차분하기만 했다.
할머니도 성미언니를 아주 맘에 들어 하셔서
할머니방에서 한참 있다 나올 때면 언니의 손에는 늘상
미국 당숙네가 보내줬던 미제과자들이 잔뜩 들려있었다.
"얘! 성미 이거 쇼핑백에 좀 넣어줘라!" 라며
엄마를 부르는 할머니를 나는 몰래 흘겨보곤 했다.
나와 동생이 빼 먹을까봐 장롱 속에 넣고 잠궈버렸던 과자들이었다.
그깟 과자 안 먹어도 그만이지만,
할머니의 그런 모습은 위선으로 느껴져서 나는 아주 못마땅했다.
그러면서도, 나라도 저렇게 참하고 공손한데 어떻게 밉겠어, 라며
성미언니를 인정할 수밖에 마음이 함께 일곤 했다.
엄마 생일은 할머니 생일의 3일 뒤었다.
엄마는 할머니 생신상을 떡 벌어지게 차리고, 친척들을 불러 잔치를 하고나면
정작 본인의 생일에는 앓아 누워있기 일쑤였다.
집사님이 온 이후로는
엄마 생일 미역국은 집사님이 끓여주시고는 했는데
엄마는 하늘에 계신 외할머니가 집사님을 통해 끓여준 미역국이라 여기며
한 술 한 술 눈물을 섞어 뜨곤 했다.
고 1이었나, 고 2였나, 그 해 엄마 생일을 앞두고 나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엄마의 생일상을 꼭 내 손으로 차려내고 싶었다.
시어머니 생일에 밀려 미역국 하나에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엄마가 안되었기도 했지만,
본인 생일상만 챙기고는 며느리 생일에는 미역국 하나도 나몰라라 하는 할머니에게
보란듯이 차리고픈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귀동냥으로 들은 것만 많지, 직접 요리를 해본 적은 없던 나는
며칠동안 틈만 나면 집사님을 쫓아다니며 메모를 했다.
미역국은 어떻게 끓이는지, 불고기 양념은 무엇으로 하는지,
그 두 개만으로도 내 머리는 바글바글 복잡했다.
받아적고 방에 들어가 읽다가, 다시 뛰어나와 확인을 하고,
다음날이 되면 혹여 빼먹은게 있을까봐 거듭 체크하는 나를 보며
집사님은 누가 보면 20첩 반상을 차리는줄 알겠다며 툴툴 대었지만
엄마의 생일 전 날, 은밀히 나를 불러
냉동실에 있던 국거리 양지와 불고기를 꺼내 놓았다며
미역은 어디에, 파와 양파는 어디에 있는지 꼼꼼이 알려주었다.
나는 나름의 계획이 있었기에 집사님이 꺼내놓은 식재료들을 거절했는데
꼭 내 돈으로 재료도 다 준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왕 하는 거, 집 안에 남겨둔 짜투리 재료들로 차리고 싶지는 않았다.
"내 돈으로 살거에요. 그래야 선물이죠." 라는 내게 집사님은
"아이가? 돈이 썩어난다!" 하면서도
고기는 뭘로 주문해야 하는지, 야채는 어떤거가 싱싱한건지를 알려주며
"느이 엄마 울낀데... 학생이 뭔 돈이 있다꼬 이걸 다 했냐며 분명 울낀데...
느이 외할머니가 봤으면 얼매나 기특타 하겠노. 복받으래이 복받으래이." 하며 내 등을 톡톡 두드려주었다.
나는 문득, 집사님은 생일날 미역국을 챙겨드시고 있을까 눈치가 보였다.
효도를 받지못한 성호오빠가 떠올라 미안해졌다가도, 그래도 성미언니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집사님. 성미언니는 미역국 잘 끓여요?" 라는 내 질문에 집사님은
"갸는 국민학교때부터 국 끓여 지 아부지랑 오래비 챙겨 먹이고 했지. 나보다 잘 끓인다." 하며
또다시 눈가에 뿌듯한 주름을 잡았다.
정말이지 집사님에게 성미언니가 없었음 어쩔뻔 했나 싶었다.
성미언니가 없었다면, 나라도 집사님 미역국을 챙겨야할 판이었던 이유도 있었다.
솔직히, 두 번은 자신이 없었던 나는
집사님 곁을 든든히 지키고 있는 성미언니가 진심으로 고마웠고
몇 번 본 적 없는 언니에 대한 고마움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마음에 일었다.
성미언니와 나는
살가운 대화를 길게 나누거나, 가까이 지내본 적은 없었으나,
성미언니는 집사님보다도 우리와 가장 오래동안 연을 맺은 이로 남았다.
집사님이 외할머니의 분신이었다면,
성미언니는 집사님의 마음을 전하고, 추억을 일깨워주며,
꽤 오랜 기간, 우리에게 집사님의 분신이 되어주었다.
외할머니의 유산이었던 집사님은
본인의 유산으로 성미언니를 남겨두어
어느 날은 반가운 인사를 건네기도 했고,
가끔은 과일 박스나 소고기 서너근을 전달하기도 했다.
성미언니는 집사님이 떠나고 난 후에도 충실히 집사님의 숨구멍이 되어
집사님이 우리 곁에서
숨도 쉬고, 말도 건네고, 마음도 전하도록 지켜내주었던 것이다.
내가 미처 몰랐던 집사님의 속마음이
성미언니를 통해 툭툭 불거져 나올 때마다
엄마는 물론이거니와, 나까지도 한동안 마음이 아팠다.
집사님 덕에 조금이나마 유예되었던 외할머니에 대한 상실감이
십여년이 지나서야 문득문득 고개를 드는 기분이었다.
해소되지 않았던 감정은 결국에는 존재감을 드러낸다.
시간이 흐른다고 그냥 삭혀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 시절 우리에게는 양집사님이 필요했다.
엄마는 외할머니 없이도 살아진다는 것을 배울 시간이 필요했고,
나 또한 광풍같은 사춘기 시절, 외할머니가 어떤 방식으로든 내 곁에 있다는 믿음이 필요했다.
같은 이유로 우리에겐 한동안
성미언니도 필요했다.
집사님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던 우리는
떠나보내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집사님은 그렇게,
우리가 너무 아프지 않도록
외할머니와의 이별부터 자신의 마지막까지
서서히,
우리가 급작스런 암흑에 넘어져
혹여 다치지 않도록 찬찬히,
그렇게 저물어 주었다.
나는 이보다 더 배려있는 이별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정말이지, 집사님다운 이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