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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집사님 4

나에게 IMF는 당연했던 관계들의 실종이었다

by 이정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얼마 안 되어

우리나라는 IMF라는 역사적 위기를 맞이했다.

연일 보도되는 나라의 현실은 참담하고 난폭했다.

뉴스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나의 일로 여기며 산 적 없었기에,

어느 그룹이 무너졌다. 근로자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는 소식들보다

두 층 아래, 고등학생 아들딸래미가 살던 집이

야반도주를 했다는 이야기로 나는 IMF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 집 둘째딸은 수줍음이 많았다. 엘레베이터에서 마주치면

몇년 전까지만 해도 교복차림에 피곤에 쩔었던 아파트 언니가

하이힐을 신고, 화장을 한 채, 또각또각 나서는 모습이 낯설고 신기했는지

조용히 숙인 고개에 숨어, 흘끔흘끔 나를 훔쳐보곤 했었다.

내가 봐도 화장이 어색하고, 내가 느끼기에도 한껏 어른 차림이 쑥스럽던 때에는

그 아이의 흘끗댐이 민망하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했지만,

여대생 사촌언니를 부럽디 부럽게 바라보던 내가 떠올라

언젠가부터는 그 아이의 수줍은 시선을 흔쾌히 받아들이던 터였다.

몰래 보다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찌할 바 몰라하며 두리번대다가

1층에 도착하자마자 후다닥 뛰쳐나가는 와중에도

한참 어른을 대하듯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모습이 귀엽디 귀여웠다.

그 부끄럼 많던 중학생 여자아이가

어디로 갔을지 마음이 쓰였다.

소심하고 남 눈치를 많이 보던 여자아이가 허름한 어느 곳에서

고개를 숙인 채, 나를 훔쳐보던 그런 눈으로 세상을 맞닥뜨리고 있을듯 하여

엘레베이터를 탈 때마다 마음이 쓰렸다.


나에게 IMF는 그런 것이었다.

국가의 위기나, 대국민적 애국심같은 거창한 대의명분이 아니었다.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의 아버지는

작은아버지의 사업을 연대보증을 섰다가 함께 무너졌다.

넉넉한 용돈과 시즌별로 구비되는 옷들로 모두의 부러움을 사던 친구였다.

휴학을 하고 닥치는대로 아르바이트를 해도 아버지의 빚을 갚기에는 역부족이라

우리는 전처럼 붙어다닐 수가 없었다. 간혹 자정을 앞둔 시간에

잔뜩 지친 목소리로 전화가 오면, 반가우면서도 왠지 미안해서

우리의 수다는 전처럼 이어지지 못했다.

과방 죽돌이라 불리던 학회장 선배는 졸업 한 학기를 남기고 휴학을 했다.

제법 크게 자리잡았던 아버지의 가게가 문을 닫았다 했다.

학회는 흐지부지 갈피를 못 잡았고, 선배가 늘 데리고 다니던 학교 앞 주점도 찾아갈 일이 뜸해졌다.

학점이 제법 좋아서 후배들에게 담배 한개피나 음료수 한캔으로 나눠주던 그 선배의 족보는

그 후로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학교로 오는 입사원서는 씨가 말라

졸업하는 선배들은 오도가도 못하는 백수가 된 채 퇴장을 하였고,

조기유학 붐이 일었던 시절에 해외로 나갔던 중고등 동창들은

아무도 모르게 귀국을 했다는 소문만 무성히 남기고는 두문불출 잠적을 했다.


내가 겪은 IMF는 그런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부도가 난 회사 앞에서 시위를 하고,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애국심을 고취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살았던 세상이 하루아침에 사실이 아니어지는 것이었다.

내가 소중히 이어가던 관계들이 무력하게 깨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만 몰랐을 뿐

나의 가족도 전과는 달랐다. 나는 부모님의 악착같은 보호막 안에서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우리 가족도 IMF 시기에 한걸음 한걸음이 버거웠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달에는 생활비를 고모에게 빌려 지냈고,

나의 등록금은 외할아버지에게 융통해서 냈다고 했으며,

심지어 어느 날은 외삼촌이 쌀 한가마니를 문 앞에 놓고 가셨다고도 했다.

우리는 집을 내놓고 강남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할머니를 위해 노년을 교회 근처에서 사시게 할 요량이라고만 부모님께 전해들었다.

무언가 심상찮다고 생각은 했지만, 정확히는 몰랐다. 아니 모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아빠의 회사가 어렵다는 것만 알았다. 그러나 곧 괜찮아질거라고 믿었다.

나의 용돈은 끊긴 적이 없었고, 나의 생활이 크게 바뀐 것은 없었기에 그리 믿으며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어서야

자식의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부모님이

얼마나 수시로 입술을 깨물어야 했고,

얼마나 매순간 마음을 동동거려야 했는지

어렴풋이 가늠이 되었다.


그랬다. 나는 매일 아침,

아빠가 어떤 마음으로 출근을 하는지 알 리 없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출근을 하는 아빠를 배웅해본 일이 손에 꼽으니

출근길 아빠의 표정을 살펴볼 기회조차 나는 없었다.

학원을 접고, 몇 명의 아이들만 집에서 레슨을 하기로 한 엄마에 대해서도

나는 축하할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오랜 레슨으로 엄마 어깨는 파스 없이 잠들 수 없는 지경이었기에

엄마에게 드디어 휴식이 생겼다고만 생각했다.

학원생이 급격히 줄어들고, 더이상 학원 월세조차 힘이 들어

유지할 수 없었다는 것을 나는 까맣게 몰랐다.

평생 대출금을 갚아가며 얻어낸 집 한 채를 헐값에 팔아넘겨야 하는 부모님의 새카만 속 또한

나는 끝끝내 외면하고 있었다.


양집사님이 잠시 쉬기로 하셨다는 것도 나는 순진하게만 받아들였었다.

집사님은 언젠가부터, 넘어지기만 하면 크게 다치셨다. 골다공증이라고 했다.

몸이 너무 약해지셔서 몸을 좀 추스리고 나중에 다시 오시기로 했다는 말에

"그러게, 내가 반찬 좀 골고루 많이 드시랬는데 맨날 대충 드시니까 골다공증이 오지!"

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나는 아는 척을 했다.


엄마는 이제 집에서 간간히 레슨을 했고, 나는 물론이거니와 동생도 다 자라서 손이 많이 가지 않았기에

우리집은 더이상 집사님의 도움이 간절한 살림살이는 아니었는데다가,

집사님에게만은 속내를 많이 털어놓던 엄마였기에, 집사님은 우리 집 형편을 빤히 눈치채셨을 것이다.

그래서 집사님은, 건강상의 이유로 당분간 일을 쉬겠다고 하셨다.

우리 집 사정이 안 좋아졌다고 집사님을 그만두게 하지 못할 엄마라는 것쯤은 집사님도 알고 계셨을게다.

엄마 또한 머릿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집사님의 배려를 애써 모르는 척 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들였을 것이다.


엄마는 집사님이 오지 않으시는 것에 많이 울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믿을 수 없을만큼 무심했던 나는

엄마가 자신을 떼어놓고 외출을 했다고 우는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는 죄책감과 자괴감에 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사정이 힘들다고, 더 사정이 나쁜 집사님을

모르는 척 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자식들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속보여도 어쩔 수 없이 모른척을 해야 하는

엄마의 자리 또한 버겁고 서러웠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떠올랐을 것이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팠을 것이다.


집사님은 그렇게 우리와 헤어졌다.

꽤 긴 시간이었다.

하루아침에 덮쳐 온 IMF는 물러서는 것에는 그리도 더디 굴었다.

1년을 넘게 월급조차 없는 채로 버텼던 아빠는

외국 기업에 아빠의 회사가 팔리는 것으로 어느정도 제자리를 찾아갔다.

아빠 회사가 정상화 되자마자 엄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집사님에게 연락을 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그 사이 그나마의 레슨마저 그만두면서, 집안 일에 도움이 필요치 않았다.

그럼에도 엄마는 집사님부터 불렀다.

집사님은 "여정 엄마, 이제 나 안가도 되는 거 아닌교." 라고 했다지만

엄마는 외할머니 대하듯 막내딸처럼 땡깡을 부렸다.

집사님을 너무 오래 믿고 있어서, 나 혼자서는 뭘 해도 버겁다고.

이만큼 쉬셨으니 이제 몸도 괜찮아지지 않았냐며 조르고 졸랐다.


집사님이 1년여만에 다시 우리 집에 오던 날,

수업을 마치자마자 1.5리터 우유를 사들고 집으로 내달렸다.

"집사님!!! 이거 집사님꺼니까 다 마셔야 해요!

내가 자주 사올테니까 아침저녁으로 이거 꼭 마셔요!"

집사님과의 헤어짐이 골다공증 때문이라고 믿어마지 않았던 나는 순진하기 그지 없었다.

그 후로도 나의 잔소리는 수시로 튀어올랐다.

집사님이 김치 하나만 놓고 대충 식사를 하려고 할 때마다,

냉장고에 넣어둔 우유가 줄어들 생각을 안 할 때마다,

"집사님 골다공증!!!!" 하며 득달같이 반찬통을 더 꺼내고, 우유를 컵에 따랐다.


내가 회사에 취직을 하고 나서도 IMF의 후유증은 도처에 남아있었다.

신입사원을 뽑는 데에 인색하기 짝이 없던 그 시절 탓에 나는 아주 오랫동안 막내여야 했고,

팀원 9명 중에 6명이 하루 아침에 권고사직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 일을 겪어내며

우리 아빠가, 그 때의 어른들이, 어떤 삶을 버텨내야 했을지 가늠이 되었다.

그제서야 나는

대학시절, 엄마가 왜 그리 옷 한 벌, 화장품 하나에 인색하게 굴었는지 알았다.

왜 아빠는 담배를 하루 세갑씩 피워댔는지,

왜 엄마는 학원을 접어야 했는지,

집사님이 우리와 헤어져있던 진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형편이 좋아진 우리 집은 집사님의 마음을 갚으려

한사코 거절하는 집사님에게 조금 더 넉넉히 수고비를 챙겨드릴 수 있었다.

집사님 또한 이제 한참 나이든 몸을 더 열심히 부지런 내며

살림을, 엄마 마음을, 우리 사정을 챙겨주었다.

여러 어려움들을 함께 겪어낸 집사님이 더더욱 둘도없는 우리의 가족이 되어가는 동안

나는 회사일이 바빠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졌고,

나중에는 급기야 폭탄선언을 하며 독립을 해버렸다.

집사님을 만나는 일조차 드물어진 동안 나는

엄마를 통해 집사님이 이제 꽤나 나이가 들었고,

집사님의 골다공증은 이제 정말 헤어져야 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을만큼 심각한 문제가 되었으며,

성미언니 또한 집사님 건강을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곤 했다.

그러나 팍팍한 사회생활에 내 코가 석자였던 나는

전처럼 집사님에게 내 마음의 지분을 나눠주지 못했다.

만나지를 못하니, 걱정도 그닥 되지 않았다.

그저, 엄마의 말에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는 정도의 근심.

가끔, 집사님은 요즘 괜찮으시지? 묻는 정도의 마음.

그마저도 돌아서면 잊었다. 부모님도 주말에나 한번쯤 만나며 지내는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리 고마웠던 집사님을 잘 챙겨드리지도 못한 주제에,

집사님에게 한껏 화를 내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일이

영영 이별이 될거라는 것을

나는 또 몰랐다.

사회생활을 하고, 돈을 벌어, 내 앞가림을 하고 사는 어른이 되었음에도

나는 집사님의 골다공증을 덮어놓고 믿었던 때처럼

모르는게 많았다. 지나고나서야 아, 하는 순간들은

나이가 들어도 줄지를 않았다.






오랜만에 월.금 연재로 돌아왔습니다.

아이들 방학 끝나면 주2회 연재를 다시 돌아오겠다 말씀드렸었는데

이런저런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다보니 벌써 몇 주가 훌쩍 지났어요. 죄송합니다.

'그 시절, 나의 아줌마들'은 이제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어요.

막바지라도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동안 응원과 이해 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려요.

마무리까지 잘 이어가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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