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기도마저 치매라는 놈이 잡아먹었다
양집사님의 근황은 종종 내게도 전해졌다.
집사님의 거동은 꽤 오래동안 편치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엄마 말로는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집사님의 목소리는 씩씩하다고 했다.
고맙게도 집사님은 종종 엄마에게 안부를 전해왔고,
조금 길게 연락이 없다 싶으면 엄마가 먼저 전화를 해보기도 하며,
일하시는 건 힘들더라도
한 번쯤은 만날 날이 있겠지, 우리는 기대하고 있었다.
집사님 또한 "얼른 나을테니 여정엄마 기다리고 있으소." 하며
본인의 쾌유를 약속하기도 했다.
그 사이, 성미언니는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소식을 들은 엄마는 내심 서운해하면서도
그 장소에 함께 있을 성호 오빠를 만나는 것도 불편한 일이고,
아직 휠체어 신세라는 양집사님도 모습을 보여주기 껄끄러워할 것이라며
축의금이라도 보내기를 바랐다.
그러나, 집사님은 집사님답게 한사코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엄마는 다음에 만날 때에라도 꼭 전하겠다며 뒤늦은 축하를 보냈지만,
성미언니의 결혼소식은 엄마에게 또다른 걱정이었다.
아직 거동이 불편한 집사님을 성미언니가 가까이 살며 챙긴다고는 해도 쉽지는 않을테고
어려서부터 골치 깨나 썩혔던 성호오빠가
집사님의 일상을 잘 챙길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막 결혼한 성미언니가 두집살림을 도맡기엔
그 몸과 마음이 얼마나 고단할지 가늠이 되니
엄마는 가끔이라도 집사님이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들어야 마음을 놓곤 했다.
그러나,
종종 주고받던 연락은 조금씩 뜸해졌다.
마지막 통화에서의 집사님 목소리가 영 힘이 없었기에 걱정이 된 엄마가
몇 번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받지를 않는다고 했다.
갑갑한 노릇이었다.
그 때쯤에는 누구나 가지고 있던 핸드폰도 집사님에게는 없어서
집전화를 받지 않으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성미언니는 핸드폰이 있을텐데, 진작 번호를 알아놓지 않았던 자신을
엄마는 탓했다. 집사님이 떠오를 때마다 "맹꽁이! 어우 이 맹꽁이!" 하며
스스로를 쥐어박기도 하는 날들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녁 늦게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별 일 없지?" 하는 첫 인사 목소리가 심상찮았다.
전 날, 성미언니에게 전화가 왔었다고 했다.
회복이 느려도 조금씩 나아지던 집사님이
몰라보게 말도 이상해지고, 행동도 낯설어지기 시작하더니,
얼마 전, 기어이 치매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증세가 심해지면서 집사님은 성미언니 신혼집으로 옮겼는데
그래서 엄마의 연락이 닿지 않았을거라고도 했다고 했다.
사실 언니 결혼식 즈음에도 이미 어느정도의 전조증상이 있었다고 했다.
심하지는 않으나, 집사님도 본인의 증상을 인지하고 있기에
혹여 엄마와의 통화에서 실수라도 할까봐 연락조차 못하고 지내면서도
갈수록 엄마 얘기를 하는 것이
증세가 더 심해지기 전에 통화라도 하는 것이 모두에게 낫다는 판단이라며,
혹시라도 통화 중에 좀 이해가 안되는 말이 있더라도 이해 부탁한다는 연락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 전, 집사님과 통화를 했는데
집사님은 목소리에 힘이 없었고, 말수도 부쩍 적어졌다고 하며
아마도 본인의 정신에 자신이 없어서인듯 하다고 전화 너머에서 엄마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가 치매판정을 받아 요양원에 가 계신 참이었다.
자존심 강하고 꼿꼿하기 이를 데 없던 할머니는
내가 대학교 졸업을 앞둘 무렵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하시곤 했다.
장농 속에 군것질꺼리를 넣고 잠궈두던 습관은 이내,
과일, 떡, 우유까지 넣고 잠궈두는 통에
할머니 방은 수시로 썩은내가 진동했고, 엄마의 성화에도 할머니는
턱을 높이 쳐들고 "난 그런 적 없다." 며 고집을 부리셨다.
어느 날은
본인의 돈을 내가 훔쳐갔다며 내 머리채를 잡는 일도 있었고,
부축해 일으키려는 엄마 팔뚝을 잇자국이 생기도록 물기도 했다.
IMF도 지나갔고, 피아노 레슨도 그만두었으며, 자식들도 다 키워낸 엄마는
이제 좀 여유를 즐기며 살아볼까 하던 중에
평생 버거웠던 시어머니의 치매 수발을 시작해야 했다.
할머니의 병세는 점점 심해져서
수시로 집을 나가거나, 집안을 이리저리 뒤짚어 놓는 통에 엄마는 꼼짝을 못했다.
간혹, 알 수 없는 할머니의 화가 치받는 날에는
온 집안이 전쟁터였다. 눈에 띄는 누구하고든 싸우려고 드셨다.
치매가 얼마나 몹쓸 병인지 집사님은 알고 있었다.
치매가 심해질수록, 자식들 마음의 병도 깊어가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여정히 할머니는 그리 여정엄마를 들들 볶더니, 이제는 치매까지 걸려서 와이리 골치인교!"
하며 엄마를 다독이던 집사님이었다.
본인이 치매에 걸렸다는 비보를 전해듣자마자,
집사님은 할머니를 떠올렸을 것이다.
몰래 나간 할머니를 찾아 엄마와 함께 온 동네를 뒤지고 다녔던 기억,
나의 머리채를 잡고, 엄마의 팔을 물었던 난폭했던 할머니의 표정,
방 청소를 해주려고 들어가는 집사님을 밀치고 할퀴던 할머니의 날들.
집사님은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성미언니도 떠올렸을 것이다.
내심 애틋하고 자랑스러워 했던 막내딸. 그럼에도
장남을 챙기느라 고기반찬도 인색하게 줬던 막내딸.
스리슬쩍 딸 자랑을 늘어놓다가도, 딸도 좀 챙기라는 엄마의 잔소리만 나오면
"딸자식이 자식인교!" 라며 괜히 쥐어박는듯 던졌던
본인의 말들이 떠올라 정신보다 마음이 더 무너졌을 것이다.
할머니가 또 집을 나가 엄마와 집사님이 오후내내 온 동네를 뒤지고 다녔다던 날.
집에 잡혀 와 언제 그랬냐는듯 색색 잠든 할머니를 가만 들여다보던 엄마는
이내 며칠을 앓아누웠다.
IMF로 난데없이 낯선 동네로 이사를 한데다가, 매일이 살림 걱정이었을 엄마였다.
거기에 이사를 오고나서 급속도로 할머니까지 증세가 심해지니
내색 않던 엄마도 무너졌으리라.
집사님은 오시지 않는 요일임에도 엄마와 할머니 걱정에 출근을 하셨고,
나도 서둘러 퇴근을 해서 집사님과 함께 저녁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이정아. 엄마한테 잘해라.
메느리한테 곁을 한 번 안 주더니 저리 마지막까지도 고생을 시키노 느이 할머니는.
곱게 가는 노인들도 많다드만, 느이 할머니는 가는 길도 참말 요란타 요란해.
느이 외할머니는 얼매나 고왔노. 아파서 끙끙 앓아도 자식들한테 짐 한 번 안되고
그리 곱게 가시드라야. 그게 복이대이. 폐 안 끼치고 곱게 가는게 최고 복이대이."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누구보다도 싫어했던 집사님이
모두에게 고통이 되는 못된 놈에게 덜미를 잡혀버리고야 말았다.
곁에서 기웃거리는 것만으로도,
집사님의 인생은 늘 바람과는 달리 흐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욕심 부리지 않고, 원망하지도 않고,
뭐 딱히 바라는 것 없이 사셨던 집사님이 오로지 기도했던 것은
곱게 가는 것.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 기도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요란한 길을 떠나고 계셨다.
정신이 돌아오는 때마다 집사님이 얼마나 수많은 절망을 세고 계실지
마음이 쓰라렸다. 그놈의 치매에 이가 갈렸다.
"이정아, 집사님이 너랑 통화하고 싶어 해."
"응? 집사님 나랑 통화할 수 있대? 엄마와도 망설이셨다며."
"통화는 하고 싶은데, 망설이긴 하시더라. 괜찮다고 이정이가 남이냐고 엄마가 설득했어."
나는 너무 반가웠으나, 한 편으로는
집사님의 마지막 목소리일지도 모르는 그 통화에
나는 무슨 말을 해 드려야 하나, 어떤 말이면 집사님의 마음이 좀 위로가 되려나,
마음 속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조만간 괜찮을 때 전화하신댔는데, 전화가 오거든
별 말 하지마. 그냥 집사님 편찮으신거 모르는 척 해.
집사님이 너가 고마워서 꼭 통화를 한 번 하셔야 한다더라.
모르는척 집사님 얘기 듣고 네 마음 전하고. 그렇게 해."
"내가 고맙다고? 뭐가 고맙지?"
"너가 대학생때라던가. 그 날을 집사님이 기억하고 있더라.
그 이는 그 정신에도 어쩜 그걸 기억하니."
엄마가 설명을 시작해도 나는 얼른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나? 내가 그랬었나?"
날듯말듯한 기억을 더듬는 내게 엄마는
"그래서 집사님이 왜 그러냐고 뭐라고 했더니 너가 그랬대.
맞잖아요. 우리 가족이잖아요. 그랬다더라. 그랬었니?"
아... 그 순간 나는
그 날의 일이 밀물처럼 머릿 속에 쏟아졌다.
나는 기억도 못하던 그 일. 너무 당연하여 별다를 것 없던 그 일.
집사님은 자꾸 갉아지는 기억들 와중에
그 날의 에피소드를 꼭 붙들고 계셨다.
몸보다 마음이 괴로울 상황 속에서도
참 보잘 것 없던 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찾아내어
고맙다고 전하고 싶어 하셨다.
집사님을 집에 오지 못하게 막고, 그래놓고도 모른척 외면하고 있던 나는 잊고,
다정했던 그 날의 나만 기억하고 계시다고 했다.
집사님이 좋았던 기억을 떠올릴수록, 나는
나의 못되었던 마지막이 그림자처럼 늘어져,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그래도 집사님이 꼭 잡고 있다는 그 기억에
미안했던 마음에 조금이나마 다행함이 일었다. 죄스러웠던 기억에 고마움을 찾아낼 용기도 생겼다.
집사님은 치매조차 집사님다웠다.
집사님을 집에 들이지 않겠다 고집을 부렸던 일을 내가 후회하고 있는 것을 안다는 듯이
집사님은 치매소식까지도 위로로 전해오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