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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집사님 1

외할머니의 유산

by 이정

페페아줌마가 우리집에서 오래동안 자랑을 늘어놓지 못하고,

(다행스럽게도 짧은 기간만 머물 수 있었던 것은 양집사님이 오시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중학교 1학년이 되었을 무렵,

나의 사랑하는 외할머니는 암선고를 받으셨다.

'마음을 꼭꼭. 씹는다' 에서도 언급한 적 있는 외할머니는

내가 가장 존경하던 분이셨고, 엄마 맘의 기댈 곳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소화가 잘 되지 않으신다며 식사 후에는 늘 사이다를 드셨었는데

그 때, 병원에 가 보았어야 했다.

양의를 믿지 않는 외할아버지는 자식들의 간곡한 청에도 단호하셨고,

그렇게 외할머니의 병은 아무도 모르는 새 깊어가고 있었다.


다섯 남매 중에 막둥이었던 엄마는 친정 반대를 무릅쓰고 아빠와 결혼한 터였다.

땡전 한 푼 없는 홀어머니의 장남. 아빠의 타이틀은

어려운 살림에서도 곱디곱게 키워온 외할머니를 무너뜨리고도 남았다.

결혼 후에는 외할머니의 가장 사랑하는 막내사위가 되었지만,

엄마는 결혼을 앞두고 흘렸던 외할머니의 눈물이 잊혀지지 않아

시집살이나 고단한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외할머니에게 털어놓지 못했다.

아니,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친정 한 번 오는 것에 시어머니 눈치를 열 번은 봐야하는 막내딸을

외할머니는 모를리 없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막내딸의 막내딸은 몸이 아파서 연이은 수술을 받아야 했고,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외할머니의 심정은 미어졌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암선고를 받고, 별다른 치료방법조차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엄마와 이모는

일사천리로 외할머니 보살피기 프로젝트를 진행시켰다.

삼선교 한옥집에서 살던 외할머니를 우리집 뒷 동으로 이사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한옥집은 외할아버지가 결코 떠나기를 원치 않으셨으나

몸이 힘든 외할머니가 지내시기엔 아파트가 훨씬 편할 것이라는 판단이었을테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시고 살 수는 없으나 가까이서라도 외할머니를 챙기고 싶었던 두 자매는

이모까지 우리 동으로 이사오는 것으로 외할머니를 보살필 채비를 마쳤다.


나는 짬짬이 외갓집에 휘적휘적 놀러가서

외할머니 안마도 해드리고, 말동무도 해드리곤 했다.

외갓집에 가면 집안 일을 도와주시는 양집사님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늘상 부엌이나 어딘가에서 분주하게 바쁘신 분이었다.

그닥 살가운 성격이 아닌지, 내가 와도 인사만 간단히 하고,

엄마가 와도 "왔는교." 하고는 하던 일만 열심이었다.

외할머니와 같은 교회를 다니며 오랜 인연이었다는 양집사님을

외할머니는 많이 의지하셨다.

엄마도 그런 양집사님이 고마워서 외갓집에 갈 때마다

고기 반 근, 과일 몇 개라도 챙겨 드리고는 했다.ㅡ

그 때마다 양집사님은 손사래를 치며

"여정이 엄마 와이라능교." 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셨다.

외할머니는 틈만 나면 엄마를 붙잡고 양집사님 칭찬이 늘어졌는데

"사람이 진짜 좋대이. 어제는 저 부엌 살림을 나 편하라고 다 아래로 정리하고..."

하며 혀를 내두르시던 외할머니의 표정은 여전히 생생하다.


외할머니는 1년정도의 투병을 끝으로

결국 돌아가셨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처음으로 겪었던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모르는 이들 앞에서 목을 놓아 울었다.

조금 더 자주 놀러갈걸, 하룻밤 정도는 외할머니랑 오붓하게 자볼걸,

외할머니 인생 얘기도 많이 물어볼걸, 외할머니의 탕국이 먹고 싶으면 나는 이제 어떡하지.

내가 외할머니의 죽음으로 한동안 우울히 지냈으니,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가늠이 되지 않는다.

나는 철 없게도 엄마의 마음까지 챙기지는 못했다.

저녁 설겆이를 하는 엄마의 뒷모습이 들썩이는 것을 종종 보았으나,

뭐라고 위로를 해야할지, 어떻게 도움이 될지,

망설이기만 하며 시간은 흘러갔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며칠 안 되어

페페아줌마가 떠나고, 양집사님이 우리집으로 오셨다.

외모도 성격도 무뚝뚝한 양집사님이었지만,

나는 외할머니가 그리 의지하던 분, 외할머니와의 시간을 떠올리게 해주시는 분, 이라는 것만으로도

나는 양집사님이 너무 좋았다.

엄마도 마치 친이모를 만난듯 양집사님을 따르고 믿었는데

엄마가 양집사님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들은

이전의 아줌마들에게 하던 것과는 다른, 아주 속내 깊은 것들이었다.


어디가서 집안 일을 말하고 다니길 아주 꺼렸던 엄마였지만

마치 외할머니에게 털어놓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꺼내놓듯이

양집사님에게만큼은

시어머니 얘기, 시댁식구들 얘기부터 시작해서

나와 동생 걱정, 아빠 걱정을 지나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음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말수가 적었던 양집사님은

묵묵히 엄마 말을 듣다가도 외할머니 얘기가 나오면

엄마와 함께 김치를 버무리던 손으로 눈물을 훔치다가

"이 보소. 여정이엄마 때문에 내 눈이 또 뻘개지게 생기지 않았능교." 하며

울다 웃다 하시곤 했다.


모든 아줌마들은 엄마를 '이정이 엄마' 라고 불렀었다.

그런데 양집사님은 꼭 내 동생 이름을 붙여 '여정이 엄마' 라고 불렀었는데

나는 그것이 서운하다기보다는 이상하고 낯설어서

엄마에게 그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다.

"글쎄, 엄마도 잘 모르지만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양집사님한테

나 죽으면 우리 막둥이 좀 보살펴달라고, 시어머니는 보통 아니고 막내딸까지 아파서

걔 속이 속이 아닐거라고 허구헌날 부탁하셨다더라.

그래서 양집사님이 우리집에 오시기로 한거야.

아마 여정이가 아픈 얘기를 많이 하셔서 여정이엄마라고 부르게 된건가?"


아. 양집사님은

외할머니의 유산이었다.

외할머니는 돌아가신 후에도

양집사님을 통해서 엄마를 보살피고 계셨고,

나에게 외할머니와의 따스했던 기억이 빛바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꽤 오랫동안 나는

엄마 몰래 혼날 짓을 하거나 하면

외할머니가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있을 것 같은 생각에

화들짝, 하던 짓을 거둬들이곤 했었는데

양집사님은 내게 그런 존재였다.

외할머니 대신 나를 지켜봐주고 있는 분.

나는 사춘기 중학생 답지 않게

무뚝뚝한 양집사님에게 자꾸 다가가서

말도 걸고, 주스도 따라드리고, 학교에서 오는 길에 친구들과 간식이라도 사먹게 되면

조금 남겨와서 입 속에 쏙 넣어드리곤 했다.

양집사님에게 속엣 얘기를 꺼내놓던 엄마처럼 나도

외할머니와 더 가까이 지내지 못했던 후회를

양집사님에게 자꾸 풀어내게 되었다.

쉴 틈 없이 잰 발걸음으로 집안일을 하시는 양집사님은

늘 두 손이 바빠서 내가 먹을 것을 입에 쏙 넣어드리면

"이 뭔데?!" 하며 당황하시다가 이내

"이정이 너 아껴야 잘 산다. 뭐 이런거에 돈을 쓰고 그래." 하면서도

오물오물 맛있게 드셨다.

"맨날 맛있게 드시면서 뭘! 좋음서 왜 잔소리하능교." 하며 집사님 말투를 흉내내면

어이없다는 표정을 애써 지으며 나를 째려보시다가

더는 못 참고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시곤 했다.


우리는 양집사님을 통해서

외할머니의 빈자리를 조금씩 메꿔가고 있었다.

엄마는 어디 가서 마음껏 흘리지 못하던 눈물을

양집사님 앞에서 펑펑 흘려보냈고,

나는 외할머니에게 하고팠던 사소한 것들을

양집사님에게 해가며 슬픔을 비워내는 중이었다.


"나 죽으면 우리 막둥이 좀 보살펴주소."

외할머니의 사랑은 죽지 않고

우리 곁에서 양집사님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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