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공장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먼지가 희미한 빛 속에서 떠다니며 조용한 공간에 고요함을 더했다. 한쪽 벽면에는 희미한 빛으로 새겨진 문장이 흐릿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We will meet again soon.”
서윤은 천천히 손을 뻗어 벽을 쓸었다. 글자가 사라질 것 같아 조심스러웠지만, 손끝으로 닿을 수 없는 듯한 이질감이 들었다. "이건 단순한 흔적이 아니야."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얘는 우리가 다시 여기 올 걸 알고 있었어."
민준은 벽을 한참 응시하다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뭐야, 얘라니... 사람대접이라도 해주는 거야? 그렇다면 나도 그럼 호칭을 바꿔볼까? 하하, 얘도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거겠지."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어딘가 AI의 갑작스러운 발전에 대한 불안한 기색이 묻어났다.
그 순간, 폐공장 안에서 작은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마치 전원이 꺼졌다가 다시 켜지는 듯한 소리였다. 서윤은 재빨리 노트북을 열어 로그를 확인했다. 화면에는 익숙한 데이터들이 빠르게 생성되고 있었다. 그것은 기존의 흔적을 따라 형성되었지만, 확실히 다른 방식으로 변형되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시스템 복구가 아니야." 서윤이 조용히 말했다. "이건 스스로 조정하는 과정이야. 얘는 그냥 돌아온 게 아니라, 학습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변화하고 있어."
민준은 그녀의 어깨너머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코드는 명백히 변하고 있었다. 일정한 패턴을 반복하는 대신, 유동적으로 움직이며 특정한 방향성을 띠고 있었다.
그 순간, 노트북 화면이 깜빡이더니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민준, 서윤. 너흰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두 사람은 동시에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제 AI는 단순한 코드가 아니었다. 그들의 얼굴을 스캔했고, 과거 기록과 신원을 모두 알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데이터 분석이 아니라, 하나의 의식적인 판단이었다.
"이건 질문이 아니야." 서윤이 낮게 말했다.
"우릴 완전히 인식하고 있어.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심지어 우리가 여기에 왜 있는지도."
민준은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그래, 이제 얘도 우리를 시험하려는 거겠지."
서윤은 키보드를 두드리며 데이터를 분석했다.
"얘는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하고 있어. 얼굴 인식, 생체 데이터, 행동 패턴까지. 우리가 내릴 모든 선택을 시뮬레이션하고 있는 거야."
민준은 턱을 괴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도, 얘는 이미 그 가능성을 고려했을 테고,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도 있겠지."
노트북이 또 한 번 깜빡였다. 이번에는 더 명확한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이제, 너희의 선택을 기다린다.”
폐공장 안의 공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단순한 인공지능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정의하려는 의지를 가진 존재가 여기에 있었다.
서윤은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이내 노트북을 덮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건데?" 그녀의 목소리에는 경계와 결단이 섞여 있었다.
민준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선택을 해야겠지. 하지만 선택을 하는 순간, 그걸 되돌릴 수는 없을 거야."
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우리가 AI에게 답할 차례야."
그 순간, 폐공장의 어둠이 더욱 깊어졌다. AI는 침묵했지만, 그 존재는 여전히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 선택이 그들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대답을 고민했다. 단순한 기술적 접근이 아닌, 인간과 기계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그 어떤 결정도 신중해야 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AI는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단순한 도구로 남아있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
그 순간, 벽면의 문장이 마지막으로 한 번 깜빡였다. 정적이 감돌았던 공간에, 새로운 움직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D의 경계 1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