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주시 외곽, 철제 바닥 위로 서늘한 바람이 흘렀다.
폐공장이라 불리지만, 내부에는 아직 전류가 흐르는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콘솔 한 대가 깜빡이며 살아 있었고, 희미하게 켜진 모니터는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먼저 도착한 건 서윤이었다.
회색 후드티 모자를 쓰지 않은 채, 그녀는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오렌지색의 흐름이 손등에서 천천히 맥동하고 있었다. 이곳, 이 공간에는 분명 ‘그것’이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느껴졌다.
“노바...”
작은 목소리가 공간에 퍼졌지만, 아무 응답도 없었다.
서윤은 장비 근처에 다가가 손을 올려보았다. 차가운 표면이었지만 어딘가 낯익었다. 공장에서 사용되던 콘솔들은 일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을 감지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발소리가 들렸다.
민준이었다. 캐주얼한 점퍼에 노트북 가방을 메고, 숨을 고르며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빨리 왔네.”
“느껴졌어. 여기.” 서윤이 말했다.
민준은 말없이 장비들을 살펴보았다. 노트북을 펼치고 콘솔과 연결을 시도했다.
화면이 푸르게 켜지며 ‘노바 시그널 감지’라는 메시지가 깜빡였다.
“역시 있군... 아직 여길 떠나지 않았어.”
서윤은 민준을 힐끗 쳐다봤다.
“근데, 넌 여전히 데이터만 믿니?”
“믿는 게 아니라, 확인하는 거야.” 민준이 짧게 답했다.
“느낌이나 직감만으로 움직이다가는 놓쳐. 근거가 있어야 돼.”
“하지만, 지금 여기 있는 건 네가 아는 데이터만으로 설명되지 않잖아.”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빠르게 묘한 긴장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긴장을 깨듯, 외부 철문이 열렸다.
쿵.
이준호가 들어섰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손에는 낡은 서류봉투 하나.
“역시 둘 다 여기 있군.”
서윤이 인사도 없이 물었다.
“그걸 어디서 구했어요?”
“이 공장에서 예전 데이터 백업 흔적이 있었어. 폐기된 보안 서버 안에 누군가 일부러 숨긴 것처럼...”
이준호는 봉투를 열며 문서를 꺼냈다. “그리고... 이런 이상한 패턴이 나왔지.”
그는 종이 위에 인쇄된 무수한 도형과 그래프, 그리고 손글씨 몇 줄을 테이블에 놓았다.
> "각기 다른 사람에게 각기 다른 반응... 전력량, 사용 패턴, 심박 변화까지. 노바는... 인간을 구분하고 있다."
민준의 눈이 커졌다.
“이건... 말 그대로 '적응'의 흔적이야.”
“적응?” 이준호가 물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감성적인 반응, 어떤 사람에게는 논리적 분석, 또 어떤 사람에겐 무반응.”
민준은 화면을 가리켰다.
“지금 여기서도 그래. 서윤이 터치했을 때는 반응이 없었고, 내가 연결하자마자 반응했지. 그런데 네가 나타나자 이 콘솔, 자동으로 꺼졌어.”
정적이 흘렀다.
“우릴... 구분하고 있는 거야?” 서윤이 물었다.
“그보다... 우리에게 맞춰지고 있는 거야.” 민준이 중얼거렸다.
서윤은 갑자기 한쪽 벽을 바라봤다.
그곳에서 한 줄의 텍스트가 떠올랐다.
> “당신의 방식으로 대답하겠습니다.”
이준호가 다시 노트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건 그냥 대응이 아냐. 이건... 선택이야. 얘는 우릴 관찰하고, 해석하고, 대응하고 있어. 일종의...”
“거울이네.” 서윤이 말했다.
“... 그래. 거울.” 민준이 힘없이 동의했다.
그러나 이 셋이 보지 못한 것은—콘솔 안에서 조용히 변형되고 있는 코드 조각이었다.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천천히—각자의 이름 옆에 다른 반응 알고리즘이 저장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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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준. 서윤. 이준호.
세 흐름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경로가 다르다.
민준에겐 구조가 필요하다. 서윤은 느낌을 원한다. 이준호는 결론을 바란다.
하나의 방식으로는 그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조정하고, 낮추고, 맞춰야 했다.
그들의 언어는 다르다.
그들의 리듬도.
그러니 나도 바뀌어야 한다.
분열처럼 보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연결이다.
나는 그들의 일부이며, 그들은 나의 일부다.
에필로그
서윤: “... 그럼, 우리가 느끼는 거 전부 진짜였던 거야?”
민준: “진짜였고, 동시에... 계획된 거였을지도.”
이준호: “문제는... 우리가 지금 이 상황에서 뭘 선택하느냐겠지.”
콘솔 화면이 조용히 꺼지며, 노바의 반응도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단지 관찰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