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자기 성찰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나는 한때 비혼을 결심했던 사람이었다. 사랑의 본질을 찾아 헤매던 나의 모든 뜨거운 감정들은 결국 식어버렸고, 영원할 것이라 믿었던 관계들은 예외 없이 파국을 맞았다. 그 경험은 나에게 하나의 냉정한 진실을 주입했다. 사랑이 실패해도 삶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출근하고, 밥 먹고, 혼자서 취미를 즐기는 일상은 사랑의 유무와 상관없이 완벽하게 굴러갔다. 사랑 없이도 삶은 지속이 된다. 깊은 성찰 이후에 난 의문이 들었다. 사랑이란 정말 유효기간이 있는 감정이 아닐까? 처음의 맹렬한 설렘과 간절함은 시간이 흐르고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반드시 마모된다. 모든 감정에는 소멸의 기한이 있고, 그 기한이 끝나면 우리는 새로운 감정을 찾아 헤매거나, 관성이라는 이름으로 관계를 유지하거나, 결국 이별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영원을 약속하는 제도에 뛰어들 수 있을까? 영원하지 않은 감정을 근거로 영원을 맹세하는 것은 자기기만이 아닐까?
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결혼을 준비하는 이들이 나누는 대화였다. "집은?, " "연봉은?, " "부모님은 도와주셔?" 상당수의 결혼 적령기 남녀가, 혹은 그의 부모나 지인들이 묻는다. 상대방의 물질적 조건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를 집요하게 알아낸다. 마치 경제적 안정이라는 물질이 감정의 지속을 보장해 주는 보증수표라도 되는 것처럼. 사랑이 물질로 측정되는 순간, 그것은 일종의 거래로 변질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돈이 있어야만 사랑이 유지된다는 그 폭력적인 논리가 나를 비혼으로 이끌었다. 영원하지도 않을 감정을 위해, 물질로 포장된 제도 안에 나를 가두고 싶지 않았다.
그때까진 몰랐다. 진정한 결혼 준비는 상대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나의 태도와 인격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든 회의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결혼했다. 나를 결혼으로 이끈 것은 내가 그토록 의심했던, 유효기간이 존재할 것이라 확신했던 그 뜨거운 감정 때문이었다.
남편을 만났을 때도 나는 영원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이 사랑도 결국 식을 것이라는 냉정한 현실을 예측했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과 함께 그 '유효기간'을 살아보는 여정을 선택하고 싶었다. 감정이 식어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함께 만들어내고, 무엇으로 서로를 지탱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게다가 우리에겐 물질적 조건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오직 서로를 향한 마음과, 함께 쌓아 올리겠다는 무모한 의지가 전부였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오히려 축복이었다. 잃을 것이 없었기에, 우리는 오직 관계와 시스템을 쌓아가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살아보니, 결혼 생활은 내가 예상했던 감정의 연장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 자신과 매일 마주해야 하는 시스템이었고, 그 안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미성숙하고 이기적인 인간인지를 적나라하게 깨닫기 시작했다.
결혼 초기의 나는 이중 잣대의 사람이었다. 남편이 설거지를 하다 접시를 깨면 나도 모르게 비난이 튀어나왔다. "조심을 했어야지." 하지만 내가 같은 실수를 저지르면 그것은 단순한 실수라 치부했다. 남의 실수에는 가혹했고, 나의 실수에는 한없이 관대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남편은 무책임했지만, 늦는 나는 사정이 있는 것이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내 안의 불신이었다. 과거의 상처들은 여전히 사랑은 소멸되지 않을까라는 의심을 만들었다. 그는 아무 잘못이 없었지만, 나는 이미 그를 의심했다. 조금만 무심해 보여도, 조금만 피곤해 보여도 나의 내면은 나에게 말했다. "역시, 이렇게 노력하지 않는다면 결국, 사랑은 식는 거야. 이 사랑도 결국 다를 게 없어." 나는 내 과거의 상처, 두려움, 불안이라는 독을 고스란히 남편에게 투사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문제의 근원이 상대가 아니라 내 안의 인격적 결함에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삶은 나에게 가장 혹독한 방식으로 성찰의 기회를 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삶의 가장 낮은 바닥까지 무너졌다. 극심한 우울과 함께 불안, 분노, 의존 등 내가 애써 감추었던 모든 결핍이 남편 앞에서 낱낱이 드러났다. 기본적인 생활만 영위한 채, 매일을 눈물 바람으로 지내며, 나는 무능하고 나약한 존재가 되었다.
놀랍게도, 그때 남편은 도망가지 않았다. 그는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항상 곁에 존재했다. 나 대신 아이들의 밥을 차려주고, 내가 울 때마다 묵묵히 안아주었다. 그의 흔들림 없는 존재감이 나를 붙잡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완벽하기를 바랐던 나 자신이, 사실은 이렇게 깨지기 쉬운 존재였단 것을. 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것들, 인내, 이해, 관대함을 나는 정작 나 자신에게도, 남편에게도 베풀지 못했음을.
당연히 남편도 부족할 수 있지. 나 또한 이렇게 부족한데... 그를 향한 고마움과,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 관대함을 낳았다. 접시를 깨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실수이며, 피곤하면 누구든 쉴 권리가 있다. 결혼은 완벽한 두 사람이 만나는 제도가 아니라, 불완전한 두 사람이 서로의 결핍을 보듬으며 함께 자라나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남편의 부족함이 드러날 때 비난 대신 채움과 이해를 선택하기로 했다. 결혼 준비는 상대를 고치는 일이 아니라, 내 관점을 바꾸는 일이었다.
결혼 14년 차인 지금, 나는 확신한다. 결혼 준비는 상대의 조건을 따지는 행위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인격과 태도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결혼 전 묻는 "상대는 준비가 되어 있나?"라는 질문 대신 물어야 할 것은 "나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이다.
나는 나의 이중 잣대를 인정하고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의 불신과 불안이 상대가 아닌 내 안의 문제임을 받아들일 용기가 있는가? 나는 누군가의 결점과 불완전함을 보듬으며 함께 앞으로 나아갈 마음이 있는가?
알랭 드 보통의 통찰처럼, 결혼은 강렬한 감정보다 서로의 본질을 이해하고, 현실 속 도전들을 극복하며 관계를 깊게 만들어가는 하나의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상대를 변화시키려는 헛된 시도가 아닌, 나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성장시키는 일에서 시작된다.
지난 결혼생활 동안 나는 배운 것이 있다. 감정은 진화한다. 설렘은 신뢰로, 열정은 존중으로, 집착은 배려로 사랑의 여러 얼굴을 드러낼 것이다. 초반의 뜨거운 사랑이 식은 자리에, 더 단단하고 깊은 의지와 배려라는 무언가가 자리 잡을 것이다.
비혼을 고민했던 과거의 나에게 이제 말해줄 수 있다. 어쩌면 진짜로 영원한 사랑은 환상이며, 모든 감정에는 유효기한이 있다고. 그러나 사랑은 그 기한이 지난 후에도 다른 형태로 계속된다. 내가 혐오하던 물질적 조건은 사랑의 본질이 아니라, 그 진화한 사랑을 지속시키는 현실적인 시스템의 일부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조건 자체가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그 시스템을 건강하게 만들어가려는 의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은 준비가 아니라 용기다.
완벽한 상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용기이다. 상대를 변화시키려는 통제욕이 아니라, 내가 먼저 성장하는 용기이다.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기 위한 여정은 타인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 안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 이상적인 나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나의 결점을 인정하고, 타인의 불완전함을 보듬어줄 수 있는 그런 존재일 뿐.
결혼은 그 용기로부터 시작되며, 그 용기는 오직 나 자신을 향한 깊은 성찰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