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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배달>
웃음이가 보내는 편지

여기 OO동 인데요, 웃음 하나요!

by 로만덕




9월쯤 <2024년 대한민국 손편지 공모전>에 이 편지를 제출했습니다만, 가볍게 떨어지는 바람에 자유롭게 공개할 수 있는 편지가 되었습니다. 올해 공모 주제는 "웃음 배달 편지", 부제는 "너랑 나랑 웃음 한 스푼"이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배달은커녕 그나마 남은 웃음기마저 날려버리는 편지가 된 건 아닌지...


좋은 편지는 어렵네요. 그래도 쓰면서 재밌었습니다. 동화를 쓰는 기분 같기도 하고, 주제가 정해져 있다 보니 오히려 더 쓰기 쉬운 느낌이기도 하고요. 뭐 다음엔 더 잘 쓸 수 있겠죠.


글씨도 이쁘게 써서 보내고 싶어 아내에게 대신 써달라고 부탁했는데, 이렇게 고마운 마음이라도 전해봅니다.


고마워 여보, 따봉~




이 편지를 열어주신 분께


안녕하세요, 웃음이에요. 무더운 여름, 몸 건강히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요즘 불러주는 곳이 없어 심심한 날들을 보내고 있어요. 옛날에는 낙엽만 굴러가도 저를 불러주시고 그랬었는데…


며칠 전엔 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달려갔어요. 오랜만의 호출이라 무척 신났거든요. 배달받는 곳은 높은 빌딩의 꼭대기였어요. 저는 들뜬 마음에 두세 칸씩 계단으로 막 올라갔죠. 하나도 안 힘들더라구요.


도착한 곳은 커다란 회의실이었어요. 똑똑, 조심스레 뒷문을 열고 들어갔어요. 까만 양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쭈르륵 앉아계셨고 회색 벽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선, 막대기, 숫자들로 빽빽했죠. 나쁜 일이라도 있었는지 다들 찡그린 눈썹에 화난 표정들이었어요.


준비해 온 가방을 열려는데 맨 끝에 앉아계시던 아저씨가 말했어요.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 오늘은 그냥 돌아가라고요. 삐 하고 쭉 늘어나는 피리풍선도 빵빵 터지는 폭죽도 모두 챙겨 왔는데, 바람 한 번 불지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니 조금 기운이 빠지더라구요. 내려오는 계단은 왜 그렇게 길게만 느껴지던지.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아무런 표정 없이 크고 작은 네모난 화면만 보고 계세요. 띵동 벨이라도 눌러볼까ㅡ하다 혼날까 봐 한 번도 누르지 못했어요. 소심하게 몇 번 기웃거려 봤지만, 눈길도 안 주셔서 괜히 무안하더라구요.


어쩌다 보니 하소연이 됐지만 기억에 남는 멋진 일도 있었어요. 어느 할머니의 생신을 축하하는 날이었어요.


코딱지만 한 할머니 집은 달동네 꼭대기에 있었어요. 꼬불꼬불 계단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했죠. 초록색 녹슨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교복 입은 여자아이가 저를 반겨주었어요.


그날은 할머니의 아흔 번째 생신이었어요. 색 바랜 꽃을 입은 스뎅 밥상 위엔 푹 익어버린 묵은지와 닭 미역국, 그리고 노란 통조림 귤 몇 조각이 올라간 생크림케익 하나가 놓여있었죠.


생일 촛불을 켜고 다 같이 노래도 불렀어요. 대낮이었지만 촛불은 어느 때보다 환하게 빛나는 것 같았어요. 폭죽도 풍선도 없었지만, 할머니는 밝은 미소와 함께 미역국 한 그릇을 꼭꼭 남김없이 드셔주었어요. 밥을 다 먹고 우리는 연필로 꾹꾹 눌러쓴 편지를 할머니께 읽어드렸어요. 할머니는 우리를 안아주셨어요.


행복했던 일, 아름다운 추억들이 참 많았어요. 그런데 이제 조금씩 기억이 가물가물해져요. 가끔은 아무도 저를 불러주지 않을 날을 떠올려요. 그렇다구 그냥 멍하니 앉아 있진 않으려구요.


쑥스럽지만 이렇게 편지 공모전에 편지도 써봤어요. 편지는 마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얘길 들었거든요.


아참, 행운의 편지 아세요? 편지를 받은 사람이 7명에게 답장을 보내면 행운이 온대요! 이게 행운의 편지일지 누가 알겠어요? 믿거나 말거나 소중한 사람에게 행운을 보내보는 거죠.


그러다 좋은 일이 생기면 전화 주세요. 저는 언제나 이곳에서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여기 OO동 인데요, 웃음 하나요!”


신속

배달 <웃음이>

999-4455(하하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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