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3세 (초등시절)
8세/
얼굴보다 큰 안경을 초등 1학년때부터 쓰며 입학을 했었던 나, 고도난시 때문에 무척이나 두꺼운 렌즈의 안경으로 어릴 때부터 일찍 착용했어야만 했었다.
거울에 비친 두꺼운 렌즈 안경을 착용한 나의 모습은 너무나도 우스꽝스러웠다.
어린 나이에 쓴 안경이 흘러내리지 않기 위해
기다란 안경줄까지 하고 다녀야 했었던 내 모습이 너무나도 싫었다.
입학을 하고 반 친구들 중 안경착용한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로지 나 한 명뿐이었다.
반친구들은 자신들과 다른 렌즈 두꺼운 안경을 착용한 나를 외계인이라도 만난 듯 아주 신기해했다.
그런 놀림당하는 게 싫어 어느 날은 안경을 벗어 잘 보이는 척 선생님이 쓰신 글씨를 보려 칠판을 부랴부랴 눈에 힘을 주며 응시했었지만 불규칙한 각막의 굴곡으로 눈의 불편함만 컸을 뿐이었다.
ㅡ보란 듯이 벗었던 안경을 다시 착용하기에는 나도
나를 용납할 수 없었기에 참아보려 발악을 했었다. 꿋꿋이!!!
ㅡ현재는
고도난시로 인한 각막굴곡으로 시력을 잃게 되는 원추각막까지 가졌지만
아직까지 시력 잃지 않고, 안경의 힘을 빌려 세상 모든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인 것에 감사하며 은혜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11세/
3학년까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이사를 하면서 4학년때부터는 새로운 초등학교에 대한 적응기간이 내게는 필요했었다.
새로운 초등학교로 전학 오게 되니 아니꼬운 시선으로 나를 보던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시선이 거슬렸지만 시간이 지나도 내게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ㅡ아~ 그 여자아이의 불편한 시선은 나만의 착각이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흘러 넘기며 학교생활을 해 나갔었다.
4학년 2학기 어느 날 하교하여 집으로 가고 있었던 나를
뒤에서 누군가가 밀쳐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지면서 한 주택 앞 주차금지로 세워둔 쇠간판에 오른쪽 무릎안쪽을 부딪히며 다치게 되었다.
그 아픈 중에도 나를 밀었던 사람을 알고 싶어 뒤를 쳐다보았더니 내가 전학 온 첫날 아니꼬운 시선으로 쳐다본 여자아이와 그 무리들이었고, 신나게들 낄낄거리며 자지러지게 비웃으며 내 곁을 지나갔다.
ㅡ난 그 다친 다리 아픈 순간 보다 나를 이유 없이 그렇게 괴롭히고 경멸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비웃던 그들 때문에 마음이 더 아팠다.
나는 그렇게 그 무더운 여름 통깁스를 하며 반개월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었고, 나를 업어서 등. 하교로 수고한 엄마에게 고맙고 미안한 새 학교의 생활이었다.
ㅡ병원에서의 통깁스 풀게 된 날
의사님 "여름인데도 깁스한 동안에 다리 관리를 아주 잘했구나, 수고 많았네", 라며
칭찬해 주시던 담당의사님의 말이 나를 아프게 했던 친구들로부터 사과를 받은 것만 같은 큰 위로가 될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은혜였었다.
13세/
6학년 방학기간 아침이라 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고열과 두통. 퉁퉁 부어오르는 얼굴, 목을 숙이면 뻣뻣한 종합적 신체 통증들이 찾아왔다.
고열과 망치로 머리 여러 방향에서 내 리치는 듯한 통증이 시간마다 간격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집과 가까운 동네병원이 있다는 걸 아신 엄마는 119도 부르시지 않으시고 옷이 다 젖어가기까지 땀 흘리며 나를 업고 급히 병원을 오셨다.
집 앞에서는 아픈 증상의 질병만 알 수 있었을 뿐, 조금 더 큰 병원으로 가서 빨리 치료받으라고 권하셨다.
동네병원에서 택시를 타고 큰 병원 응급실로 오게 되었다. 아무리 내증상이 긴급적일지라도 순차적으로 사람들이 치료받고 있던 응급실 상황이었다.
응급실안에서 난 나쁘지 않은 순서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웅크린 자세로 허리에 신경주사치료를 받게 되었다.
주사 후 잠을 자고 깨어났더니 내 옆자리에 3세 아기가
장이 꼬여 긴박한 순간 같아 보였지만 순차적으로 치료하고 있던 응급실이라 내 옆아기의 치료의 시간이 지연된 모습을 보고 있어야 했다.
순서가 밀린 아기는 결국눈을 감게 되었다.
옆자리의 있던 내가 그 아기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는 기도뿐이었다.
ㅡ내게 뇌수막염이라는 질병으로 극심한 통증이 있었으나 진단도, 치료도 빨랐기에 뇌수막염 후유증으로 오는 장애를 피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 은혜였었고, 응급실에서의 빠른 순번으로 치료하여 생명에도 이상 없었던 것에 또 한 번 감사할 수 있었던 은혜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