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생각난다. 누런색의 엄마 고양이와 회색 빛을 띈 아기 고양이가 저녁 빛이 드리운 그늘에 숨어 이동하고 있었다. 모든 동물들은 내 눈 속에 드리운 그리움을 읽는다. 특히 어린 동물일수록 이모나 고모에게 아이들이 갖는 친밀한 호기심으로 다가온다.
몇 년 전에 내 강아지가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스무해를 함께 한 후였고, 노환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까지 함께 하다가 내 품 안에서 눈을 감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였다. 나는 내 강아지와 함께 한 시간들을 아직도 그리워 한다.
머뭇머뭇 다가오다가 꼬리를 바짝 세우고 깡총깡총 뛰어가 버린다. 내 안의 그리움과 이제 다시는 동물에게 정을 주지 않으려는 결심이 그렇게 읽혔나 보다. 나한테 다가와 그르렁대던 엄마 고양이는 새끼를 낳은 후 한결 의젓하고 태연해져서 어리광을 부리지 않은 지 한참 되었다.
한 때는 동네 대장 고양이에게 쥐를 선물받기도 하고, 지인들의 사나운 강아지들이 내 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넌 날 굶어죽이지 않을 거야.'란 무한 신뢰를 보내곤 했는데, 그 모든 게 내 강아지에 대한 배신같아서 이제 그 애들을 쓰다듬어주지 않는다.
나를 지켜본 직장 상사는 내게 '동물 심리학자'가 어울릴 것 같다는 말을 뜬금없이 건넸다. TV에서 봤는데 내 생각이 나더란다. 나는 동물들이 뭘 원하는지 안다. 모든 동물들은 내가 자신들을 하나의 개체로 존중하고, 심지어 그리워하는 것을 안다. 내가 얼마나 진실하고, 헌신적일 수 있는지 믿는 눈치다. 발치에서 구구대는 비둘기들까지도......
간단하다. 나에겐 개미를 밟는 일조차 의식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렇다고 채식주의자까지는 아니지만 인디언들이 고기를 먹을 때 가졌던 경건함을 나는 이해한다.
살아가는 일이 사막을 걸어가는 일 같은 날, 천국에 전화를 걸고 싶다.
"마루야, 잘 있어?"
"응"
"엄마 안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나도 네가 무척 그리워. 사랑해."
"사랑해."
큰 노력 들이지 않고도 나는 내게 아픈 몸을 온전히 맡기고 얕은 숨을 내쉬던 내 강아지를 떠올릴 수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무릎 위에서 잠을 자서 결국엔 다리가 저려 내려 놓으면 내 발치에서 또 다시 잠들었는데 요즘 후회가 되는 건 근력을 좀더 키워서 좀더 안고 있지 않았던 일들이 마음에 걸린다. 그 시간이 이렇게 소중할 지 몰랐다.
나는 두 번 째 강아지를 키울 마음이 없다. 이제 마흔 중반이다. 책임이 뭔지 잘 안다. 강아지를 키운다는 것은 결혼과 비슷한 거라고 생각한다. 끝장나게 사랑해줘야 한다. 마치 처음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사랑을 잃은 허전함을 다른 사랑으로 채운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 한다. 사랑이 아니다. 마루라고 부른다. 어쩔 때 보면 사랑은 너무 이기적인 관념같다.
끔찍하게 외롭다. 북실북실한 털이 자고 있는 내 얼굴을 눌러 숨이 막혀서 깨어 보면 장난처럼 내 얼굴을 베고 누워 있던 마루가 생각난다. 나와 함께 산책할 때 노루처럼 깡총거리던 발랄한 걸음걸이, 밥그릇처럼 내 얼굴을 핥을 때 이상하게 차 오르던 자부심, 미루고 미루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자마자 무지개 다릴 건넜던 상냥함, 어쩌다가 사랑하게 된 그 모든 것들이 기적이었고, 축복이었고,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귀중한 사랑이었던 것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하지만 되감기 버튼을 누르듯이 또 다른 강아지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게 남은 것은 추억과 그리움 뿐이지만 누군가가 말했듯이 그리움도 사랑이다.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래서 꺼지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