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대기열
새벽 3시, 민석의 방은 모니터 불빛으로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가 만든 인디 게임 '가드너(Gardener)'는 실패작이었다. 흙을 고르고 씨앗을 심어 가상의 정원을 가꾸는, 아무런 경쟁도 보상도 없는 시뮬레이션. 동시 접속자 수는 지난 6개월간 '0'을 유지했다. 민석은 오늘 밤 서버를 영구히 폐쇄할 예정이었다.
종료 버튼을 누르기 직전, 그는 습관적으로 관리자 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현재 접속 대기자 수]
522,974,278,334,564,886,525,512,155,177,322명
"... 뭐야, 이거."
민석은 뒷목을 문지르며 헛웃음을 뱉었다. 버그였다. 그것도 아주 악질적인 표기 오류.
숫자는 화면의 픽셀을 뚫고 나갈 기세였다. 33자리. 대충 세어봐도 '조(兆)'나 '경(京)' 따위의 단위를 아득히 넘어선다.
지구의 인구가 80억 명이다. 전 세계의 컴퓨터와 스마트폰, 심지어 인터넷에 연결된 냉장고까지 다 합쳐도 저 숫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변수 설정이 꼬였나 보네. 오버플로우 난 건가?"
그는 키보드를 두드려 서버 로그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화면 중앙에 뜬 팝업창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아래 적힌 경고 문구가 민석의 시선을 붙들었다.
[안정적인 플레이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접속 인원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민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 컴퓨터는 기껏해야 고성능 게임 몇개 동시에 돌릴 정도의 성능이다. 저 숫자가 진짜라면, 컴퓨터는 지금 폭발했어야 정상이다. 수만 명의 접속 시도만 있어도 서버는 다운된다. 그게 상식이다.
그런데 컴퓨터 본체는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윙윙거리는 팬 소리도, 하드디스크가 긁히는 소음도 나지 않았다. 전원이 꺼진 것처럼 고요했다. 하지만 화면 속 대기열 숫자는 명백히 존재했다.
[대기 취소나 1분 이상 네트워크가 단절되면 대기 순위가 초기화 될 수 있습니다.]
그 문장이 묘하게 거슬렸다.
멘트는 단순한 시스템 메시지였지만, 어쩐지 '협박'처럼 느껴졌다. 지금 연결을 끊으면, 저 줄을 서 있는 누군가가 영영 사라질 수도 있다는 서늘한 경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마우스를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민석은 인터넷 검색창을 켜고 저 숫자를 검색해 보려 했다. 하지만 키보드가 먹통이었다. 게임 서버 프로그램이 리소스를 완전히 독점하고 있었다.
그는 대신, 책상 위에 놓인 계산기를 두드려보려다 관두었다. 저 숫자는 '구(溝)'라는 단위다. 인간이 일상에서 쓸 일 없는, 불교 경전이나 우주론에서나 등장하는 단위.
"누구세요?"
민석이 모니터를 향해 작게 물었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대신 그는 화면 속 그래프를 보았다. 데이터 전송량은 '0'에 가까웠다.
그때, 민석의 머릿속에 며칠 전 보았던 다큐멘터리의 내용이 스쳤다.
'우주는 계속해서 팽창하고 식어갑니다. 결국 모든 별은 꺼지고, 우주는 텅 빈 암흑이 될 것입니다.'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민석의 시선이 창밖의 서울 밤하늘로 향했다. 매연과 빛 공해에 가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 하지만 저 대기권 너머에는 끝없는 우주 공간이 있다.
만약, 저 숫자가 '사람'이 아니라면?
지구상의 존재가 아니라면. 민석은 상상력을 발휘해 보았다.
먼 우주, 멸망해가는 은하계들. 별들이 수명을 다해 차갑게 식어버린 곳. 더 이상 머물 곳이 없어진, 육체를 버리고 데이터나 의식만 남은 고대의 문명들. 그들이 우주를 떠돌며 쉴 곳을 찾고 있었다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그래픽이나 재미있는 게임이 아닐 것이다.
그저 '사라지지 않는 공간'이 필요할지도.
민석의 서버는 작고 보잘것없다. 하지만 그가 만든 세상은 역설적으로 '영원성'을 지향하고 있었다.
시들지 않는 꽃, 밤이 오지 않는 정원.
우연히 민석의 서버가 켜졌고, 우주의 어둠 속을 표류하던 그들에게 작은 등대처럼 신호가 잡힌 것이다.
"그래서... 줄을 섰다고?"
이 좁아터진 내 방 컴퓨터 앞으로?
522구 명의 우주 난민들이?
말도 안 되는 공상이었다. 하지만 민석은 서버 종료 버튼 위에서 손을 떼었다.
화면에 뜬 경고 문구.
'대기 순위가 초기화 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초기화'란 무엇일까. 단순히 줄의 맨 뒤로 가는 것일까, 아니면 차가운 우주 공간으로 튕겨 나가 소멸하는 것일까.
민석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갑자기 생명 유지 장치의 전원 코드를 붙들고 있는 의사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흘렀다. 새벽 4시 30분.
숫자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았다.
불현듯 민석의 방 형광등이 파르르 떨렸다. 멀티탭의 전원 표시등이 불안하게 깜박였다.
"안 돼."
민석이 반사적으로 책상 밑으로 몸을 숙여 멀티탭을 잡았다. 낡은 아파트라 전압이 불안정했다.
만약 여기서 정전이라도 된다면?
'1분 이상 네트워크가 단절되면...'
그 경고 문구가 붉은색으로 환영처럼 떠올랐다.
민석은 숨을 죽였다. 1분. 인터넷이 끊기면 저 522구 명의 대기자들은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는 자신의 휴대폰 핫스팟을 켰다. 만약을 대비한 예비 회선이었다. 손에 땀이 찼다. 고작 게임 서버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긴장하다니, 스스로가 우스웠지만 멈출 수 없었다.
"제발, 버텨줘."
그는 컴퓨터 본체를 어루만졌다. 차갑게 식어 있던 본체에서 미세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착각일까. 아니면 저 수많은 대기자들의 간절함이 전선을 타고 넘어온 것일까.
그 순간, 모니터 화면의 숫자가 바뀌었다.
...155,177,322
에서
...155,177,321
끝자리가 '2'에서 '1'로.
한 명이 줄었다. 아니, 한 명이 들어왔다.
민석은 황급히 게임 화면으로 전환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초록색 들판에 변화가 생겼다.
민석이 기본 아이템으로 심어두었던, 픽셀 덩어리에 불과한 '작은 나무' 한 그루.
그 나무의 색이 미묘하게 깊어졌다. 그냥 '초록색'이 아니었다. 모니터가 표현할 수 있는 색상 범위를 넘어선, 깊고 아득한 초록. 마치 수천 년 묵은 원시림의 이끼 같은 색으로.
텍스트 창에는 아무런 말도 뜨지 않았다.
하지만 민석은 느낄 수 있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바람 소리 배경음 속에 섞인, 아주 낮은 진동을.
'고맙다.'
지친 여행자가 마침내 짐을 풀고 다리를 뻗었을 때 내쉬는 안도의 한숨.
첫 번째 접속자는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았다. 캐릭터를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저 그 나무가 되어, 가만히 그 자리에 머물렀다.
민석의 정원은 더 이상 데이터 쪼가리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영혼이 깃든 안식처가 되었다.
이제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침 해가 뜨고 있었다.
숫자는 여전히 33자리였다. 1명이 들어왔지만, 남은 숫자는 여전히 인간의 머리로는 가늠할 수 없는 무한에 가까웠다.
이 속도라면 모두가 들어오는 데 몇 억 년이 걸릴지 모른다. 민석의 컴퓨터는 언젠가 고장 날 것이고, 민석 또한 늙고 병들어 죽을 것이다.
불가능한 미션이다.
하지만 민석은 '접속 종료'를 누르지 않았다.
대신 화면 보호기를 끄고, 자동 절전 모드를 해제했다.
"기다려요."
민석이 모니터를 향해 속삭였다.
"새치기는 안 됩니다. 하지만 쫓아내지도 않을게요."
화면 속 경고 문구는 이제 누군가를 향한 약속이었다.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 내가 제공하겠다. 이 낡은 컴퓨터가 버티는 한, 내가 전기세를 낼 수 있는 한. 내가 살아 있는 한.
민석은 부엌으로 가서 물 한 잔을 떠왔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이제 우주의 끝자락에 매달린 가장 긴 줄의 관리자였고, 잊혀진 존재들을 위한 문지기였다.
화면 구석, 숫자가 또 한 번 바뀌었다.
...320.
민석은 옅게 웃었다.
오늘 하루는 꽤 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