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단편 - 잘려나간 계절

잘려나간 계절

by ToB

숟가락이 사기그릇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김치찌개 위로 더운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찌개 속의 두부를 건져내기 위해 손목을 젖혔다. 목이 말랐다. 왼손을 뻗어 식탁 한가운데 놓인 물잔의 표면을 쥐었다. 손끝에 맺힌 물방울의 차가운 감각이 선명했다.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손끝에 닿은 것은 유리잔이 아니었다. 거칠고 두꺼운 합성 섬유였다. 겨울용 외투였다. 나는 현관문 앞 차가운 타일 위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던 소리는 사라졌다. 대신 현관 센서등이 일정한 주기로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며 내 발끝에 짧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니?"


어머니가 식탁에 앉은 채 물었다. 식탁 위에는 찌개가 있었다. 더운 김은 사라졌고, 국물 위로 하얀 기름띠가 굳어 있었다.


"밥 먹으러 가자며."


내 목소리는 평온했다. 방금 전 숟가락을 들며 하던 생각의 자연스러운 연장이었다. 어머니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걸 네가 다 먹어치우고 왜 또 찾아."


나는 거실 벽의 시계를 보았다. 아홉 시 사십 분. 내가 밥 먹으러 방에서 나온 시간은 일곱 시 십 분이었다. 두 시간 반이라는 물리적 시간이 내 인지 밖으로 새어 나갔다.


대학병원 신경과 진료실의 독한 소독약 냄새에 계속해서 기침이 나왔다. 의사는 내 뇌를 촬영한 단층 사진을 모니터에 띄웠다.


"시냅스 과잉 가지치기(Hyper-Pruning) 현상입니다."


의사가 볼펜 끝으로 흑백의 뇌 사진을 가리켰다.


"수명 연장 시술의 부작용 중 하나죠. 육체의 노화는 멈췄지만, 뇌의 저장 용량은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뇌가 스스로 붕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최근의 인지 활동을 무작위로 잘라내어 버리는 겁니다."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건가요?."


내가 물었다.


"단순히 잃어버리는게 아닙니다. 망각은 이미 기록된 후에 희미해지는 과정을 말하는 겁니다. 반면 환자분의 뇌는 아예 '녹화' 기능을 특정 구간에서 꺼버립니다. 그 시간 동안 육체는 평소 습관이나 본능에 따라 움직이지만, 자아나 의식은 그 시간을 인지하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겁니다."


치료법은 없다고 했다. 텔로미어 연장에 대처하는 뇌의 물리적인 생존 본능이라 했다. 흔한 증상은 아닌데 운이 나쁘다는 의사의 말이 가슴 깊숙이 치고 들어왔다. 통증도 없이, 내가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연속된 시간은 점차 조각나고 있었다.


수명도 늘리는 세상에 치료 못하는 병이 있다는게, 그리고 그게 하필 나라는게 억울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나는 조용히 살아가기로 했다. 내게 시간은 바늘땀을 건너뛰는 재봉틀처럼 움직였다.


정신을 차리니 나는 불이 켜진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었다. 냄비 안의 검은 덩어리에서 매캐한 연기가 솟아올랐다.


눈을 깜빡였다.


플라스틱 의자의 차가운 촉감이 엉덩이에 닿았다. 파출소였다. 형광등 불빛이 희게 빛났다. 경찰관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다시 눈을 깜빡였다.


따뜻한 물이 정수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욕실 바닥에 맨몸으로 앉아 있었다. 어머니의 거친 손이 수건으로 내 등을 문질렀다.


"제가 씻을게요."


"가만히 있어."


어머니의 대답은 짧았다. 그녀의 시선은 내 얼굴이 아니라 내 쇄골 부근의 허공을 향해 있었다.


시간의 도약은 점차 간격을 넓혀갔다. 내가 의식을 차릴 때마다 내 주변의 세계는 빠른 속도로 부패했다.


거실 구석의 관음죽은 잎이 누렇게 말라 비틀어졌다가, 다음 순간 앙상한 줄기만 남았고, 결국 흙먼지만 날리는 빈 화분으로 변했다.


어느 날부터 집 안 공기에서 냄새가 났다. 젖은 먼지, 오래된 소변, 곰팡이가 뒤섞인 냄새. 거실 바닥과 벽지에는 짙은 갈색의 얼룩이 늘어갔다. 형제들의 외투가 걸려 있던 현관 앞 옷걸이는 비어 있었다. 신발장의 구두들도 사라졌다. 그들이 언제 짐을 쌌는지, 어떤 말을 남기고 문을 나섰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그들이 사라지고 남은, 커지고 낡아버린 집이라는 결과만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의 주름은 내가 의식을 회복할 때마다 깊게 패였다. 흰머리가 정수리를 덮고, 허리가 굽어갔다. 그녀는 무너져가는 건물의 마지막 관리인처럼 집 안을 배회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은 꺼져 있었다.


바닥에 사기그릇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붉은 김칫국물이 장판의 결을 따라 스며들고 있었다.


어머니가 바닥에 웅크린 채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목구멍 안쪽을 긁는 듯한, 탁하고 무거운 곡성이었다.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 엄마 너무 힘들어."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내 오른손 마디가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보았다. 엎드린 어머니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왼쪽 광대뼈 부근이 검푸르게 변해 있는 것을 보았다. 핏줄이 터져 멍이 번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강하게 맞은 흔적 같아보였다.


하지만 집안에는 나와 어머니뿐이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벽시계를 보았다. 멈춰선 시계 아래 달력은 유월을 가리키고 있었다. 베란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따스했다. 그사이 계절이 달라졌다.


나는 나를 둘러싼 환경의 붕괴가 내 병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했다. 내가 돌봄이 필요한 환자이고, 가족들이 지쳐 집안이 엉망이 된 것이라고 여겼다.


완벽한 오산이었다.


나의 뇌가 시간의 기록을 멈춘 그 맹점 속에서, 의식을 놓은 육신은 폭력을 휘두르고 집을 부수고 어머니를 때렸다. 나의 뇌는 생존을 위해 '스트레스'로 작용할 그 잔혹한 폭력의 순간들을 정교하게 도려냈다.


나는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가엾은 피해자가 아니었다. 알지 못하는 사이, 누군가의 삶을 밟고 지나가는 쪽에 더 가까웠다.


내 손이 어머니의 얼굴에 남긴 멍 자국을 응시했다. 죄를 지었다는 감각조차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변명할 기억마저 없는, 피해자의 비명조차 듣지 못하는 완벽한 가해자의 탄생.


어머니가 울다 지쳐 방으로 들어간 직후, 눈에 보이는 가방에 두꺼운 옷가지를 쑤셔 넣었다.


아파트 단지 앞 놀이터로 걸어갔다. 미끄럼틀 아래의 모래를 맨손으로 퍼서 가방에 담았다. 손톱 밑으로 거친 흙이 파고들었다. 지퍼가 닫히지 않을 때까지 모래를 채웠다. 가방을 어깨에 멨다. 나일론 끈이 쇄골을 짓눌렀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 위해 무게를 늘릴 필요가 있다.


택시를 잡았다.


"강변으로 가주세요."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선을 그으며 뒤로 밀려났다. 눈을 깜빡이면 안 된다. 또다시 시간이 도약해버리면, 나는 이 택시 안에서 증발하여 다시 그 부서진 거실로 돌아가 있을 것이다.


주먹을 쥐고 계속해서 내 이마를 내리쳤다.


둔탁한 타격음이 났다. 통증이 이마를 타고 정수리로 번졌다. 통증만이 나를 현재라는 시간축에 묶어두는 유일한 닻이었다.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나를 흘끔거렸다. 눈이 마주쳤다.


다시 이마를 쳤다. 기사는 당황한 듯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빨리 도착해야 한다. 내가 폭력으로 뭉친 짐승으로 다시 변하기 전에. 이 무거운 가방을 메고 차가운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창밖으로 검은 강물이 보였다. 수면이 가로등 불빛을 산란시키고 있었다.


손잡이를 당겼다. 차 문이 열리고 강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을 떴다.


천장의 벽지 무늬가 보였다. 등 아래로 얇은 이불의 감촉이 느껴졌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부엌에서 어머니가 도마 위에서 파를 썰고 있었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찌개 냄비가 올려져 있었다.


집 안은 깨끗했다. 화초는 푸른 잎을 뽐내고 있었고, 곰팡이 냄새는 나지 않았다.


"일어났니?"


어머니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광대뼈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피부는 매끄러웠고 머리칼은 검었다.


"밥 먹자."


나는 식탁 의자를 빼고 앉았다.


이마를 만져보았다. 부어오른 흔적은 없었다. 어깨를 짓누르던 모래 가방의 무게도 사라졌다.


꿈이었나.


아니면, 강물에 뛰어들기 직전의 그 찰나의 순간에 내 뇌가 마지막 생존 본능을 발휘하여, 거대한 시간을 거꾸로 건너뛰어 오래전의 어느 평온한 아침으로 나를 밀어 넣은 것일까.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


어머니가 찌개를 그릇에 담아 내 앞에 놓았다. 숟가락이 사기그릇에 부딪히며 맑은소리를 냈다.


나는 입을 다문 채, 이 숟가락을 국물에 담그고 다시 눈을 깜빡였을 때 내 눈앞에 나타날 풍경을 상상했다.


더러운 장판, 썩은 화분, 그리고 멍든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던 어머니의 모습.


내일일지, 십 년 뒤일지, 혹은 바로 다음 1초 뒤일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천천히 국물을 떠서 목구멍으로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