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습도
서울의 하늘은 거대한 돔으로 덮여 사시사철 쾌적한 인공 대기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서진의 가게 '회향(廻鄕)'이 위치한 구도심의 골목만은 예외였다. 돔의 배수 시스템에서 흘러나온 잉여 수분이 모이는 곳, 그래서 일 년의 절반은 눅눅한 안개에 잠겨 있는 거리. 서진은 그 축축함을 사랑했다. 건조한 것은 바스러지기 쉽고, 너무 젖은 것은 썩기 마련이나, 적당한 습기는 사물을 질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물포 '회향'의 문을 열면 가장 먼저 코끝을 스치는 것은, 수백 년 묵은 닥나무 껍질이 발효되는 시큼하고도 구수한 냄새와 송연묵의 알싸한 향이었다. 가게 안은 시간의 유속이 느려진 듯 고요했다. 천장까지 닿은 오동나무 약장에는 수천 개의 서랍이 있었고, 그 안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심상지(心象紙)'들이 잠들어 있었다.
이 시대의 기억은 더 이상 뇌세포 사이를 표류하는 전기 신호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들은 벅찬 환희나 감당할 수 없는 비탄을 마주할 때면 닥나무 섬유에 감응성 뉴런 단백질을 배합한 특수 한지, 즉 '심상지' 위에 그 잔상을 덜어내곤 했다. 덜어낸 기억은 물성을 가진다. 첫사랑을 기록한 면은 갓 피어난 목화솜처럼 보드랍고, 배신의 기록은 찢긴 깃발처럼 살을 할퀴며, 죽음의 편린은 대개 차가운 돌처럼 굳어진다.
서진은 그 기억들을 다루는 지장(紙匠)이자, 망가진 마음을 수리하는 수복사(修復師)였다.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젖은 공기를 가르며 울었다. 쇳소리가 아닌, 물 먹은 나무토막끼리 부딪치는 둔탁하고 깊은 소리였다. 예약된 손님이 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여자는 문지방을 넘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빗물에 젖은 코트 자락이 무겁게 바닥을 쓸었고,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진 얼굴에는 핏기가 전무했다. 그녀의 양손은 가슴께에 소중히 품은 자개함을 감싸 쥐고 있었는데, 그 손등에는 붉은 생채기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긁힌 상처가 아니라, 예리한 칼날에 베인 듯한 얇고 깊은 절창(切創)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진이 낮은 목소리로 찻물을 따르며 말했다.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이 안경알을 뿌옇게 흐렸다. 여자는 대답 대신 떨리는 손으로 자개함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툭, 하는 소리가 유난히 무겁게 울렸다. 종이나 천이 담긴 함에서 날 소리가 아니었다.
"이것을... 봐주세요."
여자의 목소리는 오래된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듯 건조했다. 함의 뚜껑이 열렸다.
서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안에는 학 한 마리가 놓여 있었다. 칠 년 전,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경이로운 첫 울음소리의 파동을 담아 접었다는 종이학이었다.
그러나 지금, 본래의 희고 고운 닥종이의 질감은 온데간데없었다. 학은 시퍼렇게 날이 선 청자 파편처럼, 혹은 벼려진 흑요석처럼 흉측하게 경화되어 있었다. 날개 끝은 살을 에는 칼날처럼 예리했고, 부리는 송곳처럼 뾰족했다. 표면에는 미세한 결정들이 소금꽃처럼 돋아나 있었는데, 닿기만 해도 피부를 찢어발길 듯한 살기를 뿜어냈다.
"처음엔... 갓 쪄낸 백설기 같았습니다. 만지면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고 젖비린내가 났지요."
여자가 멍한 눈으로 학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아이가 사고로 떠나고 삼 년이 흘렀습니다. 제가 이 아이를 그리워할 때마다, 품에 안고 울 때마다 학은 조금씩 변해갔습니다. 처음에는 뻣뻣해지더니, 나중에는 딱딱해졌고, 이제는..."
서진은 장갑을 끼고 대나무 핀셋으로 학을 조심스럽게 집어 올렸다. 종이답지 않게 묵직했다.
"만지면 베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수없이 베였습니다."
여자가 코트 소매를 걷어 올렸다. 서진은 찻잔을 내려놓던 손을 멈칫했다. 손목부터 팔꿈치 안쪽까지, 성한 구석이 없었다. 오래된 흉터 위에 새로운 상처가 덧입혀져, 피부 전체가 붉은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워서, 너무 그리워서 만지려 하면 이 아이는 제 손을 찌릅니다. 손끝이 아니라 가슴이 난도질당하는 것 같습니다. 피가 흐르는데도, 아픈 줄도 모르고 저는 밤새 이 뾰족한 것을 쥐고 웁니다. 제 피가 묻으면 아이가 더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 같아 닦아내려 하지만, 닦을수록 날은 더 날카로워집니다."
서진은 핀셋을 내려놓고 돋보기를 들어 학의 표면을 살폈다.
단순히 종이가 딱딱하게 경화된게 아니라, 화학적으로 다른 물질로 변해버린 듯 했다.
어미가 삼 년 동안 흘린 눈물. 그 속에 담긴 처절한 염분과, 뇌파에서 전이된 비탄의 신경 전달 물질이 종이의 섬유질 사이로 침투했다. 닥나무 섬유는 슬픔이라는 과도한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수축시켰다.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기억을 보존하려는 방어 기제가, 역설적이게도 기억을 가장 날카로운 흉기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행복했던 기억이 순수할수록, 그 부재가 남기는 슬픔의 앙금은 더 단단하고 날카로운 법입니다."
서진이 읊조렸다. 위로는 없었다.
"이 학은 너무나 맑은 기쁨이었습니다. 불순물이 없는 순도 100퍼센트의 환희였기에, 변질될 때도 이토록 잔인하고 단단한 결정체가 된 것입니다. 무른 쇠는 휘어지지만, 강한 쇠는 부러지거나 남을 부러뜨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자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눈물 한 방울이 탁자에 떨어진 학의 날개 끝에 닿았다. 치이익, 하는 미세한 소리와 함께 날개 끝이 더욱 시퍼렇게 빛났다. 슬픔을 먹고 자라는 괴물의 모습이 언뜻 비쳐보였다.
"수복해 주십시오. 예전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종이로 되돌리고 싶어요."
여자가 애원했다.
하지만 서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능합니다. 깨진 도자기를 굽기 전의 흙으로 되돌릴 수 없듯, 한 번 경화된 비탄은 다시 부드러운 종이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게 자연의 섭리입니다. 억지로 유연제를 써서 풀려 한다면, 이 학은 그 즉시 재가 되어 바스러질 겁니다."
"그럼... 저는 평생 이 아이를 만질 수 없습니까? 이 흉기를 안고 피를 흘려야만 합니까?"
여자의 절망이 좁은 공방을 가득 채웠다. 서진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작업대 구석, 먼지 쌓인 작은 함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이전 상태로의 '복구'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서진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다른 방식의 '보존'은 가능합니다.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차가운 것을 덮어 따뜻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칠(漆)입니다."
여자를 돌려보낸 후, 서진은 공방의 문을 걸어 잠갔다. 빗줄기가 굵어져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흡사 누군가의 노크 소리처럼 들렸다.
그는 작업대 중앙에 놓인 칼날 같은 학을 응시했다. 그리고 깊은 한숨과 함께, 구석에 방치해 두었던 자신의 함을 가져왔다.
자개로 봉인된 옻칠 함. 몇 년째 열지 않았던 판도라의 상자.
서진은 망설임 끝에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검붉게 탄 숯덩이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일그러진 탄화물이 들어있었다.
본래는 그의 아내, 연(蓮)이 혼례 때 끼워주었던 쌍가락지였다.
5년 전, 화재 사고가 있던 날. 연은 불길 속에서 서진의 연구 데이터를 지키려다 빠져나오지 못했다. 뒤늦게 도착한 서진이 잿더미 속에서 찾아낸 것은, 이 녹아내린 옥 가락지뿐이었다. 영롱하던 비취는 화마를 견디지 못하고 검은 숯이 되어버렸다.
서진은 맨손으로 그 숯덩이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을 찌르는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탄화된 옥의 파편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아..."
신음이 새어 나왔다. 손바닥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와 검은 숯 위로 떨어졌다. 피와 재가 섞여 질척였다.
그는 여자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기억은, 특히 사랑하는 이를 잃은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날카롭게 가공된다. 잊지 않으려 애쓸수록, 그 기억은 뼈를 깎는 칼이 되어 주인을 난도질한다.
서진은 피 묻은 손을 닦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벽장 깊숙한 곳에서 칠장(漆匠)의 도구들을 꺼냈다.
옻나무 수액을 정제한 생칠(生漆), 찹쌀풀, 고운 황토 가루, 그리고 삼베 조각들.
그는 여자의 의뢰품인 학을 작업대 위에 고정했다.
"섭(攝)을 해야겠구나."
섭은 틈을 메우고 모서리를 감싸는 행위다. 깨진 그릇을 이어 붙이고, 날 선 모서리에 살을 입혀 둥글게 만드는 포용의 기술이다.
서진은 찹쌀풀과 생칠을 섞어 호칠(糊漆)을 만들었다. 끈적하고 누런 액체에서 톡 쏘는 독한 냄새가 올라왔다. 옻은 본래 나무가 입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다. 자신을 해치려는 곤충이나 균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뿜어내는 맹독성 방어 물질. 인간의 피부에 닿으면 발진을 일으키고 전신을 붓게 만드는 그 독이, 역설적이게도 사물을 천 년간 썩지 않게 만드는 최고의 보존제가 된다.
'독으로 상처를 덮는다. 이보다 더 지독한 아이러니가 있을까.'
서진은 붓을 들었다. 학의 날카로운 날개 끝, 여자의 손목을 그토록 잔인하게 그었던 그 예리한 모서리에 첫 번째 칠을 올렸다.
검붉은 옻이 칼날 같은 종이의 단면을 덮었다.
단순히 칠만 해서는 안 된다. 뼈대를 만들어야 한다. 서진은 얇게 저민 삼베 조각을 칠 위에 덧대었다. 이것은 기억의 뼈대가 될 것이다. 그 위에 다시 황토 가루와 칠을 섞은 토회(土灰)를 발랐다. 이것은 기억의 살점이 될 것이다.
뼈를 세우고 살을 입히는 과정. 날카로운 비탄을 두툼한 옻의 막으로 감싸 안아, 더 이상 누구도 찌르지 못하게 만드는 봉인의 의식.
서진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옻의 독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목덜미가 가렵고 열이 올랐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사흘 밤낮으로 작업이 이어졌다. 칠하고, 말리고, 갈아내고, 다시 칠하는 인고의 시간이었다.
칠장은 '기다림'의 예술이다. 특히 건조 과정이 기묘하다. 옻은 건조하고 따뜻한 곳에서는 절대 마르지 않는다. 오히려 섭씨 25도, 습도 75퍼센트 이상의 눅눅하고 축축한 환경에서만 단단하게 굳어진다.
습기를 머금어야만 비로소 단단해지는 성질이다.
서진은 칠장에 넣어둔 학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 눈물이라는 습기를 머금고, 슬픔이라는 축축한 시간을 견뎌야만 비로소 단단하게 아물어 썩지 않는 기억이 되는 것이 아닐까. 건조하게 말라버린 슬픔은 바스러지지만, 눈물을 머금은 슬픔은 보석처럼 굳어진다.
학의 형태가 변해가고 있었다.
날카롭던 부리는 둥글게 다듬어졌고, 살을 베던 날개 끝은 두툼하고 유려한 곡선을 되찾았다. 더 이상 하얀 종이학은 아니었다. 칠흑처럼 검고, 깊은 광택을 머금은 흑학(黑鶴)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서진은 마지막 공정으로 '나전(螺鈿)'을 준비했다.
거친 파도를 견뎌낸 전복 껍데기. 그 안쪽에 숨겨진 영롱한 무지갯빛 자개 조각들을 얇게 켜냈다. 그는 핀셋으로 자개 조각 하나하나를 학의 날개 위에 심었다.
검은 슬픔 위에 내려앉은 영롱한 빛.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 선명해진다. 고통이 깊었기에, 그 위에 피어난 아름다움은 더욱 처연하고 찬란했다. 상처를 없애기보다, 이미 베인 자리를 꽃으로 덮은 것이다.
닷새째 되는 날 새벽, 비가 그쳤다.
작업대 위에는 밤하늘을 조각내어 빚은 듯, 깊고 그윽한 빛을 발하는 검은 학 한 마리가 고요히 앉아 있었다.
여자가 다시 회향을 찾았을 때, 그녀의 손에 감겨 있던 붕대는 풀어져 있었다. 하지만 흉터는 여전했다.
서진은 말없이 검은 비단 보자기를 풀었다.
여자의 눈이 커졌다.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또다시 베일까 봐, 또다시 피를 볼까 봐 두려운 본능이 앞섰으리라.
"만져 보십시오."
서진이 나직하게 권했다.
여자는 떨리는 손끝을 조심스럽게 학에게로 가져갔다. 손가락이 학의 머리에, 날개에, 꼬리에 닿았다.
베이지 않았다.
차갑고 날카로웠던 감촉 대신, 미지근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을 감쌌다. 겹겹이 올려진 옻칠은 사람의 체온을 닮아 따스했고, 둥글게 다듬어진 곡선은 아이의 볼살처럼 매끄러웠다.
"아..."
여자가 학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뺨을 비볐다. 검은 옻칠 위로 그녀의 눈물이 떨어져 흘러내렸다. 눈물은 스며들지 않고 표면에서 굴러떨어졌다. 이제 이 기억은 더 이상 눈물을 흡수하여 변질되지 않는다. 슬픔을 튕겨내며, 영원히 그 모습을 유지할 것이다.
"모양이... 변했군요. 색도, 질감도, 모든 것이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무게는 그대로네요."
여자가 젖은 눈으로 웃었다. 아주 희미하지만, 처음으로 보여준 미소였다.
"내 아이의 무게입니다. 겉모습은 변했지만, 그 안에 담긴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겠습니다. 이제 안아줄 수 있어요. 아무리 세게 안아도... 아프지 않습니다."
여자는 품에 학을 꼭 안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개들이 별처럼 반짝였다. 슬픔을 극복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훈장 같았다.
"고맙습니다. 지장님."
여자가 떠난 후, 가게 안에는 다시 적막이 감돌았다. 비가 갠 뒤의 햇살이 창틈으로 비스듬히 들어와 먼지들을 비췄다.
서진은 텅 빈 작업대에 홀로 앉았다. 그의 시선이 다시 구석에 놓인 자신의 함으로 향했다.
그는 천천히 함을 열었다.
숯덩이가 된 아내의 옥 가락지가 보였다. 여전히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그를 찌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진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여자의 학을 칠하고 남은, 붓 끝에 묻은 옻칠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나를 위할 시간이다.'
서진은 떨리는 손으로 숯덩이를 집어 들었다. 바스러질 듯 위태로운 그 검은 조각에, 끈적한 옻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검은 숯이 검은 옻을 빨아들였다. 서로 다른 어둠이 만나 하나로 섞여들기 시작했다.
이 작업이 끝나도 옥 가락지는 다시 푸른색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검은색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만질 때마다 피를 흘리지는 않으리라. 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옷감을 태우거나 살을 찌르지 않으리라.
언제든 꺼내어 어루만지며, 그날의 불길이 아닌, 연(蓮)의 따뜻했던 온기만을 기억할 수 있으리라.
서진은 붓을 들어 본격적으로 칠을 올리기 시작했다.
가게 안의 습도가 서서히 올라가고 있었다. 옻이 마르기 딱 좋은, 축축하고 다정한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