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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림 Nov 26. 2024

part3. 내 자신 스스로의 선택

이제는 행동할 때이다

part3. 내 자신 스스로의 선택

   처음과 시작

누구에게나 처음과 시작은 존재한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태어나는 순간, 세상 밖으로 나와 눈을 처음 눈을 뜨고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과, 처음 접촉해보는 엄마의 품.

그렇게 우리는 저마다 시기는 다르지만 세상 밖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똑같다.

부모도 부모가 처음이고, 나라는 존재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시도 또한 처음이다.

가족이라는 관계를 맺는 것도 처음이고, 친구를 만나는 것도 처음이다. 사회에 접하는 것도 처음이며, 무언가를 배우는 데에도 처음이 존재한다.

그렇게 점점 나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필시, 스스로 받는 상처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겪게 되는 부정적인 감정은 없다.

‘사람’과 ‘환경’, 그리고 ‘사회’라는 틀로부터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을 겪게 되고, 상처를 받는다.

상처나 트라우마, 부정적인 감정 그 모든 것들에도 처음이 존재한다.

처음은 ‘잘못’이 아니다. 내 스스로 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겨나는 아픔들은 외부적인 요소로부터 받게 된다.

그것이 부정에너지의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   환경

사람은 자기가 어떠한 환경에서 자라나고, 경험하고, 성장해나가는지에 따라 천차만별로 성격이 형성된다. 기질과 성향은 보통은 유전적인 힘이 강하기도 하지만, 후천적으로 환경으로 만들어져 고착되는 경우 또한 많다.

처음 우리가 태어난 순간 이후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다. 누군가는 고아원에, 보육원에 보내져 자라나기도 한다.

벌써 여기서부터 사람의 인생은 갈림길이 생겨난다. 그것이 환경이다.

누구는 부유한 부잣집에 태어나고, 누구는 흙수저라 불리는 가난한 집에 태어난다.

누구는 가득 사랑을 넘치도록 받으며 자라나고, 누구는 방치나 학대 속에서 자라난다.

육아시기부터 아동시기를 거쳐 청소년, 성인이 될 때까지 우리는 환경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 하물며, 자기 집안의 형제자매가 어떻게 구성되있느냐에 따라서도 우리의 성격과 성향은 수없이 많은 갈림길들을 사다리게임하듯, 이리저리 걷게 된다.

여기 까지는 우리는 선택사항이 없다.

선택을 할 수 없는 시기에 받게되는 상처들은 막을 방법은 없다.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성향과 기질, 성격을 가지게 될지는 자아가 온전히 형성된 이후, 거의 성인이 다 되어가는 무렵 알게된다.

   자기방어

자기방어는 쉽게 말해, 의도해도, 의도하지 않아도 생존 본능에 따라 나를 위협하는 모든 것에 관하여 방어자세를 취한다.

중요한 건, 이 시점이다.

어린 시절의 과정은 내가 어찌할 도리가 크게 없다 한들, 성인이 된 직후의 우리는 선택이란 걸 할 수 있게 된다.

‘힘’이 없을 때와는 달리, 이제부터는 우리 스스로의 인생이라는 길을 개척해 나가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내가 어떠한 상처를 처음 받게 되고, 그것이 크게 각인이 되어 나의 뇌는 저장을 한다.

위기상황이라고 해석해버린 뇌는 같은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그때부터는 방어기제를 취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어기제가 옳게 작용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잘못된 방식으로 방어기제를 형성한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나는 아주 어릴 적, 부모님이 자주 싸우는 소리에 처음 받게 된 상처는 ‘소리’였다.

어린 시절이라 사리분별이 되지 않는 나이임에도 부모님의 싸우는 모습과 소리는 분명, 나를 불안에 떨게 했다.

접시가 깨지는 소리. 소리를 지르는 소리. 나를 위협하는 소리라 인식해버린 순간, 나의 뇌는 30대까지도 따라붙으며 괴롭혀왔다. 이것이 트라우마가 된 케이스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짜증내거나, 누군가와 말다툼을 할 때 언성이 높아지거나, 실수로 접시를 크게 떨어트리거나 할 때도 나의 방어기제는 어김없이 자동반사였다.

그러다 보니, 그런 소리를 내는 상대에게 ‘강요’란 걸 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의 ‘선택’인 영역이었다. 누군가는 방어기제로 잠수를 타거나, 누군가는 공격적으로 폭력을 행사한다거나, 누군가는 타인의 말을 대놓고 무시하거나, 누군가는 조롱하거나, 누군가는 과시하거나, 누군가는 도망친다.

이렇게 뇌는 가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다는 잘못된 판단의 오류로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조절하는 능력이 있지 않은가.

머리와 가슴속으로는 본능적인 욕구가 솓구쳐 올라도, 우리는 절제하고 조절하며 만들어 나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우리는 스스로 ‘선택’을 함으로써, 그 ‘선택’의 연속이 모여 인생이 만들어지고,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   핑계라는 합리화

위에서 얘기했듯, 나의 방어기제는 ‘강요’가 되었다.

타인에게 나의 상처를 꺼내보이며 ‘나는 이런 상처와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라는 타이틀을 붙여, 상대에게 ‘그러니 너는 이런 상처를 나에게 줘서는 안 돼.’라고 이미 정해진 나만의 정답을 내놓으며 강요를 했다. 그 강요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반복해서 같은 상처를 주는 상대에게는 내 뜻이 먹힐 때까지 집착을 했고, 공격성이 드러났다.

오히려 ‘소리’라는 트라우마가 있다는 사람이 정작 본인이 상대에게 소리를 치고 있었다.

내 뜻을 들어주지 않아서 말이다.

이렇게 나의 상처는 곧, 핑계로 포장이 되고, 그 포장이 단단해지면 합리화로 태어난다.

비합리적인 합리화가 태어나는 과정이다.

내 스스로의 모습을 깨닫지 못했던, 무의식과 같은 상태였지만. 나는 충분히 그런 상태였다 하더라도,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서 스스로 절제하고 조절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나도 모르게 작동되어버리는 무한반복의 굴레 속에서부터 벗어나기까지는.

그러나 이 것을 읽은 당신은 좀 더 빨리, 이제는 스스로 어떤 상황이 와도 ‘인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가 상처라는 것을 무기 삼아, 핑계삼고 있진 않은 지,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 않은가.

잘못하면 우리의 핑계와 합리화는, 소시오패스, 나르시스트처럼 더 악화되어 변질되기 싶고, 더 나아가면 우린 병적으로 합리화 하는데에 집착하게 되면, 상대에게 아주 쉽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암묵적인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   잘못 씌워진 색안경=

이렇게 꽤 오랜 세월 합리화가 지속이 되면 우리의 뇌는 더욱 고장이 난다.

‘고착’. 생각이나 행동패턴이 오랜세월 지속되고 반복되어 뿌리처럼 굳어져 자리잡는 것.

고착이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편견’, ‘고정관념’이 자리잡는다.

우리 모두는 그 동안 살아오는 세월동안 겪었던 모든 경험들을 데이터화 해서 통계를 내려 판단하고 평가하는 버릇이 된다.

나의 기준 안에서만, 나의 경험 안에서만 판단하고 평가를 내리는 잘못 된 색안경은 타인을 괴롭게 한다.

흔히 어린 학생들이 ‘틀딱’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처럼. 혹은, 어르신이 살아온 세월만큼 젊은 사람들을 보며 쯧쯧 혀를 내두르며 가르치는 것처럼. 그렇게 색안경을 쓴 채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이런 잘못 씌워진 색안경을 스스로 벗어 내려놓지 않는다면, 영원히 불편한 상황을 계속 맞딱트려야 할 것이며, 늘 불만이 넘치게 되고, 부정적인 에너지만 극대화 될 것이다.

색안경을 벗으면, 온전히 있는 그대로의 날 것의 ‘진짜’색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

어렵다면, 내가 산 꼭대기 정상까지 올라가 아래 세상 천지를 내려다 본다고 생각해 보자.

산 밑에 있었을 땐 보이지 않던 모습들이 산 정상에서는 드넓게 보이는 것처럼, 우리의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우물안의 개구리’가 되지 않으려면, 타인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괴롭히는 이 색안경을 얼른 벗어던지자.

   고집

어쩌면 고착의 다른 말. 고집.

보통의 어르신들의 고집이 매우 쎈 것 처럼, 어린 아이가 갖고 싶은 것을 가질 때까지 온갖 떼를 쓰며 땡깡부리며 울고불고 하는 것 처럼, 색안경은 고집을 만들어 낸다.

고집은 저자는 다른 말로, 욕심이라 말하고 싶다.

위에서 말했듯, 저자는 잘못된 합리화로 상대에게 끝까지 집착과 강요로 내 뜻에 순종하도록 만들었고, 내 뜻에 반하면 그 상대를 ‘잘못한’사람. 즉, 죄인 취급하기 바빴다.

이것은 나의 잘못된 판단과 생각이기에 앞서, 내 뜻을 내려놓지 못하는 ‘욕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욕심은 고집을 낳고, 욕심은 스스로를 내려놓지 못하게 만들고, 욕심은 결국 자기 발에 족쇄를 채우고, 욕심은 작은 새장에 스스로를 가두고, 욕심은 끝내 깊은 수렁에 빠져 벗어날 수 없게 하는 ‘악의 근원지’가 될 수 있다.

잘못된 색안경을 쓰거나,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면, 내 욕심의 무게를 재어보아라.

‘내가 이런 행동을 포기할 수 있는가’, ‘내가 이 생각을 바꿀 자신이 있는가’, ‘내가 상대를  먼저 이해할 수 있는가’ 를 자신에게 물어보자.

그러면 그것이 나의 욕심에서 비롯된 고집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수월해 질 것이다.

   반복

위에서의 고집을 내려 놓지 못하면, 결국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쉽게 반복한다.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나 말, 생각, 가치관인 줄도 모른 채 말이다.

우리는 낮과 밤, 해와 달, 하루의 연속, 한 달의 연속, 일 년의 연속 등 일련의 무언가를 반복되는 삶을 살아간다. 또한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을 반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작용되는 반복은 여기까지면 충분하다.

사람은 너무도 쉽게 본인 행동에 대해 망각하기 쉽다. 똑같은 판단을 내리고, 똑같은 평가를 하고, 똑같은 잘못을 하고, 똑같은 실수를 하고, 똑같은 말을 하고, 똑같은 행동을 한다.

언제까지 반복되기만 하는 삶을 살아갈 생각인가.

상처, 아픔, 힘듦, 트라우마를 반복하는 모든 부정적인에너지의 공통점은 ‘반복’이며 나를 내려놓지 못하는 ‘욕심’이다.

나의 이러한 삶에 만족하는가.

나의 이러한 반복에 행복한가.

분명 돌아올 대답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 반복의 순환고리를 끊어내고, 다른 길로 가보는 것. 다른 시도를 해보는 것. 다른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래야 나를 괴롭히며 따라다니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잘라낼 수 있고,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올바른 변화가 반복이 되면 내 인생은 바뀌어 있을 것이다.

내가 바뀌어야 인생이 바뀐다.

부디 여러분의 욕심, 고집, 색안경, 반복을 끊어낼 용기를 내어주길 바라는 바이다.

   나 자신을 놓아주는 법

저자도 처음엔 많은 방황을 했고, 수없이 애매모호하고 헷갈리고, 갈등되는 상황들을 겪으며 숱한 시행착오를 거듭해왔다.

대체 어떻게 해야 나 ‘자신’을 속박에서 스스로 풀어줄 수 있을까. 정신적으로 아픈 우울증, 공황장애, 공포, 강박증, 집착, 편집증 등의 상황들은 내 의지대로 쉽게 회복이 되기 어려운데, 어떻게 해야만 이 악순환의 고리를 잘라낼 수 있는가 말이다.

너무도 답답하고 미치겠어서 좌절도 많이했고, 많이 주저앉아봤다.

많이 꺾여 부러져도 봤다.

그러고 나서 깨달음이 왔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꺾여 보아라. 무너져 보아라. 좌절해 보아라. 흔들려 보아라. 주저앚아 내려 보아라.

이것들을 반복에 반복을 하다보니, ‘포기’가 되었다.

여기서 ‘포기’는 부정적인 단어로 흔히 쓰이지만, 이 단어도 굉장히 긍정적으로 작용될 때가 있다는 것.

내 모든 욕심, 고집, 편견 등을 ‘포기’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 진다.

하도 깨지고, 부러지고, 주저앉아울고, 꺾이고, 아파보니 알겠더라.

스스로 괴롭힐만큼 괴롭히는 것도 때론 괜찮은 치료법이란 생각이 든다. 그렇게 끊임없이 나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반복하면, 모든 기력이 다 빠져, 일어날 힘 조차 없을만큼 지치고 죽고싶을 때. 딱 그때. ‘포기’하는 마음이 찾아온다.

그제서야 비로소 찾아오는 포기는 이토록 귀할 수 없다.

나의 내면에 있는 모든 생각들에, 가치관에, 고집에 포기를 해버리니, 무겁게 들고 있던 짐을 훅 내려놓고 나니. 가벼워짐을 알 수 있었다.

내가 포기를 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잘도 굴러간다.

그러고 나서 휴식을 한 동안 취했다. 나를 괴롭히며 따라다니던 모든 생각 자체를 포기하고 강제부팅을 시켜버리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라는 마음이 생겼다.

아이러니 하게도,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에 + 부정적인 말과 생각은 = ‘긍정’이 탄생되는 놀라운 결과를 찾게 되었지 뭔가.

그래서 저자는 지금도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올라올 때면, 늘 이렇게 되새기며 중얼거린다. “다~ 의미없다~!”

그렇게 외치고 나면, 내 머릿속 안을 가득 메우던 부정적인 연기들은 금세 사라지고 긍정이 꽃피워 진다.

그것이 비로소 나를 내려놓는 방법이었다.

‘포기’는 이럴 때 사용하도록 하자. 쓸데 없는 일에 쓰지 말고 꼭, 부정적인 에너지에 포기를 사용하라.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에게 부정적인 말을 곁들여라. 그럼 긍정으로 재탄생된다.

“그까짓 게 뭐라고 날 괴롭히니~ 소용없다~! 부질없다~! 훠이~!” 하고 말이다. (ㅋ)

보아라. 우린 이제 선택할 수 있지 않은가. 이토록 이로운 방법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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