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깊게 파헤쳐라
분노
부정적인 감정을 좀 더 세분화해서 이제는 곰곰히 생각해 보자.
이렇게 감정을 세분화 시키는 과정은 조금 더 나의 내면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관찰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 나의 내면을 잘 파헤쳐야, 구석구석 몰래 껌딱지처럼 붙어있는 부정덩어리를 찾아내어 제거할 수 있다. 위내시경같다랄까...?
내가 생각하는 부정에너지의 감정 1위는 분노라 할 수 있겠다.
분노는 사실 분노가 아니다. 이게 무슨말이지? 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도 이게 무슨말인가 싶다.
(...?) 저자는 어릴 적부터 생각이 굉장이 많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너무 생각이 많아서 머리가 터져나갈 지경인 적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대체 왜 내 감정은 내 뜻대로 안될까’--->에서 꼬리를 물어, ‘왜 이런 감정이 어디서부터 오는걸까’로 이어져 파고 파다보니, 분노의 근원이 되는 뿌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분노라는 감정을 더 세분화 시켜볼까. 분노는 어떨 때 일어날까. 어디서부터 올까?
1. 내 마음에 차지 않을 때.
2. 누군가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 때.
3. 무언가를 뺏겼을 때.
4. 나를 무시할 때
5. 답답할 때.
6.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을 때.
뭐 대충 이정도로 세분화 시켜봤다. 어떤가.
결국 분노는 인간의 욕구가 충족이 안되었을 때 나오는 반사신경 같은 감정이라고 정의해 본다. (지극히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욕심’, ‘만족’, ‘인정’ 과 밀접한 관계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미치도록 화가 올라온다는 것은, 무언가를 인정받지 못하거나, 소유하는데 실패했거나, 만족스럽지 못할 때라는 것을 인지 해보도록 하자.
결국, 분노는 ‘개인의’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분노 표출은 타인에게 풀지 말도록하자. 지극히 개인의 기준안에서 개인의 판단으로 이루어져 올라오는 감정이기에. 굳이 표출을 해야 겠거든, 위의 ‘바람’편에 욕하고 날려버리도록.
슬픔
슬픔. 이 감정은 내가 어찌 해결할 길이 전혀 없을 때 느껴지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분노의 다음 단계라고 할까. 분노 표출은 어떻게든 다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발악하는 과정이라면, 슬픔은 아무리 분노로 발버둥을 쳐도 더 이상,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더 이상의 해결방법이 없을 때. 망연자실하는 느낌 일 것이다.
예를 들어, 보통 정말 사랑하는 이를 하늘로 떠나보냈을 때와 같이, 도저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 때. 고인이 아니더라도, 어떠한 대상이 절대적으로 나에게로 오지 않을 때. 내 것이 될 수 없을 때. 슬픔을 느낀다. 슬픔과 동반하는 눈물은 그런 느낌 같다.
분노로 아무리 쥐어짜고 짜도 더는 방법이 없어 그동안 쥐어 짠 것이 눈물로 나오는 것만 같다.
근데 눈물도 슬픔이란 감정도,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거나 자주 노출이 되면, 메말라버리는 것 같다. 본인이 바짝 메말라버린지도 모른 채. 바깥에 햇볕으로 말린 오징어가 된 느낌마냥 빼빼 말라버리는 것. 이 슬픔이라는 감정은 영혼을 메마르게 하는 아주 위험한 놈이다.
왜냐하면 그 다음 나열되는 감정들을 합병증처럼 불러오기 때문이다.
의욕상실
분노와 슬픔을 거쳐 나타나는 증세는 아마 의욕상실일 것이다.
분노로 인해 열심히 요동치고 날뛰어 에너지를 소진 한 상태에서 슬픔으로 영혼이 메마르게 두었으니 당연히 에너지고갈이지 않겠는가.
의욕상실은 배터리와도 같다.
더 이상의 동기부여가 사라졌을 때. 그저 초점을 잃고 멍-한 상태로 아무것도 하지않는 살아있는 시체가 된다.
‘더 이상 뛰지 않는 벼룩’을 아는가?
병 속에 벼룩을 잡아 뚜껑을 닫아 방치하면 벼룩은 어떻게든 탈출하기 위해 몇번이고 뛰어오르지만 매번 뚜껑에 부딪혀 떨어지기를 수십번, 수백번쯤 반복하고 나면, 더 이상은 소용없다는 것을 학습하게 된다. 말 그대로 동기부여를 잃어버려 더 이상은 뛰지 않는 벼룩이 되는 것이다.
인간도 이러한 과정이 있다. 사회생활 할 때는, 번아웃이라는 표현으로 찾아오기도 하고, 일상에선 그 자체 살아있는 시체...의 느낌이랄까.
배터리가 나가면 어찌 해야되겠는가. 감정이라는 타이틀을 글로써 직접 세분화하여 보니 훨씬 무얼 해야하는지 명확히 보이지 않는가?
맞다. 밥을 줘야지. 에너지원이 되는 밥. 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입맛이 꼭 맞는 에너지원이 되는 밥을 찾을 것을 명심하라.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잠이 될 수도 있고, 바람을 쐬러 나가는 산책이 될 수도 있고, 책을 읽는 것일 수도 있고, 술을 먹는 것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 좋다. 하지만 술은 왠만하면 지양한다.
술은 이미 지나가버린 분노와 슬픔을 다시 불러오는 버튼이 될 수 있기에 잘 못하면 막힌 변기처럼 넘쳐 차오를 것이다. 부정에너지엔 술 금지. 상성이 맞질 않는다.
‘의욕상실인데 뭘 할 의욕이 당연히 생기질 않지.’라고 나도 1년가량 시체처럼 산 적이있다.
최대한 에너지 고갈에서 빨리 벗어나는 방법은 반드시 ‘움직여야’ 혹은 꼭 ‘무언갈 해야’하는 것이지만, 그 마저도 못하겠을 땐, 저자가 그런 것 처럼 그냥 숨만 쉬어라. 잠만 자라. 배고플 때 까지 굶어라. 결국엔 내가 스스로 배고픔에 못이겨 기어나와 밥은 먹더라. 자다자다 못해 온몸이 결려 죽겠어서 일어나게 되더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대신 시간은 오래오래 걸린다. 미리 말해두었으니 명심하자. 오.래.걸.린.다.
미움
어느 정도 시간도 흐르고, 머릿 속과 마음 속에서는 이제 정립이 슬슬 되는 시기가 온다. 물론 이 미움이란 감정은 분노와 슬픔 단계에서도 충분히 병행되어 나타나지만, 가장 명확하게 딱, 미움만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시기는 의욕상실 이후 일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시체마냥 살았으니, 사람은 합리적인 핑곗거리를 찾게 되지 뭔가.
시간소비를 1년이상 낭비한 저자는, 원망할 대상을 찾게 되었다.
사실 합리적이라 스스로 생각하겠지만 정말 비합리적인 핑계에 불과한 것이다.
의욕상실로 인해 스스로 동굴에 들어가길 자처한 것은 본인이다.
내가 선택한 것이지, 남이 선택해 억지로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생각해야한다. 부정적인 감정에 몰려 올 때는 최대한 이론적으로, 이성적으로만 생각하자. 그리고 정말 이러한 미움과 원망은 굉장히 비효율적인 짓이다. 미움이 머릿 속에 가득차있게 되면, 나의 뇌는 정말이지 온종일 오로지 거기에만 몰두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다시 돌아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는 증거이다.
사실은 ‘이러고 있는 나’ 자체가 미운 것을 다른 대상에게 투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얘기한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보다 용서해줘버리는 게 빠르고 속 편하다고 말이다.
저자도 그 말에 공감한다. 한 때, 누군가를 미치도록 미워하는 마음에 하나님께 기도도 했다. 제발 그 사람 벌받게 해달라고. 근데 그럴수록, 그 사람에 대한 내 감정을 내가 못 놓고 쥐어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럴수록 나만 더 괴로웠다. 그 사람은 어딘가에서 잘만 살텐데 말이다. 그걸 깨닫고 나서는 그게 더 억울해져 바꿔 생각했다. ‘어차피 그런 마인드의 사람이라면 알아서 벌 받겠다’ 하면서 말이다. 가장 최고의 복수는 ‘잊어버리는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잊어버리면 더는 그 사람을 미워할 수 없게 된다. 한참을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떠나보낼 줄 몰랐던 저자는 그토록 괴로웠지만 마침내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에이, 똥 밟았네! 하며 냉큼 잊어버리자. 알아서 벌 받을 사람은 정말 벌 받더라. 내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말이다.
짜증
분노의 자잘하게 쪼개진 감정이다. 분노와 다른 점은, 분노는 폭발하는 시한폭탄이라면, 짜증은 상처난 부위를 갉작갉작 사포질하는 느낌의 감정이다.
어떻게 보면, 분노는 한 번 폭발하면 어느정도 다운되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짜증은 말그대로 짜증나게시리 가늘고 길게 계속 유지되며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짜증은 더 무서운 것은, 그 어떤 감정보다도 타인의 분노를 불러온다는 점이다.
전파력, 감염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짜증은 짜증을 내는 본인보다 타인을 더 괴롭게 만드는 감정일 것이다.
짜증이란 내 마음 속의 만족에 부합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표출이다. 결국 짜증이란 감정은 내 마음 속 기준에서만 일어나는 판단일 뿐이지, 상대의 잘못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보통은 혼잣말하듯이 표현하기보다는 상대에게 분풀이를 하듯 표출해내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짜증이라는 감정이 올라올때면 다시한번 내 마음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상대에게 잘못이 있는것이 아니다. 그러니 죄인 취급 하지 않는 것.”
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기억해야만 인간관계에서 불화가 불어나는 것을 방지 할 수 있다.
이 감정이 올라온다면 반드시 기억해라. “짜쯩이 발생되는 가운데에서도 감사 할 만한 일을 찾는 것이다.” 누구나 이 감정은 불쑥불쑥 올라온다. 우리가 갑자기 올라오는 감정을 막을 수는 없다. 다만 스스로 ‘감사’를 심어줌으로써 더 크게 번질 부정적인 에너지를 쳐낼 수 있게 된다는 점을 기억하자. 내 만족에 부합해서 올라오는 감정이기에 내 기준을 조금은 내려 볼 필요가 있다.
불안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올바르게 믿지 못할 때 발생되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앞날에 대한 막연함, 내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지 의심이 될 때, 일이 잘되어가는 것이 맞는가 하는 모호함, 스스로가 생각할 때 자신감이 없을 때.
이런 상황들이 벌어지면 나도 모르게 불안이라는 감정이 올라와, 나를 더욱 두렵고 초조하게 만든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내 자신을 곧게 믿는 것이다.
어떤 감정이든 다스리고 조절하는 것은 당연지사 어려운 일이지만, 내 스스로의 뇌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불안이 올라올 때면 나의 뇌에게 외쳐보자. “그래서 뭐.”, “그렇다고 죽기야 하겠어?”,“난 내가 잘 될 것을 믿어.”라고 말이다.
우리의 뇌는 본능적으로 생존본능으로 보호하기 위해 불안이라는 감정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본능에 앞서, 내가 무슨 생각으로 불안이라는 감정이 올라오게 했는지를 그 뿌리를 찾아 제거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 불안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디서부터, 언제부터, 무슨 생각으로부터 이 감정이 올라왔는지를 꼼꼼하게 깊이 파고 들어 찾아내보자.
공포
불안과 초조가 합쳐지고, 이 감정들이 극대화가 되면 공포라는 감정이 찾아온다.
나도 공황장애와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극심한 공포증을 오랜세월 앓아본 적이 있다.
왜 이렇게 두려움이 찾아오는지 나의 과거의 과거부터 천천히 들여다 보게 되었는데, 나는 어릴 적 늘 혼자 지내온 적이 많았다. 부모님이 계셨어도, 부모님 또한 상황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거의 홀로 방치된 채 알아서 커왔다. 그러다 보니, 사람에게 기대고, 사랑을 받아야 할 시기를 그대로 지나오게 되니, 성인이 되어서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면 어마어마한 두려움에 휩싸여야만 했다. 내가 정말로 힘들거나 아플 때 등, 전화 한 통이면 달려와 줄 이 하나 없을 때 나는 혼자 웅크리고 공포와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무한반복되는 공포라는 악순환에 사로잡혀 위험한 생각과 시도를 많이 했던 적이 있었다. 이렇게 끔찍하고 두렵고 공포투성이인 세상에 ‘홀로’ 존재감조차 없이 살 바엔 죽는 게 낫겠다라는 잘못된 판단으로 죽음의 시도를 여러번 했다.
내가 이 무서운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당장 눈앞에 보여지는 실상은 정말 나 ‘혼자’일지라도, 멀리서 보면 결국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스스로의 믿음이었다.
나 자신을 온전히 믿고 보듬었을 때, 비로소 나는 이 공포라는 족쇄를 스스로 끊어낼 수 있었다.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두려움을 겪어본 자 있는가. 있다면 인스타그램을 통해 메세지를 보내라. 내가 비록 미흡할지라도 당신의 손을 잡아 일으켜 보겠노라 다짐하는 작가이기에 말한다.
낙심
낙심이란 감정은, 나의 기대치가 높았을 때 돌아오는 실망을 말한다. 내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을 때 사람은 낙심을 하게 된다.
그 말은 한자 그대로 내 마음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같은 느낌을 말하는 감정이다.
어떠한 일에 낙심이 된다면, 나의 기대를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하다.
기대라는 것은 나의 어떠한 기준치에서 만족이 될 만한 것을 목표로 잡는다.
목표를 세워 나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기대치에 다다르지 못했다고 해서 내 스스로를 바닥으로 내 몰면 안 된다. 결국 나의 기대치에 만족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것은 실패도, 당신이 잘못해서 벌어진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한다.
낙심이라는 마음. 실망이라는 감정이 올라오거든 스스로에게 이렇게 되새기자.
“뭐, 이거 좀 안됐다고 해서, 내 인생이 잘못된 건 아니니 괜찮아. 다음 기회에 더 잘하면 되지 뭐.” 좀 더 내 자신을 믿을 수 있어야 낙심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했을 때 감사하라. “아, 훈련의 과정이구나. 덕분에 나는 남들보다 경험치가 더 쌓였군. 오히려 좋아.”라고 외치며 이렇게 생각해보자. 이 과정들을 통해 더 단단해질 미래의 나를 상상하며 오히려 즐거워 하는 것. 이것이 낙심을 이기는 방법이다.
질투
질투라는 감정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아주 흔한 감정이지만. 잘못되면 스스로를 더욱 남과 비교하고 낙심과 불안까지 초래하는 감정이다.
이 감정은 쉽게 말해 상대적 비교를 통해 찾아온다. 수 많은 허울뿐인 SNS속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며 내 인생, 지금의 나의 초라해보이는 상황과 비교가 되니 마음이 들끓을 수 밖에 없다.
질투는 남을 시기하는 마음, 남이 잘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이 상하는 현상이지만, 이 감정을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면 나에게 더 훨씬 좋은 긍정의 시너지를 발생시킬 수 있다.
상대적비교는 나 자신을 쉽게 갉아먹고, 내 자신이 별 볼 것 없어보이게 하고, 초라해 보이게 하지만, 그저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저 사람들도 저렇게 잘 되기까지 무수히 어려운 과정들을 거쳐왔기에.”
그러니, 겉 모습만 보고 시기 질투하는 마음을 품기보다는, “나도 보이지 않는 저들의 노고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저들처럼 더 분발해야겠다.”라고 생각하자.
사람마다 잘되는 시기와 행복이 찾아오는 시간은 모두 다르다. 나의 때를 위해서 꾸준한 인내를 가지고 ‘비교’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며 노력하는 길이 날 위한 길임을 잊지말자.
아! 이것도 잊지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