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새싹, 물, 땅, 바람
[빛]
빛을 보아라.
‘빛’이다 라고 우리가 자각하는 이유는 ‘어둠’을 알기 때문이다.
어둠을 밝혀내는 존재가 빛이기 때문이다.
굳이 순서를 따지면 어둠이 먼저 배경으로, 그 다음 빛이 존재를 나타냄으로써 그 위대하고 귀중함을 우린 알 수 있다.
부정적인 에너지를 나는 ‘어둠’이라 표현한다. 예를 들어 까맣게 칠한 도화지 한장에 바늘로 구멍을 낸 후, 하늘로 들어올려 햇볕이 비치는 곳에 갖다대어 보아라.
아주 작은 구멍이지만 그 구멍의 틈새로 들어오는 작은 빛 한줄기의 영향력은 실로 굉장히 위대하다. 내 눈을 멀어버리게 할 것 만 같은 힘을 지닌 빛 한줄기.
어둠을 느껴보았기 때문에 빛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든 어둠만 존재할 수 없고, 빛만 존재 할 수도 없다.
부정적인 모든 것을 이렇게 비유하며 생각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해가 뜨고 지며 밤이 찾아오듯, 그마저도 고요한 밤에도 별과 달이 나를 비추듯 늘 어둠속이라도 빛은 나를 따라다닌다.
그러니 어둠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을 버리는 것이 좋다. 하다못해 인간이 만들어낸 저 가로등도 당신의 안위를 위해 비추고 있지 않은가.
[새싹]
파릇하게 올라온 여리디 여린 새싹들이 즐비한 숲이나 공원으로 나가보자.
내 코를 충분히 향긋하게 자극 시킬만한 풀내음이 진동한다. 잔치라도 하듯 새싹들 사이사이에서 지저귀는 풀벌레들은 정말 연주회를 여는 듯한 느낌을 느낀다.
부정적인 에너지들은 대체로 자연을 돌아보지 않을 때 더욱 빈번히, 그리고 더욱 고독하고 무겁게 나를 둘러 감싼다.
저 새싹 한 줄기가 나라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자. 인간도 아닌 하물며 저 작은 초록잎사귀 풀떼기 하나가 저리도 이슬 한 방울씩 먹어가며 어떻게든 힘껏 살아내지 않는가.
충분히 살아내고 영향력있는 인간 한 명이 저 새싹을 이기지 못하면 되겠나. 나약해지지 말자. 마음이 답답하고 너무 혼란스러울 땐 자연이 있는 곳을 찾아라.
그 속에서 분명 비교할 대상이 있을 것이다. 힘과 용기를 얻을 대상이 있을 것이다.
‘저 새싹하나도 저리 잘 살아내는데...’하며 오히려 부정적으로 생각해버리는 편협함은 이제 그만두어라.
‘저 새싹도 저리 열심히 사는데, 나도 해내봐야지.’하고 생각 하는 것이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인생살기 속 편하다. 말 그대로 머릿 속이 가벼워진다.
굳이 나를 자극시키고 매질하지 마라.
[물]
냇가에 바람쐬러 간 적이 있다.
너무 우울증이 심해 어두캄캄한 집 안에 쳐박혀 지낼 무렵에, 잠시 만났던 오빠가 나의 기분은 전환 시켜준다며 서울 외각 근교쪽 어느 계곡 냇가쪽으로 날 데려갔다.
맑은 물이 매끈한 바위들 사이로 졸졸졸- 흘러내리는 것을 그저 멍 하니 한참을 바라보았다.
무언가에 매료되었는고. 하니. ‘내 인생도 저렇게 물 흐르듯이 별 생각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날 것 그대로, 자연 그대로 흘러갈 순 없는 걸까.’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부러웠다. 그저 흐르기만 하는 물이. 난 왜그리도 생각도 많고 복잡해서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은 지, 왜 내 인생은 저렇게 편안히 흘러갈 순 없는 건지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내 머릿속과 내 인생의 흐름을 이렇게 답답하게 흘러가지 못하게 잡고 있는 것은 나 일지도 모른다.’라고.
맞지 않은가. 누군가는 어려운 일을 당해도, ‘뭐 지나가겠지. 하하하’ 하고 유연하게 그 순간을 흘려보내고, 감정을 흘려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정말 미치도록 괴로워 살 수가 없어. 나 너무 힘들어.’라는 생각과 감정에만 사로잡혀 아무것도 못한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전자를 택하는 것이 훨씬 삶이 윤택해지지 않겠나.
그러나 여기에 질문이나 반박을 던지겠지. ‘맘 먹은대로, 내 의지대로 안되니까 문제지.’맞다. 잘 안된다.
그럴 땐 그냥 생각을 멈추고 잠이나 자라. 자꾸 같은 생각을 머물게 하니까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이제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몰려들 때면 그냥 잔다. 잠시 내 머리를 강제 로그아웃시키는 셈이다. 반복하니 이젠 알아서 졸음이 몰려온다.
생각을 멈추어라, 멈추어지기 힘들다면 강제 로그아웃시켜, 저 멀리 생각과 감정이 바람이든 물에 휩쓸리든 날아가게 둬버리자.
[땅]
우리 생명체는 땅이라는 존재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흙은 수많은 생명들을 잉태하는 자연 그대로의 위대함이다.
성경 구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들고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는 내용이 있다.
땅은 생명 그 자체가 된다. 많은 나무들과 꽃, 풀들이 자라게 하고, 인간들은 많은 열매와 곡식을 수확해 삶을 영위하고, 동물들과 곤충들도 제각기의 역할을 맡아 본능 그대로 자연 그대로 살아간다.
어린 시절 농촌 체험같은 걸 한 번씩 했던 기억이 있다.
그 곳에 가면 감자나, 고구마를 캐는 등의 각종 체험을 하게 하는 데, 그 때 제대로 진하고 부드러운 흙을 실컷 만져보았다.
누군가는 땅 혹은 흙은 더럽다 여기지만, 결국 생명을 소생시키고 잉태하게 하는 것인 땅이지 않은가?
모순적으로 생각치 말고 자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인정하자. 사람은 애초에 자연과 맞물려 살도록 창조되었다.
자연이 없으면 인간도, 어떤 생명체도 살아갈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보이는 각기의 생명체들은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
땅에서 솟아나는 모든 생명들은 사람에게 많은 것을 준다. 잊지 말자. 그 감사함에 대하여.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불평하지말고, 가난하다고 불만을 토로하지 말자.
우린 이미 자연으로부터 정말 많은 것을 댓가 없이 받아오며 살아온 소중한 존재이니 말이다.
[바람]
내가 무슨 얘기 할지 맞춰 볼 사람?
알아. 뻔한 말이고 흔한 말인 거. 근데 안 할 수가 없는 말이라 쓴다.
영화도 한 번 볼 때랑, 두 번 볼 때랑 다르게 보여지는 것이라 생각해주길 바란다.
바람은 영원히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저 지나가기 위함이다. 그러나 지나갈 뿐인데 바람 자체는 정말 많은 역할을 한다. 바람은 먼지를 날려보내기도 하고, 균을 가져오기도 한다.
바람은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기도 하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공기를 가져오기도 한다. 바람은 아름다운 벚꽃비를 감상하게 해주기도 하고, 낙엽을 수북히 가져오기도 한다.
바람은 파도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꽃가루를 퍼트려 생명들이 더 멀리 퍼질 수 있게도 한다.
즉, 핵심은 부정적인 감정은 영원히 머무르지 못한다. 지나간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 보다는 나는 다른 표현을 사용하는 편이다. 해결해 주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내 마음의 변화’이다.
상황에 따라서, 아픔의 무게에 따라서 시간이 짧게 걸리거나 길게 걸릴 뿐, 시간이 ‘주’가 아닌 내 ‘마음의 상태’에 따른 것이다.
바람이 제각각의 좋지 못한 역할을 할 때도, 좋은 역할을 할 때도 있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늘 균일하지 못하다. 다만, 부정적인 감정이 찾아왔을 땐, 바람에 실어 최대한 빨리 날려보내라. 그래야 시간이 조금이라도 짧아진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내 마음이 편해진다. 바람에 실어 보내버리기를 실천하자.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땐, 시원하게 바람에 욕을 실컷하고 실어보내주는 것. 그리고 작은 먼지처럼 붙어있는 감정의 찌꺼기를 툭툭 옷을 털 듯, 털어 마무리할 것. 바람은 돌고 돌듯이, 우리의 감정도 돌고 돈다. 제 아무리 고된 고통이라도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다시 찾아오기도 한다. 다시 찾아오기를 두려워 하지말고 한 번 털어본 경험으로 두 번째엔 더 쉽게 털어버려라. 그렇게 바람이 찾아올 때 마다 연습해보자. 부정아! 좋게 말할 때 빨리 지나가라잉! 하고 말이다.